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lissitzky의 생애
라자르 마르코비치 리시츠키는 1890년 11월 스몰렌스크의 풀쉬녹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비테브스크에서 보낸 뒤, 스몰렌스크의 한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1909년 19세가 되자 토목과 건축을 공부하기위하여 러시아를 떠나, 담슈타트에 진학했다. 1911년 여름에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한 뒤, 이듬해까지 북이탈리아 전역으로 도보여행을 하며 이탈리아 건축과 그림에 대하여 연구한다.
전쟁이 터지자 스위스와 발칸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가기 위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모스크바에서 처음에는 펠리콥스키, 나중에는 클레인의 보조건축기사로 근무, 1917년 봄, 그는 "유대교 화집"시리즈의 첫 작품을 선보인다. 혁명을 거친 후, 비테브스크 미술학교의 학장이 된 마르크 샤갈은 1919년, 건축과의 교수로 리시츠키를 택한다. 리시츠키는 그 학교의 교수이자 절대주의 화가인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프로운"이라 일컬은 실험적 디자인을 시도한다. 이것은 그의 본격적인 비구상 표현의 효시로, 절대주의와 구성주의 요소를 통합한 것이었으며, 그것들을 "건축과 회화의 교차점"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곧 타이포그래피의 요소를 그의 작품에 도입하였고, 이 시기에 포스터와 책표지를 디자인한다. 내란 때 그가 제작한 반전포스터인 "붉은색 쐐기로 흰색을 쳐라"는 이 기간의 산물이었다. 이 작품의 뒤를 이어 1920년에 비테브스크에서 작업하여 2년 뒤 베를린에서 출판되었던 절대주의자들의 이야기인 두 사각형을 작업한다.
리시츠키와 에렌부르크는 "새로운 구상주의"로의 전념을 목적으로, 삼개국어로 발행된 정기간행물인 베쉬흐/제겐슈텐트/오브제창간호를 1922년 초에 공동 출판한다. 이러한 간행물의 출판과, 수준높은 인쇄가 가능하였던 독일에서 리시츠키는 그의 타이포그래피 발상을 발전시킬 좋은 기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끈기있고 활력 넘치는 리시츠키는 1922년에 정말 엄청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베를린의 반다이멘 갤러리에서 열렸던 러시아 예술 전시회에서 구성주의자들의 전시실 디자인에 참여하였고, 곧 또다른 전시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다. 바이마르에서 가진 구성주의자들과 다다이스트들의 회동에도 참석하여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폭넓은 저술활동과 강연을 하는 와중에도 바우하우스를 방문하여 반 데스부르크, 모흘리나기, 슈바터스 등과도 빈번히 만난다. 그는 해럴드 로브와 매튜 조셉슨이 편집한 미국 잡지 브룸과, 스킬롭스키의 동물원, 사랑과 관련없는 편지의 표지디자인을 담당하였으며, 일리야 에렌부르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여섯가지 이야기에 일러스트와 표지 디자인을 제공한다.
1927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연합 복사물 전시회의 디자인에도 참가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1928년 봄에 퀄른에서 개최되었던 국제 인쇄물 전시회인 프레사에서 대 소련관의 디자인을 주관하게 된다. 그 뒤 2년동안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드레센, 라이프치히 등지에서 세 번에 걸쳐 비중있는 러시아 전시회를 계획한다. 1930년대 초반, 리시츠키의 병세는 악화되었으며, 질병의 마력에 얽매여 열정적인 활동은 중단되고야 말았다. 그는 1941년 12월, 모스크바 근교에서 일생을 마친다.
