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33주일 2024년 11월 17일 (추수 감사 주일)
사무상 1:4-20, 히브 10:11-25, 마르 13: 1-8
영원함의 허상
교회에서는 한 해가 마감되는 시기입니다. 이때는 복음서가 전하는 종말 이야기를 듣습니다.
성전의 파괴, 가짜 그리스도, 전쟁과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등이 묘사됩니다. 종말론의 주제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전하는 종말은 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지금은 이제까지의 나(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버리고 깨트려 성찰하며 전혀 다른 삶을 다시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기입니다.
추수 감사 주일을 함께 지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묵상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함이라는 허상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1독서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늙은 여인 한나는 눈물로 지냅니다. 남편 엘카나는 그런 아내를 애틋해하며 위로합니다. 하지만 둘째 부인 브닌나의 위세는 갈수록 대단해지죠.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인물의 면면을 묵상해 봅니다. 나(우리)안에 한나의 모습(슬픔과 고통, 억울함), 브닌나의 모습(교만과 만족), 엘카나(침묵 가운데 조용히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사람들) 그리고 사제 엘리의 모습(인간적이고 부족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주님의 길로 이끄는 이들)이 모두 녹아 있음을 봅니다.
영원함이라는 허상의 첫 모티브는 ‘한나의 눈물’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오랜만에 ‘한나의 노래’라는 곡을 계속 들었습니다. 고독과 질시와 냉대 그리고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의 원통함과 서러움, 이토록 절망적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느님은 그녀에게 결국 아들을 주십니다. 사무엘은 주님께 기도로 얻었다는 의미죠. 우리 안에도 오랜 기도와 기다림 가운데 얻은 그 무엇이 있는지 묵상해 봅니다. 고통과 아픔 그로 인한 눈물을 하느님께서는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에서 영광으로 그리고 감사로 가는데 필요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갈급한 기도와 간구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멈추게 하고 감사하게 했습니다. 영원한 고통이란 없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축복으로 이끄는 통로는 바로 기도입니다. 이를 갈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진정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2독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죄에서 허덕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의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우리는 죄라는 굴레에서 이미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죄라는 틀에 자꾸 가두려는 우리의 나약함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비판하신 율법이라는 틀에 갇혀 더 깊은 본질을 보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영원한 죄는 없습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릴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율법 준수나 제물의 봉헌이 아닌, 우리 자신, 우리 전 존재를 바치는 봉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참다운 자유가 무엇이지 이미 아는 사람입니다. 죄에서부터 자유로움을 얻는 통로는 그리스도입니다.
죄에서 해방된 자유로움을 함께 누리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영원한 죄에서 벗어난 진정한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굳건한 믿음이고 친교이며 나눔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모이고,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유일한 곳입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함께 기뻐해 주고, 함께 슬퍼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냐고 묻는다면, ‘함께 간절히 기도할 제목이 있는 교회’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족이 그리고 교회가 교회 내의 단체가 함께 이루고 싶은 기도 제목이 있으면 그 공동체에는 미래가 있는 법입니다.
세 번째 오늘 복음에 나오는 화려함, 웅장함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진지함이 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가는 것만큼 허무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 오히려 더 큰 화려함을 따르는 인생에게 주님께서 강력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또한 교만과 위세를 위해 화려함과 웅장함에 몰두하는 인생에게도 경고하십니다. 우리 역시 시시때때로 이러한 유혹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자신의 본마음을 숨기는 시대를 사는 우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성찰하도록 온통 흔들어 놓고 계십니다. 강하고 험한 말로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 본질을 보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와 허상에만 집착하지 않는 성숙함과 여유로움을 함께 구하는 이 시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까지의 삶의 태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회개이고 돌아섬입니다. 성찬례는 우리를 늘 다시 시작함으로 이끄는 통로입니다. 회개와 주님께로 다시 한번 올바른 삶의 모습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이 기간, 우리는 관성에 젖은 모습을 버리고 주님께서 주신 큰 희망에 기대어 살도록 결단합니다. 종말이 전혀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는다면 종말은 두려움과 공포, 미신적이고 이기적인 자세와 관점이 아닙니다.
늘 새로움을 입고 새롭게 시작하는 기회이고 축복의 희망일 것입니다.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은 하느님의 베푸심으로 생명을 산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진실로 깨닫고 믿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고통도 영광도 아픔도 만족도 모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허상’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겸손할 줄도 그리고 감사할 줄도 알며 사는 것입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감사할 줄 알고 또 교만하지 않도록 겸손함을 가지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셨다고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갈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제목이 있다면 게으르지 않도록, 뒤로 미루지 말고 하느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참고 견딜 줄 아는 인내와 희망을 품고 살아갑시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알고, 우리 자신과 서로에게도 감사하는 귀한 공동체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