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에서 허 소장은 제5공화국의
탄생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12.12, 5.18이 '정당한 임무수행'이라는 기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95년 그를 포함한 신군부 주역들을
내란과 군사반란 혐으로 단죄한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은 일종의'정치보복'이며, 그 판결을 따라간 드라마의 시각도 역시 사실을 왜곡했다는
주장이다. "치밀한 계획이나 의도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재야의 압박이 군을 정치
전면에 나서게 만든 직접적 계기라며 화살을 외부로 돌렸다. YS.DJ가 진정한 '5공 주역'이라는 다소 독특한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야권의 압박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군이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정치권에 자연스럽게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분수령은
12.12와 5.18 사이의 중간쯤의 어느 시기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후회되는 부분도 있다고 털어놨다. 언론통폐합과 이른바
정치개혁이다. 그는"언론통폐합에는 원칙적으로 찬성 입장을 밝혔었다. 지금 생각하면 '될 수 없는 일'을 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헌법과 정당구조 등에 좀더 깊이 고민했으면 우리 정치에 혁신적인 변화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7년(대통령 임기)이후도 내다봤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인터뷰의 주요 내용.(편의상 각 인물의 존칭은 생략)
-드라마의
내용을 공개적으로 반박해 왔다. 여전히 12.12와 5.18을 거쳐 권력획득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리 계획하고 모의했냐는 것이 핵심 쟁점일텐데.
"재판이나 드라마나 미리 결론을 세워놓고 몰고 갔다. 5공은 누가 만들었나? YS.DJ, 그리고 재야다. 그들이 진정한'5공
주역'이다. 그들은 당초 12.12의 내용과 과정에는 관심도 없었다. 단지 군내부의 문제라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이후'권력을 이양하라. 그렇지
않으면 총봉기하겠다'는 최후통첩으로 압박했다. 그러는 사이 재야 투쟁이 본격화되고 경제는 곤두박질 쳤다. 선택은 그 협박을 받아들이거나 제압하는
것 둘 중 하나였다. 받아들였다면 아나키즘적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만약 그때 YS.DJ가 인내하고 양보했다면 5공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신군부가'정치권력 장악'을 의식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12.12의 결과로 전두환이 자연스럽게
군내 '파워센터'가 됐다. 그리고 야권에서 밀어부치는 상황에서'군이 나서야 하고, 그렇다면 전두환 밖에 없지 않느냐'는 인식이 정치권에서 하나,
둘 생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분수령은 12.12와 5.18의 중간쯤의 어느 시기였던 것 같다. 그것은 전두환이나 허화평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누가 나서서 '이렇게 하자'고 나선 것도 아니고 계획된 것이 아니었기게 시기를 특정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5.18무렵에는 신군부내에 권력 장악이라는 공감대가 생긴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광주는 계엄사의 관할 이었다. 정치적으로
합수부와 연계시킨 것일 뿐이다. 5.18을 거치면서 최규하도 손을 들어버렸다. 결국 상황이 군을 이끌었고 우리는 떠밀려 갔다. 애초 권력찬탈의
뚜렷한 계획과 의도가 있었다면 상식적으로 그렇게 복잡한 과정까지 거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럴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간단하게 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뒤돌아볼때'이건 좀 잘못했다' 싶은 것은 없나.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언론 통폐합이다.
내가 주도 하지는 않았지만 원칙적으로 찬성 입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될 수 없는 일을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당시 언론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기 때문일거다.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국가가 언론을 강제로 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두번째론 기존 공화당을
모델을 따라 정당을 만든 것이다. 결국 최고 권력자에 종속된 형태가 됐다. 현재 정당들도 기본적으로 그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시
헌법이나 대통령 임기문제, 권력구조를 더 깊이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때는 미처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그때 7년만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5공화국을
정리.정돈하는 과도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7년 이후도 내다봤어야 했다. 비록 인위적으로 조성된 환경이었지만 당시는 큰 저항없이
우리 정당.정치구조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호기였다."
