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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의 영성 생활
김보록(살레시오수도회 수련장․신부․영성신학)
1. 일반 신자의 영성 생활의 본질
일반 신자는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의 일’(부부․가정 생활, 사회․직장 생활, 경제, 정치, 과학, 예술 등)에 종사하며 산다.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는 ‘주님의 일’(신앙과 교회의 일, 기도와 영성, 선교와 봉사 활동 등)에 종사하며 산다. 성직자, 수도자가 ‘주님의 일’에 직접적이고 전적으로 종사하는 데에 비해서, 일반 신자는 ‘세상의 일’을 통해서, ‘세상의 일’ 안에 ‘주님의 일’도 행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일반 신자는 부부와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하고, 물질을 소유․향수(享受)․이용하면서 남에게 봉사하고 사회에 기여하고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
성직자, 수도자가 보다 관상적 형태로 자기 성화를 실현하고 보다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려고 하는 데에 비해서, 일반 신자는 보다 현세적이고 인간적 형태로 자기 환성을 실현하고, 보다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신자의 사명은 바로 세상 한가운데서 현세적 사물과 인간적 사랑과 자기 끗을 제대로 활용하면서 세상과 자신을 성화하는 데에 있다.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일들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보고 받아들이며 실행하고, 신앙과 기도의 삶을 삶 자기 완성과 구원에 도달하는 것 - 이것이 일반 신자의 영성 행활이다. 그리스도처럼 세상 안에 완전히 육화(肉化)하고, 예수와 함께 온전히 세상의 일부분이 되면서 세상과 자신을 성화하고 구원하는 것 - 이것이 일반 신자의 영성인 것이다.
2. 신자의 영성 생활의 어려움
일반 신자에 있어서 영성 생활의 어려움은 바로 그 영성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일반 신자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현세적 사물과 인간적 사랑과 자기 뜻을 활용하면서 세상의 일에 종사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본래 이 세상과 사물, 사랑, 인간의 뜻은 무가치하거나 허무한 것도 아니고 유해하거나 나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좋고 가치 있는 것이고, 하느님 자신의 육화와 빠스카의 신비로 인하여 속죄되고 성화된 것이다. 사물과 사랑과 뜻은 그 본질이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과 뜻에 참여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창조된 목적에 따라 제대로 이용한다면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을만큼 귀중하고 값지다.
그러나 사물과 인간의 사랑과 뜻은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지 않고 간접적으로만 그분의 지혜와 사랑과 뜻을 알려 주고 전달할 수 있다. 알려 주고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을 올바르게 활용하지 못하면 인간의 완성과 성화와 구원을 방해하는 장애가 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물과 인간의 사랑과 뜻이 감각적이고 인간적인 외관에 그칠 때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과 사랑과 뜻을 상기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욕심을 채워 죄를 범하게 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재물과 금전에 대한 기본적 소유욕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욕심은 항상 지나치게 마련이고 한도 끝도 없으며, 이 욕심 때문에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부부와 부모 자식 간의 사랑과 남녀 간의 사랑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감각적이고 감정적이 쾌락에 빠질 때 하느님의 사랑을 잊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죄까지 조장할 계기가 된다. 또한 자기 뜻과 계획을 완고히 고집할 때도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어길 수 있으며, 세상의 일에 너무 바쁘거나 마음이 사로잡힌 나머지 하느님의 일을 소훌이 하게 될 수도 있다.
사물과 인간의 사랑과 뜻은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과 뜻을 그대로 보여 주지않고, 불투명하게 반양하거나 부분적으로만 반사하거나 전혀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과 인간의 사랑과 뜻을 ‘전부’로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거기에서 어려움이 다르는 것이다. 이것들이 일시적이고 언젠가 사라질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여 집착하는 것이 인간의 약점인 것이다.
올바른 소유욕으로 일하는 동시에 서로 나누는 자세, 소유와 베품 간의 조화, 오히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사도 20, 35)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올바른 사랑과 잘못된 사랑을 구분하고, 건전한 애정과 불건전한 애정을 가려내는 것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일치시키는 어려움과 부부, 부모 자식 간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조화시키는 어려움을 우리는 매일 겪고 있다. 또한 하느님의 뜻과 자기의 뜻을 통합하는 일, 즉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자기 뜻으로 받아들여 살려면 오랫동안 자기 포기와 극기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기도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생활 전체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그러면서도 기도와 신앙에 너무 치우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즐기고 세상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생활과 기도, 세상의 일과 신앙의 일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랑과 하느님 사랑, 인간적 사랑과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겠는가? 일반 신자의 영성 생활의 고민과 문제는 바로 이 물음에 압축된다.
3. 일반 신자의 영성 행활을 위한 구체적 방법
위에 서술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올바르고 보람찬 영성 생활을 하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구체적 방법을 몇 가지 조목별로 나열해 보겠다.
1) 사물의 감각적 외관을 꿰뚫어 그 참모습을 본다.