el lissitzky의 타이포그라피
타이포그라피의 목적은 언어의 시각화와 기계화에 의한 대량생산에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상과 정보를 전달하는데 관여한다. 19세기 후반에는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일련의 예술운동에 의해서 자유로운 타이포그라피와 자유의 언어 등으로 불리어진 새로운 회화적 타이포그라피 디자인이 인쇄지면에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타이포그라피 디자이너에게 잠재된 긴장감과 시각적 생동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이 시대에 예술운동에 참여했던 학교, 단체, 개인들은 모두 효과적인 정보전달과 다양한 시도를 통해 타이포그라피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 시대의 다재다능한 아방가르드 중에서도 독보적인 인물인 엘 리시츠키는 포스터, 전시디자인, 사진디자인, 건축, 회화 등등에 창조적 표현양식과 예술관을 보여주었고 또 현대 타이포그라피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예술이 미래 사회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인식 아래 예술가 및 디자이너들은 인류에게 보다 풍요한 사회와 환경을 제공하는 새로운 사물의 세계를 건설함으로써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이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이포그라피는 명료하게 그의 이상과 예술을 전파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첫째로 타이포그라피는 혁명의 내적인 변화까지 민중에게 쉽게 전이시킬 수 있는 다이나믹한 매체였고, 둘째로 출판을 통해서 그는 그의 미적인 시도와 교육의 매체로 타이포그라피를 사용했다. 셋째로는 정보전달을 위한 방법 중에서도 심원한 함축성을 가능케하는 매체였다.
리시츠키는 정서법과 인쇄면의 레이아웃, 그리고 북 디자인을 통해 대중들의 시각적인 경험과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책은 타이포그라피적 정석으로 꾸며져 있지 않다. 그의 책이 지닌 시각적 아름다움과 힘은 그의 구성계획에서 나온다. 리시츠키는 타이포그라피의 요소들이 서로 다이나믹한 균형을 이루도록 배치했다. 또 독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명료성과 질서를 추구했다. 또 그는 흰 공간을 남겨진 부분이 아닌 디자인 대상 영역으로 이해한 최초의 디자이너였다. 그에게 있어서 여백은 삽화나 검은 활자만큼 중요한 시각적 타이포그라피 요소였다.
el lissitzky의 타이포그라피 원칙
1923년 잡지 메르츠에 리시츠키는 타이포그라피의 중요성과 그의 신념을 담은 타이포그라피의 원칙을 발표했다.
원칙1_ 인쇄된 지면은 들려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원칙2_ 개념은 언어로 전달되며 문자로 디자인된다.
타이포그라피가 문자를 적절히 운용하는 수단이라고 할 때 문자운용에는 전혀 다른 두가지의 목적이 있다. 그 첫째는 타이포그라피의 배열이 내용에 종속되고, 중요한 점은 명료성과 최적의 가독성이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첫 번째 것과 반대되는 입장으로 타이포그라피는 문자형태와 문장의 배열에 있어서의 시각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이포그라피로 말미암아 글의 내용이 더욱 뚜렷해질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약해질 수도 있다. 리시츠키는 후자의 의미에서 타이포그라피를 실현했다. 또 전통적인 타이포그라피로 형식과 내용을 강조한 반면 리시츠키는 "소리요소"도 타이포그라피 수단을 통해서 각기 다르게 형상화 되어야 한다고 한다.
원칙3_ 개념은 최대한 경제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타이포그라피는 하나의 의미전달 수단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장 효과적인 형태를 가진 명료한 전달수단이어야 한다. 특히 명료함은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시시대의 그림문자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문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리시츠키는 개념 전달에 있어서 의미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장식적인 요소나 주제에 종속되는 모양, 그리고 표현적인 색채들을 배제했다. 그는 기하학적인 형태와 순색의 명료함만이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리라 믿었다. 포스터나 책이 보다 손쉽고 저렴하게 대량 생산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형태만으로 이루어진 명확한 디자인이 용이하게 수용됐다. 즉,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민주적인 매체가 되기 위해서 타이포그라피는 시각적인 면에서나 재정적인 면에서 모두 경제적으로 디자인 되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산 세리프체, 함축적인 색채, 기하학적인 도형 등은 민중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명료하고 논리정연한 현대 타이포그라피가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주된 기법이 되었다. 이러한 원칙 아래 구성된 그의 타이포그라피 작품들은 명확성, 정확성 및 추상 형태와의 조화로 이전의 사실적 타이포그라피에 비해 윤곽이 뚜렷하여 상당한 명시성을 확보했다.