-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 처리에서 원칙론을 제기한 것을 계기로
권력 핵심과 멀어졌다. 5공과 전 전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나서는 이유는.
"처음 전 대통령은 원칙대로 처리하자는 내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처가집 식구들이 연계되고 아마 주변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나왔을 것이다. 단순한 경제사범으로 몰고가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내가 볼때 그것은 위험한 발상이었다. 그 상황만 모면하려다 자칫 정권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었다. 한 정권을 창출했다는 것은 무한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또 권력 창출자는 언제나 그 정권의 피해자가 된다는 속성도 알고 있었다. 그때문에 아쉬움은 있었지만 서운한 감정은
없었다. 지금와서 전 대통령과 비틀어질 이유도 없다"
-당시 인사들과 가끔 만나나.
"자주 만난다. 지난주에도
이학봉. 정호용 등과 모였다. 드라마 이야기도 했는데'니 정말 노태우와 그랬나'고 물어보기도 하더라(웃음)"
-드라마에서 5공탄생
전부터 전두환.노태우를 견제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던데.
"훗날 벌어진 권력게임에 꿰 맞추는 듯한 인상이다. 직선제나 대통령 임기는 그
당시 중요한 문제였다. 심각한 논의가 불가피했고 각자 입장이 있었다. 당시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드라마에서처럼 움직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 없었다."
-드라마를 지켜보는 소감은.
"지켜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드라마라지만 실명이 거론되고
있다. 제작진은 대법원 확정 판결 따른 것이라고 말하지만 재판 과정에서도 나오지 않는 부분을 왜곡해 묘사하는 것은 어떻게 할건가. 우리로선 소송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왜곡됐다는 말인가.
"예컨데 최근 방영된 부분 중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을 삼청교육대로 보냈다는 부분이 그렇다. 강창성은 교도소에 갔지 삼청교육대로 가지 않았다.'교도소에서 삼청교육 받았다'고도 하기도
하던데 삼청교육대는 전방부대에 있었지 교도소에 있지 않았다. 또 강창성이 보안사에서 전두환을 만나 권력욕을 버리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던데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내가 비서실장이어서 너무 잘안다."
-군 과거사 위원회도 당시 상황을 조사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쪽에서 하겠다면 피할 수도 없고 피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조사해봐야 더 나올게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우리 입장에선
못했던 말 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 재판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를 그간 언론에 모두 공개한 것도
아니다."
-이른바'전사모'(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드라마 탓에 오히려 회원이
늘었다니 그게 아이러니고 재밌는 현상이다. 5공은 일부의 자유를 제한한 정권이었지만 국민 다수는 안전하게 생업에 열중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국민들은 5공 청문회까지도 그걸 못 느꼈다. 그러다 민주투사들 다 겪어보고 5공도 잊어버리고 있는데 드라마가 다시 그 시절을 회고하게 만들었다.
현실에 대한 불만도 반영됐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결국 5공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5공은 박정희 정권 말기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산업화를 마무리했다."
-전 전 대통령의 '골목성명'을 들어 5.18에 대한 더이상 드라마틱한 사과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고 들었다. 개인적으로라도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사과할 의향은 없나.
"그런 비극이 생기고 시민과 군인들이 목숨을
잃고 한 것은 안된 일이다. 그걸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후 민주화 운동 인정과 보상이 이뤄진 것에도 시비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당시 광주상황에서 정말 납득 안되는 것들이 있다. 하나만 이야기 하자. 왜 교도소 문을 열었나. 교도소 문을 여는
것은 전쟁 중 점령하거나 혁명이 일어날 때 뿐이다. 광주 교도소는 사상범만 260여명이 수용돼 있는 교도소였다. 그런 경우 국가 공권력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은 판단 착오였다. 공수는 데모진압 부대가 아니다. 데모는 1만명 모이면 1만명으로
대응해야 한다. 흥분한 군중 속에 소수의 공수를 투입하니 이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그러니 과격해졌다. 공수 투입해 위력시위를 하면 수그러들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조민근 기자<
jmi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