그리운 어머니
불러보고 그리고 또 불러봐도 정다운 이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격스러운 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실된 단어, 사랑과 조건 없는 희생의 대명사, 어머니. 그 순수한 가슴의 땀 냄새를 맡으며 옷고름 풀어헤친 포근한 품에 안겨 내가 젖을 빨던 그 여인, 어려서나 젊었을 때나, 늙은 후에도, 그리고 내가 죽어 흙이 된 후에라도 영원히 사모하는 그분, 나의 아머니!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에 시집와, 젊어 과부가 되어 4남매를 키우고, 한 번도 영화를 누리지 못했고, 자식들을 위해 눈물만 흘리시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1968년 7월24일, 74년간의 고난과 수고와 희생을 끝내고 가셨다.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서 울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울지 않았다. 한이 맺힌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는 것은 얄팍한 거짓말이다. 우리의 한이 극에 달했을 때 울 수 있다면 그것은 사치다.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집 부엌에서 함지박에 꽁보리밥과 콩밭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듬뿍 넣고 비벼 나와 둘이서 할머니 몰래 먹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나의 코를 풀고 앞치마로 닦아주시던 어머니의 손 모습이 지금도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나는 그 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詩(시)를 썼고 1994년에 출판한 첫 시집에 그 시를 실었는데 전국각지에서 위로의 전화가 왔다. KBS 방송국에서는 그해 어버이날에 主題詩(주제시)로 방송되어 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축축하게 적셔주었다. 나의 어머니, 지금은 아버지 곁으로 가셔서 고향 뒷산 차가운 흙 속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내가 쓴 이 시를 읽고, 그때 울지 못했던 눈물을 이제 흐느껴 운다.
* 어머니
소나무 껍질같이 거친 손으로
보리방아 찧어
꽁보리밥 애호박 잎 된장
저녁상 물리고
석유등잔 툇마루에
새 다리보다 가는 무릎 치켜세우고
밤늦도록 모시길쌈 하시던
어머니
장날 모시 판돈
삼베치마 속주머니에
꼬깃꼬깃 숨겼다가
큰아들 술빚 갚고
밀린 월사금 달라고 조르던 나를 껴안고
땀 냄새 찌든 홑이불 속에서
소리 없이 우시던
어머니
한 많은 홀어미의 쓰라린 씨앗
이마 주름살, 이랑 이랑에 뿌리고
자식들 잘되라고
엄동 추운 밤
얼음물에 목욕재계하고
주린 배를 띠로 조르며
소같이 일만 하시던
어머니
가난 끝내 등에 지고 그가 세상 떠나던 날
동네 과부들이 슬피 울고
큰아들 큰며느리 시집간 딸들이 슬피 울 때
나는 울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울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나를
불효자식이라고
수군수군 하였다.
울진 삼척 공비침투
가. 1968년 1·21 청와대 기습작전에 실패한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은 포기하지 않고 대남 교란작전을 다시 시작했다. 1968년 10월30일~11월2일까지 3회에 걸쳐 124군부대 무장공비 총 120명을 남한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시켰다.
저들은 10월30일 원산에서 공작선을 타고 남하해 경비가 소홀한 동해안 울진과 삼척에 상륙했다. 군복, 신사복, 등산복으로 15명씩 조를 구성해 강원도 산악지대 농촌마을에 접근하고 부락민들에게 북한찬양 선전과 남자들에게는 남조선 혁명을 위해 노동당이나 인민유격대에 가입하라고, 여성들에게는 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강요했다. 그에 불응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 무자비하게 칼로 찌르고 돌로 쳐서 살해했다. 그때 남한의 對간첩대책본부는 11월4일 대통령훈령 18호에 근거해 강원도 정선, 영월, 삼척지구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군경과 예비군을 동원하여 공비소탕작전을 개시했다.
12월9일 밤에는 평창군 산간마을에서 초등학교 2학년생인 이승복 군(당시 열 살)을 만나고, 북한과 남한 어느 쪽이 좋으냐고 물었을 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자 공비들이 무참하게 그의 입을 찢고 절구공이로 머리를 쳐서 죽였다. 어머니 주대하(당시 33세)와 두 동생 승수(당시 7세)와 승자(당시 4세)도 살해했다. 그때 승복군의 형 승권(당시 15세, 호적명은 이학관)은 36군데나 칼에 찔리고도 살아남았고, 아버지 이석우는 다리에 칼을 맞고도 필사적으로 도주해 목숨을 건졌다.
나. 공비토벌작전은 12월28일까지 약 2개월간 진행되어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 그때 우리 측이 당한 피해는 軍警民(군경민) 합해서 사망자 82명, 부상자 67명이 발생했다. 생포된 7명은 즉시 서울 대방동에 있는 수용소에 후송되어 韓美합동심문반(Central Joint Interrogation Team)이 총동원하여 저들을 심문했다. 마치 戰時를 방불하는 분위기였다.
그때는 아직도 국내의 모든 대공심문활동을 美 502군사정보단이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측 수석 심문관이었던 내가 합동심문반의 모든 활동을 총지휘했다. 그리고 北에서는 청와대 기습작전의 실패와 울진삼척 작전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동당의 대남사업 총책 허봉학과 민족보위상 최광과 정찰국장 김정태가 숙청됐다.
다. 강원도 평창군 산간벽촌에 살면서 그 어린나이에 생명의 위협을 앞에 두고도 비겁하지 않게 대담한 반공정신을 보여준 이승복 어린이의 갸륵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부는 기념관과 동상을 세워주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그 이야기를 실어 자라나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어주는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국내 여러 신문기자들이 공비침투사건을 기사로 썼지만 특별히 <조선일보> 기자는 이승복 어린이의 비참한 죽음과 최후의 일언《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비중 있게(1968년 12월11일) 다뤘다. 그 기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형 승권이 증언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어떤 골치 아픈 단체에서는 북한의 대남공작을 미화하고 빨치산을 비호하는 글을 대담하게 퍼트렸고 <조선일보>의 이승복에 관한 기사는 ‘없었던 사실을 날조한 기사’라고, 또는 정부가 반공의식을 고취하기위하여 지어낸 ‘작문’이라고 공격했다. 이로 인해 <조선일보>는 그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고 그들의 법정공방은 장장 17년이나 걸렸다.
라. 사건발생 24년 후인 1992년에 <미디어 오늘>의 김00 前 편집국장은 한국기자협회에서 발간하는 <저널리즘> 가을호에, 울진삼척 공비침투 사건당시 <조선일보>가 보도한 내용은 조작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기고했다.
1998년 8월에 언론개혁시민연대는 그들이 주장하는 50개의 허위왜곡보도 실례를 선정해 기사화했는데, 거기에서도 이승복의 이야기는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9월3일, 서울지법 형사9단독 박태동 부장판사는 1999년에 <조선일보>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前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김00과 전 <미디어 오늘> 편집국장 김00에게, 이승복의 피살사건은 전혀 조작이 아니고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밝히고, 그들에게 각각 징역 6개월과 10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서울지법의 판결에 불복하고 즉시 상고했지만, 2006년 11월 대법원 판결에서도 저들의 유죄를 확정했다.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시절에는 내내 친북좌익 언론이 이승복 피살사건을 군사정권이 꾸며낸 조작이라고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뿐인가, 전교조는 지금도 이승복 피살사건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대한민국은 참으로 희한한 나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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