원칙4_ 타이포그라피 레이아웃은 내용의 리듬을 반영해야 한다.
원칙5_ 인쇄 제판은 새로운 시각 이론에 따라 구성되어야 한다.
엘 리시츠키는 타이포그라피를 단지 메시지를 이해시켜 주기 위한 외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써 완전한 커뮤니케이션 형태로 받아들였다. 이는 인쇄를 통하여 책의 내용이 시각적ㅇ로도 분명해질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인식은 그의 타이포그라피 작업세어 핵심적인 표현이 주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텍스트의 기능이란 전달의 목적, 강조-언어가치-그리고 내용의 논리적인 유용이었다. 엘 리시츠키는 활자의 크기나 굵기, 순서, 사진 등을 활용하여 책의 내용에 일관되게 명쾌한 타이포그라피를 표현했다.
원칙6_ 연속적인 지면구성-영화적인 책.
그는 운동이론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이상적이고도 미학적인 매체에서의 필름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엘 리시츠키는 영감을 받아 두 개의 사각형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려고 했다. 이 이야기는 책 자체가 이미 연속되는 필름의 화면들과 각 장의 내용이 그 전장으로부터 이어지는 형식으로 제작되어 있다.
리시츠키는 전시디자인에서 시각적인 내용을 준 영화식으로 전개시켜 나감으로써 혁명의 사회적 원칙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전시에 영화가 갖는 운동감을 도입한 그의 탁월한 재주는 퀼른 프레사 전시회의 소련관 디자인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적군의 언론기관이라는 제목의 전시작품에서는 영화적인 운동 효과를 창출해 내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반복되는 군인들의 행진 장면은 배경의 신문지가 주는 시각적인 효과와 결합되어 에니메이션과 흡사한 운동감을 창출해 냈다. 리시츠키는 영화를 제작하지는 않았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효과적인 운동 표현력을 타이포그라피의 전시 디자인을 비롯한 그의 작품에서 훌륭하게 응용했다.
원칙7_ 새로운 책은 새로운 작가를 필요로 한다.
현대 타이포그라피는 새로운 언어를 필요로 했다. 불분명한 윤곽 대신에 뚜렷한 윤곽을, 희미함 대신에 명료함을, 아름다움 대신에 진실을, 복잡함 대신에 단순함을, 수작업 대신에 창조적인 표현을 분명하게 역설했다. 리시츠키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예술을 위해 추상언어를 사용했으며 텍스트의 내용을 보다 다이나믹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재래의 대칭적인 리듬을 거부하고 기능적인 비대칭적 리듬을 채택하는 등의 혁신적인 방법들을 모두 수용했다. 비대칭적 디자인의 원리는 타이포그라핑 무한한 변화와 가능성을 주었으며 활자의 변화 외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도 인정하지 않는 중축구성과는 반대로 현대 생활의 다양성에 훌륭하게 대응했다. 진술한 바와 같이 그는 비쥬얼 북을 통해서 그 자신이 텍스트의 내용을 창조적으로 재현함으로서 제2의 작가가 되었다. 또한 금속활자의 제약에도 저항했다. 그는 원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서 제도용구나 오려붙이기 방법까지 사용했다. 이는 그가 사진을 이용한 인쇄시대와 복사인쇄를 위한 형태구상을 정확히 예언한 것이었다. 그 이외에도 포토그램, 포토몽타주도 그가 페이지를 새롭게 조직하는데 주요하게 쓰여졌다.
