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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여자1]
(23)
방학 끝 무렵 아침 밥상을 앞에 놓고 정숙이 “죽음 이후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지만 우리 조선 사람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이미 지옥이에요. 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이들을 구원할 말씀은 없더군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들고 있던 수저를 밥상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정숙은 꾹 다문 입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해는 기미년이었고 그것도 일종의 만세운동이었다. 거리에서 여럿이 부르는 만세보다 집 안에서 혼자 부르는 만세가 더 어려운 법이다.
(31)
1920년의 상해는 나이 스물의 식민지 청년들이 자유와 해방의 공기에 한껏 들뜰 만한 도시였다. 퇴폐와 향락의 도시였지만 동시에 사상과 문화의 별천지였다. 동양이면서 서양이었고 중국이면서 유럽이었다. 근대식 석조건물들이 아스팔트 대로를 따라 즐비했고 프랑스조계에는 식민지 베트남 남자들이 순사복 차림으로 경계를 섰고 영국조계에는 터번을 두른 인도 순사가 돌아다녔다. 또한 백주대낮에 조폭집단 청홍방이 사제폭탄으로 빌딩 하나를 날려버리기도 하고 밤마다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금시계를 찬 신사 숙녀들이 백화점과 오락관을 드나드는 번화한 거리 뒷골목에선 아편굴이 번창했고 식민지 조선의 망명객들이 개미굴 같은 하숙들을 얻어놓고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프랑스조계는 거리나 상점, 학교에서도 영어나 불어를 썼다. 점원이나 인력거꾼, 하인 들만이 중국인이었다.
(61)
정숙이 반격에 나섰고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소설이란 말이죠. 인물의 심리묘사만 제대로 해도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거예요. 심리가 사회를 반영하니까. 그 안에 리얼리즘도 있고 인민성도 있어요. 소설에 그렇게 교조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톨스토이도 설 자리가 없어요. 레닌은 톨스토이를 러시아혁명의 거울이라 했지만 플레하노프는 그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귀족 작가 정도로 취급했지요. 그래서 플레하노프는 레닌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는 종국에는 분파주의밖에 못 되는 거지요. 단순한 주의주장으로 달려가버리면 소설이 아니라 팸플릿이 되는 거예요. 카라마조프의 둘째 아들 이반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우직한 건 단순하고 현명한 것은 모호하다고. 그리고 진실은 복잡한 데 숨어 있는 거라고.”
(127~128)
회사가 최후통첩을 던지면서 어수선해진 편집국에서 정숙은 김동인 번안소설 <유랑자의 노래> 원고를 읽었다. 이광수가 건강상 이유로 장편소설 연재를 중단하면서 급히 김동인에게 부탁해 영국 소설 하나를 번안해 싣는 중이었다. 신문사로선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약관의 김동인이 이광수의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순수문학의 대표주자를 자임해온 형국으로 볼 때 이광수의 펑크를 김동인의 번안소설로 때우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춘원의 행보에 말들이 많고 소설도 따분했지만 주인공 이름만 조선식으로 슬쩍 고쳐놓은 번안소설을 싣기도 낯뜨거웠다.
(286-287)
세죽은 벤치에 앉아 함흥에서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가장 그리운 건 조선의 봄이었다. 조선의 봄은 따스했다. 세죽은 동네 아이들과 나물 캔다고 마구니 들고 들판과 야산을 쏘다녔다. 6년 전 함흥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뵈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산만 한 배를 부둥켜안고 성치 않은 남편과 서로를 부축하면 집을 떠날 때 어머니는 “그래, 어여 멀리멀리 가거라”라고 오른손을 휘휘 저으면서 왼손으로 옷고름을 쥐고 눈물을 찍어냈다. 올해 일흔여섯인데 생전에 어머니를 다시 뵐 수나 있을까. 남편은 지금 어찌하고 있을까. 멀쩡할까 미쳤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딸은 아직 그녀를 엄마로 부르지 않는다. 아이는 보육교사를 엄마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인생은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세상에 눈 떴을 때부터 세상은 위험하고 불친절했다. 삶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절망을 떠안길 것인가.
(337)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인생이 깨진 거울처럼 돼버린 것이. 딸을 두고 상해로 갈 때였을까, 조선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밀항할 때였을까, 아니 영생학교에서 퇴학당할 때부터였을까. 거울이 한 번 깨지고 나면 거울에 비치는 모든 것은 갈라지고 어긋날 수밖에 없다. 단야도 마찬가지였다. 이 풍운아에겐 아내도 가정도 바람이고 구름이다. 줄잡아 열 군데 학교를 전전하던 다혈질의 학생이 고향 집 아내에게 무슨 정이 있었겠으며 명자와는 결국 아내냐 애인이냐의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제는 친구의 아내를 맞이했으니 운명이 그에게 행복한 남편이 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죽은 단야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단야처럼 유쾌하고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기로 했다. 그런 결심은 효과가 있었다. 마음을 가볍게 띄워 올리자 자주 웃음이 터졌다.
