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7일 26사단 포병 여단 123기갑 대대를 찾았다. 너무 거창하게 표현하기 무엇하지만 강연을 하기 위해서---.26사단! 46년 전에 내가 근무했었던 곳이다. 위병소에서 신분증을 내밀고 출입증을 받아 달고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여기 저기서 장병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거수 경례! 우렁차게 외치는 구호에 내 기운이 절로 솟는 듯했다.
"공격!!"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쩐지 귀에 익은 듯한 느낌도 들어서일까?
대대 본부 앞에서 방문 기념 사진 촬영! 대대장 김화종 중령과 내가 가운데 나란히 서고, 나머지 대위(중대장과 과장)들이 둘러싼 형국이다. 지금 그걸 보고 있으려니 불무리 마크가 46년의 세월을 싣고 의연히 창공, 아니 궁창에 떠 있는 느낌이다. 일찍이 내 전투복에도 저게 수놓아져 있었었지---.그래 나도 외치자. 공격!
내가 사단 사령부 부관참모부에 근무할 당시, 대대장 김 중령마저도 태어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그는 이제 겨우(?) 마흔을 남긴 나이니까.

<대대 본부 앞에서 기념 촬영. 베레모에 중령 계급장을, 가슴에 지휘관 휘장을 패용한 이가 대대장 김화종 중령, 초록색 견장에 대위 계급장이 선명한 이들이 중대장, 나머지는 과장들. 유리로 된 사진틀에 넣어 준 확대된 사진에는 제목을 '26사단 123대대 초빙 강연'이라 제목을 붙였다. 너무 거창해서 낯이 붉어졌지만----.>
대대장 실에서 차 한 잔을 마셨다. 이어서 식당으로 이동(군대 식으로 이동이라 쓰자)하여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그럼 '가장'은 하나뿐이고말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너무나 배고팠었던 65년 무렵과는 너무나 다른 식단이어서일까? 꿀맛,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 대대장실에서 차 한 잔을 하고 교육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중에 한 여군 부사관을 만났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느낌이 드는 소녀 같은 맑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주번 사관인 듯 완장을 차고 있는 그는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군기가 몸에 베어 있었다. 거침없이 거수 경례, 그리고 공격!
내가 고등 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렇게 얌전했던 이웃학교 출신 김ㅇㅇ 여군에 (이등병) 갔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소스라쳐 놀랐었던가? 그런데 지금 내 앞에는 그 또래의 여군 부사관이 서 있는 것이다. 고향도 나와 가까워 의령이라 했다.
<여군 부사관은 소녀 같았다. 주번 사관인 듯 완장을 두른 모습도 이채로웠다. 미모 때문일까?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도 대단할 수밖에. 그 옆에는 여러 정의 총기가 가지런히 받침대 위에 얹혀서 끝이 하늘을 향해 있었고>

<대대장 김화종 중령이 여군 부사관에게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보내고 있다. 나는 그저 시골뜨기 할아버지이고. 그 옆은 김석주 주임원사. 주임원사는 병사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문득 공군 3875부대 양하윤 원사가 생각났다. 그는 내가 운영하던 노인 학교에 15년 이상 봉사했다. 3년 전 공군을 빛낸 인물에 뽑히기도 했고. 현재 부산 문협 회원(시인)이기도 한 그가 보고 싶다. >

너무 변한 것은 사람뿐만 아니었다. 46년 전엔 생각지도 못했었던 교회(개신교)가 대대 안에 있단다. 내가 근무하던 시절엔 사단 사령부에도 조그마한 규모의 교회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는데---.300명이 들어가는 성전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던 셈이다. 대신 성당은 없단다. 절? 기억이 안 난다. 올해 전반기에도 가기로 했으니 그때 물어보자꾸나.
어쩼든 성전 안은 넓었다. 3백명이 들아가고도 남는 공간이었다. 병사들뿐일 줄 았았는데 그게 아니다. 대대장과 앞서의 간부 장교들은 물론 김석규 주임원사를 비롯한 부사관, 이제 갓 훈련을 마친 이등병과 병장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장병(장교와 병사의 총칭/ 왜 언론은 병사들만 있는 데서 그들을 보고 장병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당일엔 그야말로 장병들이 자리를 잡았다.
선임 대위가 대표로 지휘했다. 차렷! 그리고 돌아서서 우렁차게 터뜨리는 구령,
"공격!"
만감이 몰려들었다. 세상에 46년 전의 예비역 하사가 현역 고참 대위의 경례를 받다니---.게다가 대대장도 앉아 있는 곳이 아닌가?