원칙8_ 수많은 책은 구시대의 것이다.(전기도서관)
오늘날 광대한 저장능력을 가진 컴퓨터의 보급에 따라 영상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그라픽 디자인은 현대 타이포그라퍼에게 필연적인 작업 영역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리시츠키의 여덟 번째 원칙은 그가 이미 지면 상황을 떠난 영역까지 타이포그라피의 범위를 확대시켜 작업했다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그는 샐고운 기계의 발명에 민감했으며 그 기계들을 통해서 항상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써의 표현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의 꾸준한 포토그램, 포토몽타주 실험 작품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새로운 기계에 관심을 갖고 기술의 숙견에 철저하게 몰두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현재는 다양한 타이포그라피 접근 방법들이 모두 허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사실은 어떤 것이 가장 적합한 디자인 접근방법이냐하는 것이지 가장 좋은 방법이 어떤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el elissitzky의 타이포그라피 원칙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엘 리시츠키는 생동감과 질서의 조화를 도모한 현대 타이포그라피의 위대한 개척자였다. 그가 내적, 외적 표현한계를 뛰어 넘어 자유롭게 타이포그라피를 운용했던 표현양식들은 아직도 유용하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리시츠키는 또 예술이 미래 사회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인식아래
첫째, 국민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 및 사회 참여의식
둘째, 목표달성을 위한 기술의 완전한 열정
셋째, 창조적 상상력
넷째, 예술사조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디자이너의 기본적 자질의 기준을 확립해 놓았다.
엘 리시츠키는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의 디자이너로 하여금 과연 시대가 요구하는 미의 본질이 무엇인지 앞으로 타이포그라피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탐구하게 한다.
el lissitzky의 prouns
리시츠키는 스스로 prouns(새로운 예술의 설정을 위한 계획 이란 뜻의 약칭)라 칭한 한 회화 양식을 개발하였다. 말레비치의 화면의 절대적 평면성과는 대조적으로 prouns는 화면(0의 깊이)뒤로 들어가기(음의깊이)도 하고 화면 앞으로 돌출하기(양의깊이)도 하는 3차원의 환영을 도입하였다. 리시츠키는 prouns를 회화와 건축간의 교차점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가 건축학적 개념들을 회화와 종합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prouns가 형태 및 공간에 대한 현대 회화의 개념들을 디자인에 적용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새로운 예술을 주장하는 프로젝트로서 리시츠키의 "브로운(prouns)"은 새로운 가치가 주어진 재료의 경제적 구성 방법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창조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브로운을 설명하고 있다.
공간 밖에서의 형태 창조 = 0
형태 밖에서의 형태 창조 = 0
형태창조 over 재료 = 덩어리(매스) over 힘(force)
위의 공식을 풀면, 형태 창조는 재료와 덩어리에 힘을 가하여 생성되며, 재료는 덩어리를 형태 창조의 에너지에 의해 재료가 될 수 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곧 공간과 형태 내에서의 형태 창조란 곧 "구성"에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위 글에서 그는 이를 순환적으로 부연하여 "재료는 구성을 통해 형태를 받고, 현대적 요구와 방법의 경제성은 서로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el lissitzky의 두 개의 사각형에 대하여