(394-395)
“조선에 있을 때는 사회가 미성숙하고 여건이 열악하다 보니 최선의 인간이라는 공산주의자들조차 쓸데없는 파벌투쟁에 힘을 낭비하고 있구나 했어요. 연안은 물론 많이 달랐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 아닌가 싶어요. 당이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때로 숙당작업이 불가피하겠지요. 한데 온갖 개인감정과 파벌적 음모가 끼어들면서 활동가들이 개죽음한단 말이지요. 그걸 피할 수 없는 게 인간이라면 인간성이란 원칙적으로 진화가 불가능한 걸까요? 혁명 과정의 문제이고 혁명이 완료되면 달라질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소련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395)
창익은 읽은 책을 접어 탁자 위에 놓고 침상으로 왔다.
“혁명이 완료되면 달라질 거다, 라는 생각이 바로 이상주의라는 것 아니겠소. 나는 그런 이상주의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버렸소. 정치란 양의 얼굴을 한 늑대요. 어떤 정치에도 최선은 없소. 진보는 상대적인 것이고 더 나은 쪽을 택한다는 것뿐이오. 마르크시즘이 봉건제보다 낫고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니까. 끼니도 해결 못하는 중국 인민들에게 아편을 강제로 떠먹인 것이 자본주의요, 그 자본의 나갈 길을 개척하는 게 제국주의 총칼 아니오? 부르주아 정치라는 게 뭐요? 자본가들과 지주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이요. 장개석이 지금 하는 짓이 그것 아니오? 지주 자본가들이 장개석군대를 먹여 살리고 있잖소? 장개석 일파는 중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더라도 공산정부의 토지개혁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오. 장개석은 끊임없이 일본하고 뒷거래하고 있소. 아마 서안사변 없었으면 일본에 황하 이북을 내줬을 거요. 중국을 반토막 내서 그 반쪽이라도 챙기는 게 낫다는 심보요. 그런 장개석에 비해 모택동은 단연 우월하오. 정치에 최선은 없소. 차선을 선택하는 거지.”
[세여자2]
(174)
815 해방 당시 조선에 관한 한 루즈벨트는 스탈린보다 무지했고, 미국 정부는 아시아보다 유럽에 관심 있었고,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는 조선보다는 일본에 몰두했으며, 군정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한국엔 처음이었다. 하지는 어느 정파가 자신의 우군인지, 이 난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정치지도자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미군정이 남로당을 불법화시키는 한편 이승만, 김구 같은 극우로도 복잡한 한국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한 끝에 그 중간 지대의 여운형과 김규식을 자신의 파트너로 찍었을 때 여운형이 암살돼버렸다.
분할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단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265)
“이광수 선생의 뒤는 홍명희 부수상께서 수습하셨다 합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시작과 끝이 수미일관(首尾一貫)했다. 한일합방 날 자결한 금산 군수의 아들로 유서 깊은 양반 가문 출신인 홍명희가 지지리도 가난한 집 아들로 양친 모두 콜레라로 잃고 열한 살에 고아가 된 이광수. 일본 유학 시절 이래 이광수는 홍명희에게 친구이자 친형처럼 의지했고 번갈아가며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했고 이광수가 어마어마한 작품을 양산하는 동안 홍명희는 <임꺽정> 하나를 썼고 이광수가 친일노선에 발가벗고 나선 일제 말기를 홍명희는 은둔과 침묵으로 보냈고 서로 인생관과 정치관이 엇갈려 꽤 긴 시간을 멀찍이 바라보는 사이였지만 결국 이광수의 최후를 홍명희가 거두었다. 이광수는 잘나갈 때도 노심초사 불행해 보였고 홍명희는 풍족할 때나 궁핍할 때나 느긋한 한량이었다. 정숙은 춘원에 대해 늘 안간힘 쓰며 최선을 다하는 천재로 기억했다. 소설 쓸 때도, 친일할 때도, 그랬다.
(282)
세죽에겐 함흥에서 어린 시절부터 늘 그랬다. 사는 건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다. 겨울이면 춥고 배고프고 여름이면 덥고 배고팠다. 게다가 고향도 조국도 잃고 남편을 두 번 잃고 아들도 잃고 낯선 나라에서 유형수로 홀로 늙어가다니, 상상도 못 한 불운이 끝없이 밀려왔다. 남편이 감옥에서 고문당해 미치면서 마음자리가 한 번 깨지고 난 이후론 밑 빠진 독처럼 행복이 고이질 않았다. 사랑이 두려웠고 희망은 슬펐다. 단야와의 결혼생활도 언제 깨질지 몰라 늘 불안했고 결과는 걱정한 대로였다. 어쩌면 그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건 신혼의 훈정동 시절인지 모른다. 좁은 방에서 버글버글한 객식구들에 시달리며 끼니 걱정하고 밥해대느라 손이 마를 날 없었던 시절을 생각하자 세죽은 슬며시 웃음이 나면서 마음이 따스해졌다.