내가 내세운 주제는 '엄마-'였다. 나를 군대에 보내 놓고 앞이 안 보이는 눈으로 먼 하늘을 쳐다보며 제대 날짜를 기다리시던 엄마! 엄마가 계셨기에 그 어려운 군대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엄마가 좋아하시던 '해운대 엘레지'(대중가요)/ '진짜 사나이', '행군의 아침'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대중가요엔 별 반응이 없었다. 대신 가곡 몇 곡엔 술렁거리을 보였다. '고향 생각'은 제창으로까지 발전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지역 화합을 위해 전라도 노래 경상도 노래 섞어 부르자고도 했다. '목포의 눈물'과 '돌아와요 부산 항에'. 군대 시절 경상도와 전라도 전우들이 서로 티격태격 다투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지역감정은 그때부터 생겼으리라. 물론 잘못된 정치의 산물이지만---.내친김에 분단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 북한 민요 '신고산 타령'을 가르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이란 느낌이 들어서였다. >

이윽고 나는 대대장에 대한 예우를 했다. 장병들 앞에서 애창곡을 한 번 선보이라고. 머뭇거리더니 대대장은 장교들을 '불러세웠다', 도와 달란다. 스마트 폰을 들여다 보며 열창하는 그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그리고 나서 양해를 얻고 나는 이등병을 모두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대대 병력이 700여 명이라는데 이등병이 얼른 보아 30명이 넘는 것 같다. 아니 50명은 족히 됨직하다. 내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쨌거나 그들에게 노래를 시켰더니, 아뿔싸 내가 모르는 '땡벌'이다. 트로트라는데 그것과 담을 쌓고 왔다니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침묵을 지킬 수밖에. 대신 나는 내 군대 시절, 열을 지어 이동할 때의 '맨발의 청춘'이 생각났다. 신성일이 주연한 영화 주제곡이다. 여기서 감히 다시 한 번 흉내내자.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고/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하는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경숙-순옥-영희-명자(원 가사는 '그대'. 자기 애인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태양처럼 우러러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 줄 날 있으리라
<대대장과 중대장들은 노래 부르기 전 주저주저. 듣고 보니 우연만했는데 왜 그랬을까? >


<'땡벌'을 부르는 병사들. 아 당일 나는 그들을 보고 전우라 했다. 다른 백 마디보다 '전우'라는 말에 정감이 묻어나는 것 같아서다. 요즘은 연고지 배치라 해서 부산이나 광주에서 온 병사는 몇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느 중위는 부산이 고향인데 담임 선생님 이름까지 기억하더라. 김종흠. 내기 잘 아는 동료다. 포천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마칠 무렵 이마에서 땀을 훔쳐야만 했다. 성전 안이 떠워서만은 아니었음을 강조해 무엇하랴. 120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노래며 이야기를 쏟아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열려진 물입문 사이로 베레모를 쓰고 어깨에 무궁화 세 개를 단 장교가 보인다. 대령! 그 옆에는 전투복 안에 로만 칼라를 한 神父도 서 있고. 신부는 군종 장교, 나와는 두 번째 만남이다.
천천히 걸어나오는데, 대령이 거수 경례를 한다.
"공격! '선배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46년 전 근무하던 부대에 오시다니--"
어리둥절해 있는데, 곁에 있는 대대장이 소개를 한다.
"여단장님이십니다."
아, 신음 소리를 뱉을 뻔했다. 세상에 예비역 하사에게 여단장(준장이 보직되기도 한다)이 거수 경례라니. 게다가 선배라고 깍듯이 대우하고. 그 '선배'에는 아름다운 의미가 스며들어있다. 어쨌든 그의 겸손을 교훈으로 가슴에 담기로 하고, 손을 잡은 채 다시 대대장실로 직행! 다시 녹차 한 잔을 대접받고 부대를 떠났다. 사위가 그동안 서울 시내에서 볼일 보고 나서 대대본부 승용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이 나서 나는 차 안에서 계속해서 되뇌었다.
"공격 공격 공격----!"
< 왼쪽부터 김화종 중령(대대장)/ 본인/ 장교 최승호 신부(대위/ 마산 교구에서 파견)/ 여단장 김종ㅇ 대령. 대대장과 여단장의 계급장이 눈부시다. 천주교 신자는 1년에 두 번씩 판공 성사를 봐야 하는데, 나는 성탄 판공 성사를 미루고 있었다. 나오다가 다시 대대장실로 들어가 주임신부 앞에서 면담 판공 성사를 봤다. 묵주기도-영광의 신비-다섯 단. 참 홀가분했다. >

올 전반기에 한 번 더 와 달라는 대대장의 연락을 어제 받았다. '전우야 잘 자라'등 흘러간 노래와 군가, 26사단가, 요즘의 명사들이 애창하는 대중가요를 섭렵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왕이면 색소폰도 갖고 가야 할 것 같다. 병영 문화를 접하는 건 새로운 행복이다.
그렇게 병영 문화를 접함으로써 얻은 체험을 수필로 엮고 싶다. 실팍지지 못해도 그 자체는 아름다운 시도라고 착각할는지 모르지만---.다행히(?), 그리고 고맙게도 대대장이 이번 이야기를 국방일보에 싣겠단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 돌아온 탕자일지 모르지 않는가? 軍이 옛집이라 생각하고, 26사단 예하부대에 부지런히 드나들 수 있다면? 나는 다시 부르짖을 것이다.
"노병은 죽지 않고, (건방지지만) 사라지지도 않는다."
마지막 덧붙임. 가장 좋아하는(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 봤더니 병사들은 입을 모아 외친다.
"햄버거요!"
"라면은?"
그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46년 전 라면이 그렇게 좋았었는데. 덩치에 비해 체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기우일까? 라면도 햄버거도 인스턴트 식품이거늘.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