리시츠키의 <두 개의 사각형에 대하여>는 이러한 브로운의 이미지가 그대로 인쇄 지면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브로운이 의도하는 공간과 시간상의 동적인 운동을 타이포그라피에 적용하고자 러시아 미래파의 타이포그라피적 개념을 빌어왔던 것" 이었다. 1923년, 즈다네비치가 자움 회곡 <리단튜>를 펴낸 같은 해, 리시츠키는 마야꼬프스끼의 시를 상상적으로 개작한 그의 시집 <목소리를 위하여>를 디자인하여 펴내는데, 그것은 구성주의적 디자인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리시츠키는 "우리의 책(1926)"이라는 글에서, 한자와 같은 상형문자를 그 잠재력에서 국제적인 글자로 생각하고, 서구인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의미를 갖는 상징을 새길 수만 있다면, 한자나 이집트 글자를 소리없이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상형문자가 갖는 장점이 알파벳이 상실한 단점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낱말은 두가지 차원을 갖는다. 그것은 소리로서의 시간 기능과 묘사(representation)로서의 공간 기능이다. 또한 그는 이러한 견해를 낱말과 이미지의 구성은 기술적으로 같은 방식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현대 타이포그라피의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는 시인이라면 타이포그라피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재로 독자는 작가(writer)에게 그가 실재로 활자체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요구해야 하며, 작가의 생각은 우리에게 귀가 아닌 눈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표현적인 타이포그라피의 성향력은 연설자의 목소리와 몸짓과 같은 효과를 내도록 활자의 시각적 작용에 의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말레비치에게 쓴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우리가 눈을 통해서 책에서 섭취하는 사상이 반드시 눈에 지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는 눈에 흠뻑 스며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사상을 나타내는 글자들, 구두점들에 대해 꼭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덧붙이자면 글줄의 흐름에 우리의 어떤 함축된 생각이 전해지고, 또한 그것을 눈에 잘 인지될 수 있도록 요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리시츠키는 타이포그라피를 말이나 몸짓을 전사하는 기호 시스템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회화에 합당한 전달자도 아니고, 읽을 수도 없는 결과로 나타났다. 오히려 그는 타이포그라피를 시각적 등가 요소로 혹은 청각적 표현의 유비를 표현하는 도구로 생각했던 것이다. 언어는 단지 청각적 파장신호 이상의 것이며, 단순한 사상 전이의 도구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타이포그라피란 같은 목적에서 시각적 파장신호 이상인 것이다.
el lissitzky의 타이포그라피 기법 분석
기하학적 도형
칸딘스키는 현재의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기고에서 좁은 의미의 형태는 형면과 공간으로, 넓은 의미의 형태와의 관계로 구분하고 형태 연구의 시초를 삼각, 사각, 원 등의 세가지 요소로 축소하였다. 또 형태 문제를 두 개의 부분으로 구분하고 이 두 부분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 즉 색채에 대한 형태의 관계, 형태에 대한 색체의 관계는 처음부터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같은 기하학적 형태의 미적 특질을 리시츠키가 정치적인 냉ㅇ을 전달하기 위해 시각적인 이미지로서의 타이포그라피를 창조적으로 구사한 바탕에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도형이 우주적인 형태언어로서 기능할 수 있으리라는 그의 신념이 깔려 있다. 리씨츠키의 기하학적 도형에 대한 신뢰는 마치 기계를 조립하듯 기하학적 형태와 색으로 평면을 조립하여 조직적인 색채이론으로 구성된 솔직 간결한 장식성을 만들었다.
다이나믹한 비대칭과 대비
비대칭적인 디자인에서야 말로 그 법칙을 내부로부터가 아닌 외부로부터 얻고 있는 대칭적인 형식보다 우수하고 보다 자연적인 질서가 가능하다. 더욱이 비대칭적 디자인 원리는 타이포그라피에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준다. 그리고 대비의 가능성은 무수하게 많다. 대소, 명암, 무게, 수평과 수직, 각과 원, 평면과 입체, 폐쇄와 개방, 다색과 단색 등의 간단한 대립이 이미 조형상 시각 효과를 얻게 함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포토그램, 포토몽타주 기법
리시츠키는 기하학적 작품속에 사진기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언어로 고착시켰으며 사회가 대량 전달을 요구하자 포스터와 잡지 속에 이러한 기법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그는 인쇄구성과 사진의 영상들을 각 페이지와 표지, 포스터들을 조합하기 위한 재료로 채용했으며 꼴라쥬 기법을 통해 사진의 기능성을 확인한 후 보다 정교한 수법을 개발해 나갔다.
