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을 배우고 있어요.”
경찰청에서 만난 윤지웅의 첫 마디였다. 머리카락이 짧아지면서 자신을 수행승으로 착각이라도 한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가 않다. 윤지웅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경찰청에 들어오기 전에는 뭔가를 계속 채우려고만 했어요. 근데 어느 정도 차 있는 상황에서는 넣으려고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새로 채우려면 기존의 것을 비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윤지웅은 기적이 가끔 일어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선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진=손윤) |
53경기에 나와 2승 무패 9홀드, 평균자책점 4.08. 지난해 넥센에서 윤지웅이 거둔 성적이다. 신인치고는 나쁜 성적은 아니다. 하지만 정작 윤지웅 자신은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전체 3순위 지명자라는 이름값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까. 윤지웅은 “성적을 떠나 내 공을 한 번도 던진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작년에는 제가 신인이라서 마운드에서 여유가 없었고 투구 밸런스도 안 좋았어요. 1년 내내 제 공을 단 한 개도 못 던져봤어요. 그게 아쉬운 거죠. 너무 싫었고요. 근데 경찰청에서는 제 공을 던질 수 있게끔 투구 밸런스를 잡아가고 있고 좋아진 게 느껴져요. 이렇게 하나씩 만들어가고 게임하면서 더 경험을 쌓으면 2년 뒤 LG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걸로 생각해요.”
팀 내에 스타플레이어가 있으면 다른 선수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경찰청에는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왼손 투수 가운데 한 명인 장원준이 있다. 윤지웅 역시 “장원준을 보면서 배우는 게 많다”고 밝혔다.
“(장)원준이 형을 곁에서 지켜보니까 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왼손 투수인지를 알겠더라고요. 기술적으로는 중심을 더 오래 잡아놓고 앞까지 끌고 나와서 던지니까 공 끝과 제구력이 좋은 것 같아요. 근데 사실은 기술적인 부분보다 생활태도에서 배우는 게 더 많아요. 적지 않은 나이에 스타인데도 21살 어린 선수들과 똑같이 자기 할 일을 다하고 항상 솔선수범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누구보다 먼저 운동장에서 훈련을 시작하고 밤에 연습이 끝났을 땐 운동장 정리하고 마사지 받고 자기 할 일을 다 끝낸 뒤에 방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샤워하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생활의 기본부터 철저하게 지켜나가니까 야구를 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저도 원준이 형처럼 제 할 일을 스스로 찾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게 야구와는 무관한 것 같지만 상관이 있다고 봐요.”
윤지웅은 “경찰청에 들어와 한결 여유가 생긴 것은 유승안 감독을 비롯한 좋은 코칭스태프를 만난 것도 크다”고 말했다. 특히 진필중 투수 코치에게 강한 신뢰감을 나타냈다. 진 코치는 자신의 뜻을 무조건 선수에게 강요하기보다 선수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이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가 짧은 시간에 선수들의 마음을 연 것이다.
최근 진 코치는 윤지웅에게 일본 프로야구의 살아 있는 전설 야마모토 마사의 투구 동작 비디오를 보여줬다. 주니치 투수 야마모토는 통산 212승(24일 기준)을 거두고 있는 왼손 투수다. 진 코치가 빠른 볼보다 마운드 운영 능력과 자신감을 무기로 삼는 야마모토의 투구를 보여준 이유는 무엇일까. 지나치게 힘에 의존해서 투구하려고 하는 윤지웅에게 스피드보다는 공 끝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해력이 빠른 윤지웅이기에 진 코치의 뜻을 쉽게 알아차렸다. 야마모토의 투구에서 많은 걸 깨달은 윤지웅은 24일 SK전에서 2.1이닝 무실점 투구로 시즌 4승째를 챙겼다.
“기술적으로는 일단 밸런스가 많이 잡혔어요. 그다음에는 계속 말하지만 여유가 많이 생겼어요. 작년엔 한두 좌타자만 상대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게, 또 제 공을 하나도 못 던진 게 너무 바보 같았거든요. 제가 도대체 왜 이런 건지 너무 답답하고 그랬죠. 근데 지금은 한결 여유가 생겼어요. 여기는 1, 2군을 왔다 갔다 하는 부담도 없잖아요. 또 이번에 못해도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러니까 마음이 되게 편해요. 여유가 생기니까 아직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투구 밸런스도 많이 좋아졌어요.”
경찰청에 입대한 윤지웅은 지난해와 달리 여유를 많이 찾았다. 규칙적인 생활 속에 야구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야구선수 이전에 군인 신분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행동 하나도 조심한다. (사진=손윤) |
사실 윤지웅의 올해 성적은 썩 좋지 않다. (24일 기준) 17경기에 나와 4승 1패 2홀드, 평균자책점 6.53에 whip(이닝당 출루 허용률)은 2.03이다. 어디 가서 투수라고 명함을 내밀기가 창피한 성적임에도 윤지웅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는 듯 밝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현재 몸 상태가 70%가 채 되지 않은 가운데 거둔 성적이기 때문이다.
“훈련소 때까지는 몸 상태가 아주 좋았어요. 작년 말부터 모교인 동의대에서 연습하고 훈련소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에 힘쓴 게 도움이 된 거죠. 근데 퓨처스리그가 개막하기 전까지 연습경기를 자주 갖지 못하며 투구 감각이 아주 무뎌졌어요. 또 훈련소에 있으니까 아무래도 훈련량도 부족했고요. 지금은 조금씩 제 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서 몸 상태가 6, 70% 정도밖에 안 올라왔어요. 그래도 중심 이동이 잘 되고 있으니까 날씨가 더워질수록 100%에 가까운 몸 상태가 될 거로 생각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윤지웅이 여유만 부리는 것은 아니다. 여유 속에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아직 자신은 프로야구에서 하나도 보여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경찰청에서의 2년은 저를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요. 남들처럼 몇 년간 잘하고 온 게 아니잖아요. 첫해는 신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다음 해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봐요. 프로는 기다려주지 않잖아요. 제 실력을 스스로 증명해야 제 존재의의가 생기는 거죠. 첫해 잘하고 이듬해에 못하면 2년 차 징크스라고 변명도 할 수 있지만 첫해부터 계속해서 못하면 매년 희망만 점점 사라지는 거니까요. 작년에 한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 안 하려고 해요. 실수를 자주 하면 실패가 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실패가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낙인이 찍힐 수 있는 거죠. 경찰청에서 천천히 하나씩 제 것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또 훈련소에서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유일하게 잘한 게 안 아픈 거였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팬들에게 부상 없이 항상 온 힘을 다하는 선수, 또 오늘은 실수해도 내일은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드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