(294)
불굴의 박헌영은 평양에 온 이래 김일성의 오른편에 앉아 점점 순한 양이 되어갔다. 남자는 김일성 하나로 족했고 그 주위에서 모든 왕년의 혁혁한 혁명가들이 조금씩 거세되었다. 박헌영 역시 현실정치의 매너를 배우던 끝에 굴종에 이르는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한때 불굴의 청년혁명가였던 자의 자존심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헌영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동안 정숙은 상해에서 경성, 평양에 이르는 지난 세월이 한꺼번에 되살아오고 박헌영과 김일성 두 남자에 대한 애증이 뒤엉키면서 두통이 밀려왔다. 헌영이 칼을 뽑아들었는데 그것이 역사 논문 쓰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정숙은 그다음에 기다리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모종의 군사행동을 예비해둔 것일까. 아니, 작전이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몰랐다.
(297-298)
그녀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내 나이 오십, 귀찮은 것이 많아지는 나이로구나. 아니, 사람에 대한, 사람들 집단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버린 것 아닌가. 누가 잡든 권력의 속성은 똑같다는 생각, 어느 개인이 더 현명하든 덜 현명하든 집단이 되면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렇다면 권력을 포식한 집단이 권력에 굶주린 집단보다 낫지 않을까. 굶주린 이리떼보다 배부른 사자 떼가 낫지 않을까. 이건 가장 저급하고 비겁한 보수주의자의 사고방식인데 자신의 어느 결에 이토록 회의주의자가 되었던가, 하고 정숙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 한때 태산도 옮길 것 같았던 그 믿음이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347)
수상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욕망과 집착이 믿을 수 없을 만치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그동안 참고 참았던 분노와 환멸이 치밀어 올랐다. 지하감옥의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뒤에야 정숙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막대한 분노를 참고 견뎠는지를 깨달았다. 평양은 참을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김일성은 점점 몹쓸 인간이 돼가고 있고 근사하고 점잖은 사람은 씨가 말라가는 대신 아첨꾼과 모사꾼들만 살아남았다. 마르크스는 혁명가들이야말로 고귀하고 선량한 인간의 전형이라 했지만 진짜 그런가. 만경대 조성사업 따위는 다 뭐며 역사를 멋대로 뜯어고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불행한 조국에 생명의 불을 가져다줄 프로메테우스들이 동족의 손에 총살당하거나 시골에서 돼지나 치고 있구나. 실컷 분노하고 화를 내자 묵은 체증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349-350)
다시 이틀 동안 정숙은 혼자였다. 생각을 좀 더 깊이 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고독은 추억을 낳고 추억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인간이며 이념이며 혁명이며 정치며 그 모든 것에 회의를 낳았다. 회의가 휘젓고 지나가자 모든 투명하던 것들이 탁해졌다. 하지만 회색의 거품 아래 침몰해가는 것들 속에서 그녀는 마르크스 엥겔스와 레닌을 건져냈다. 그것이 인류의 절반을 노예 상태에서 구해낸 거 아닌가. 중국, 소련은 50년 전만 해도 황제와 차르의 사회였고 모두 마르크스를 지렛대로 봉건군주제를 뛰어넘었다. 북조선도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토지개혁도 근사했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그 사상 위에 정부를 세우는 일을 해보았으니 행운이었다. 권력이라는 것도 누려보았다. 그녀는 남자들이 그것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팔자를 고쳐줄 수 있는 힘, 싫어하는 사람을 나락에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이 권력이다. 권력은 권력자로 하여금 그것이 그대로 자신의 인격이라 믿게 만든다. 또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권력은 자아도취에 빠지게 만들고 그 마력이란 때로 목숨과 바꿀 만큼 강력하다. 그녀도 권력의 맛을 보았다. 하지만 이상한 게 묻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 그녀는 땅에 떨어져서 흙이 묻어 있는 것도, 똥이 묻어 있는 것도, 그게 권력이라면 털지도 않고 주워 먹는 남자들을 많이 보았다.
(371-372)
1848년 팸플릿에서 시작된 19세기의 이론은 20세기에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투쟁으로 전개됐지만 세기가 바뀌기 전에 종료되었다. 한반도 북쪽의 소비에트 실험은 일찍이 공산주의 트랙에서 튕겨나와 해괴한 파시즘으로 가버렸다. 21세기로 넘어와서 마르크스주의는 체제나 혁명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태도와 정책의 문제로 남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경합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르크스 이론과 레닌의 혁명은 그들을 추종한 공산주의 세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대신 반대편의 자본주의의 세계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