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李仲燮 (1916-1956)】 "복사꽃 위의 새 그리고 개구리 한마리"
그동안 한국인이 제일 사랑하는 작품 중에 이중섭을 상징하는 작품으로는 ‘황소’를 꼽아왔었다.
결과는 예상과는 달리 ‘황소’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인 ‘복사꽃 위의 새’가 단연 1등으로 뽑혔다. 관계자들은 세대 간의 미에 대한 감각의 차이에서 파생된 의외의 결과에 매우 놀라워했다. 이러한 결과를 듣는 순간 내심 이중섭 작품의 범주와 깊이에 대하여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과 만날 때마다 이중섭의 작품 중 가장 서정성이 뛰어나고 구성도 제일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이 앞섰다.
‘복사꽃 위의 새’는 이중섭의 작품 중에서 가장 서정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춘삼월 산벚꽃 피는 봄날의 정경 중에서 한 장면을 포착해 그렸다. 산벚꽃이든 개복숭아꽃이든 봄날에 흐드러지게 핀 꽃 한 가지에 새 한 마리가 내려앉자 꽃가지 속에 꽃몸이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린다. 새는 내려 앉아 한 쪽에 앉아 있는 참개구리 한 마리를 노려본다. 먹느냐 먹히느냐? 생사의 기로에서 서로 바라보는 품새에 긴장감이 역력하다. 두 생명체의 긴장감에 꽃을 찾았던 벌 한 마리는 깜짝 놀라 막 도망가려는찰나다. 개구리인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견디고 있어야 하는 개구리의 속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을까?
대자연의 질서 속에서 예기치않게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의 일도 이와 같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작은새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심정은 개구리와 같을 것이다. 예술가는 정서적으로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로 약자 편에 선다. 세상은 강한 자의 것이지만, 예술 세계는 약자들의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림을 보고 있는데 그림 속에서 이 작품 주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 미술계가 많은 빚을 진 이중섭이다. 일제 제국주의시기, 한국전쟁 그 세상을 겪어내고 본인이 좋아하고 살아내고 싶었던 그림의 세계를 짊어지고 일본에 가서 화풍을 갈고 닦았던 이중섭 화백, 그 속에서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이남덕(李南德)
일본 도쿄도(都) 시부야구의 한적한 주택가, 낡은 2층 연립주택의 실내는 좁고 어두웠다. 바깥세상과는 무관하게 이곳의 시계는 느리게 움직이는 듯했다. 현관을 들어서자 거실을 겸한 주방과 침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방은 4인용 식탁이 자리를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몸집이 자그마한 여인이 식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이중섭(1916~1956)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였다. 한국 이름은 이남덕(李南德),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에서 이중섭이 지어준 이름이다. 1921년생이니 95세이다.
이중섭은 역사가 된 지 오래지만 부인 이남덕은 현재를 살고 있었다. 그와 마주한 순간 과거와 현재가 겹쳐졌다. 올해는 이중섭 탄생 100년이자 사망 60주기이다. 이중섭을 기리는 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오는 6월 3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館)에서 이중섭 전시가 열린다. 이중섭의 예술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삶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남덕’은 핵심 키워드이다. 이중섭 앞에 ‘국민화가’라는 호칭을 붙이면서도 그의 뮤즈였던 부인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 이남덕은 이중섭에게 아내이자 창작의 이유였다. 이중섭은 죽음 직전까지 아내를 위해 붓을 들었고,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편지에 쏟아냈다.
‘나의 최대 최미(最美)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최애(最愛)의 사람, 오직 하나인 현처 남덕군!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소.’
‘아고리의 생명이오, 오직 하나의 기쁨인 남덕군, 어서어서 건강을 되찾아서 우리 네 가족의 아름다운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용감하게 행동하고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중섭이 보낸 편지 중 일부이다. 백수십 통의 편지마다 이런 표현이 적혀 있다.
이중섭의 둘째 아들인 이태성(67)씨. 이중섭의 작품에 숱하게 등장한 아이 그림의 실제 모델이다. 현재 태성씨가 주택 2층에 살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태성씨는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어머니의 식사를 준비한다고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두 사람은 도쿄에 있는 분카학원(문화학원) 시절 미술반 선후배로 만났다. 1935년 일본 도쿄로 건너간 이중섭은 데이코쿠미술학교(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중퇴하고 다음 해 개방적인 분위기의 분카학원(문화학원)으로 옮긴다. 그는 이중섭보다 두 해 늦은 1938년에 입학했다.
“내가 학교 2층에 있는 아틀리에에 있을 때였어요. 같은 과 친구로 나이가 많았던 리상이 나를 막 부르더니 창가로 와보라는 거예요. 창밖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리상이라고 하는데 잘생기지 않았냐’고 묻는 거예요. 마침 점심시간이라 배구를 하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잘생겼다고 둘이서 맞장구를 쳤죠. 그렇게 마음에 담고 있던 어느날 미술시간이 끝나고 수돗가에서 붓을 씻고 있었어요. 내가 먼저 씻었나? 이상이 옆에 와서 같이 씻으면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됐죠. 그 뒤로 사귀기 시작했어요.”
문화학원에서 서로 만나 사랑하게 된 두 사람, 그 후 원산, 제주, 일본을 오가며 살아온 삶의 궤적이 애절하다.
생의 한복판에서 힘 없는 자, 나라없는 자로서 나무 위에 청개구리처럼 웅크리고 살아왔던 삶이 애처롭지만 엄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