산세리프체 및 괘선
리시츠키는 산세리프체를 주로 사용하여 흑백 스케일에서 변화있는 표현을 부여했다. 그는 정보를 원하는 많은 사람을 위해 책은 관심과 흥미를 끌어야 하며 가독성이 높아야 한다고 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했던 산세리프체와 괘선은 훗날 바우하우스나 얀치홀트의 타이포그라피에서도 나타났다.
el lissitzky가 현대 타이포그라피에 미친 영향
바우하우스 타이포그라피
리시츠키의 생동감, 질서, 그밖의 사상을 강의를 통해서 전파했고, 바우하우스 북디자인을 통해서 특히 많은 기여를 했으며 만 레이의 영향을 받아 정열적으로 포토그램을 제작했고 포스터에 타이포 포토기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의 타이포그라피의 작품들에 나타난 공통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01_ 그는 커뮤니케이션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02_ 수평의 연결선 뿐만 아니라 모든 방향의 선들을 상대적 중요도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할 것을 강조했다.
03_ 사진은 필수적인 디자인 도구였다.
얀치홀트의 뉴 타이포그라피
얀치홀트는 20세기 초의 그래픽디자인 운동들이 바우하우스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뉴 타이포그라피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새로운 타이포그라피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01_ 타이포그라피에 있어 단어의 순수한 형태는 그 의미보다 앞선다.
02_ 대비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03_ 단순하고 명확한 산세리프체가 현대에 알맞다.
04_ 뉴 타이포그라피는 유행이 아니다. 뉴 타이포그라피는 읽기 쉬워야 하며 읽기 쉬워 보여야 한다.
그는 1940년대 이후에는 대칭적 구성과 고전적 세리프체를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타이포그라피 작업을 병행해 나갔으며 사고와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
스위스 국제타이포그라피 양식
스위스 타이포그라피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요소들을 수학적으로 그려진 격자 무늬 위에 비대칭적으로 구성함으로써 디자인의 시각적 통일성을 부여했다라고 믿었다. 이들 역시 현 세대의 정신을 반영하는 활자체는 산세리프체라고 믿었으며 이를 통해 명료성과 질서를 표현해 나가고 1957년 이후에는 주로 세련성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제2의 스위스 양식 - 볼프강 바인가르트의 주관적 타이포그라피
스위스 스타일로부터의 명백한 탈피는 볼프강 바인가르트에서 비롯되었다. 비인가르트는 객관주의에 저항했고 그러한 그의 관점을 널리 퍼뜨렸다. 그는 타이포그라피를 한계에 가두어 두지 말고 그래픽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이바르트는 기존의 시각적인 기법을 뒤집어 엎었다는데서 가히 그래픽 디자인 전체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한 타이포그라피 테크닉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01_ 글자 사이를 느슨하게 했다.
02_ 문자가 놓여지는 방향에 있어서 수평적인 방향성에 대한 해방을 시도했다.
03_ 한 단어나 글줄사이에서 타이포그라픽적 웨이트, 즉 활자 크기의 변화를 시도했다. 다른말로 하면 모순되는 텍스츄어를 등장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세미나 후기..
그외 많은 그림 자료들이 있었는데, 다른 친구가 자료를 갖고 있어서 개네 집 가기도 귀찮고, 다음에 올릴까 말까...
세미나 준비할 때 정말 힘들었는데 말이야. 어영부영 하다가 세미나 전날밤을 지새운 우리들... 밤 새고 졸린 눈으로 택시를 타고 학교까지 왔던 기억이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진다. 밤샘 작업후에 한강을 지나 학교로 달려갈 때의 공기맛은 잊을수가 없다. 세미나 첫타라 어설프긴 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고 보람된 시간 이었다. 발표 마지막에 슬라이드를 통해 우리의 사진들이 하나둘씩 올라갈 때.. 정말 멋있었지..
세미나 리포트 자료조사 : 김승준, 권혁승, 한경섭
세미나 관련 플레쉬 작업 : 김승준(본내용), 권혁승(리딩)
세미나 관련 리포트 편집 : 박장훈(엉아 고생했어) 경서비는 장훈이형 옆에서 자료 정리 및 오타 확인을 함. 참 밤참 준비도..
세미나 발표 : 박장훈(엄청 떨더구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