먼저 필요한 것은 신앙의 문으로 사물의 감각적, 현세적 외관을 꿰뚫어 모든 사물을 하느님 사랑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피조물로서 평가하고, 그분을 섬기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감각적 외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 안에 진실이 아닌 허위를 억지로 보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감각적으로는 사물의 외관을 보고 받아들이면서 사물을 평가하고 취급하는 자기 마음과 자세를 바꾸어 신앙과 사랑과 영으로 채우는 것이다. 사물의 진실은 감각적 현실적 외관뿐만 아니라, 훨씬 그 이상으로 하느님의 존재화 생명에 참여하고, 그분의 사랑과 자기 양도(증여)를 표현하며 또한 그분을 찬양하고 섬기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물의 ‘참모습’을 보는 ‘영적 시각’이 필요하고, 그렇게 평가하는 ‘신앙적 가치관’이 요구되며, 또한 사물을 그 ‘진상’대로 사용하는 ‘초자연적 자세’가 요망된다.
“공중의 저 새들을 보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거나 하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십니다.……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시오. ……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십니다.”(마태 6, 26-30). 예수의 눈에는, 모든 사물이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는 덕분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이 ‘영적 시각’과 ‘신앙적 가치관’과 ‘초자연적 자세’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각과 물질과 현세적 일에 기울어져 있으므로, 꾸준한 노력으로 정신과 내성과 신앙에로 들어 올려야 한다. 항상 사물 안에서 영성을 찾아 감각을 사용하면서도 내성으로 돌아가고, 물질을 영적 자세로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결국, 사물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계기로 삼느냐, 죄 짓는 계기로 삼느냐는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고 사물의 참모습을 보느냐, 감각적 외관만을 보느냐는 우리의 내적 자세에 달려 있는 것이다.
2) 사건 안에 하느님의 섭리를 본다
사물뿐만 아니라, 세상의 움직임과 사건들 안에서도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보아야 한다. 세상은 감각적, 인간적 차원으로는 과학, 정치, 경제 등 인간의 힘과 자유 의지로 인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이 보이지만, 실은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인간의 힘과 자유로운 행동을 허락하시고 이용하시면서 인간 사회와 세상을 당신이 계획하신 완성에로 확실히 인도하시는 것이다. 더 놀랍도록 위대하신 것은 인간의 죄와 세상의 여러 형태의 악에서까지 보다 큰 선을 끌어내시어,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완성에 기여하게 하시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하느님은 세상의 움직임과 역사의 흐름과 인간의 생활을 ‘절대적으로’ 주관하시고 운영하신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절대성의 신비와 참 위대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과 죄악까지 이용하시어 그것을 세상의 완성과 인간의 구원이라, 당신의 계획의 완성에 기여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감각적으로 볼 수 없고, 과학적으로 확인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으며, 오직 신앙의 눈과 마음으로만 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비적이고 절대적이고 또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인간적 사고로서는 사랑과 반대가 된다고 생각되는 ‘고통, 아픔, 고생, 희생’ 등의 사실 안에서 드러나고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하느님의 사랑도 역시 그분의 섭리와 절대성같이 신앙으로 보는 눈을 가지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이 고통을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사랑하시고 속죄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고통을 받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 진실은 주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고 자신 안에 체험한 사람만이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다. 지난 2000년간 얼마나 많은 성인 성녀들과 순교자들이 이진실을 깨닫고 체험했을 것인가!
하느님의 사랑의 절대성도 신앙의 마음으로 확고히 믿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나를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사는 사람이어야만 견고하고 보람차고 복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물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
사물은 하느님의 현존과 생명과 사랑과 힘으로 가득차 있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 사물이 존재하고, 생물이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의미와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늘 사물로 둘러싸여 사는 우리도 사물과 함께 사물을 사용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그분을 찬양하고자 한다.
물고기가 바닷물 속에서 물을 마셔야 살고 물 밖으로 뛰쳐 나가면 당장 죽듯이, 우리도 하느님이란 커다란 바닷물 속에서 하느님을 들이마시는 덕분에 산다. 이 바닷물에서 뛰쳐 나간다면 그 순간에 숨이 막혀 죽고 만다. 하느님은 나의 앞에, 뒤에, 옆에, 위에, 밑에 현존하시고, 나의 몸과 마음속 깊숙히 스며 침투하시고, 나를 전적으로 장악하신다. 나는 하느님으로 온전히 둘러싸여 살아있고 하느님 안에 존재하며 하느님을 숨쉬면서 생활한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 17, 28).
하느님만큼 우리에게 가까우신 분은 없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게 가까우시다. 따라서 하느님만큼 친교하기 쉬운 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마음과 뜻만 가지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하면서도 즉시 친교할 수 있고 얼마든지 친밀하게 일치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수련하는 가운데 점차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물 안에서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사실을 늘 보는 ‘영적 시각’을 가지고 사물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실을 실감하는 ‘영적 감각’을 지녀야 한다. 또한 사물과 함께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신앙적 자세’를 길러야 한다. 자기는 하느님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침투되어, 하느님을 숨쉬면서 산다는 사실을 자주 상기하고 자각하고 그 의식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4) 생활 속에서 기도를 계속한다.
생활 속에서 기도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옳고 선한 생활을 하고 사랑과 봉사의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생활의 모든 시간과 분야에 기도의 ‘의식적 행위’가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기도의 ‘의식적 행위’란 과연 무엇인가?
기도는 “하느님과의 마음의 대화” 또는 “주님과의 내면적 친교”라고 하는데, 이 대화와 친교는 어느 정도 ‘의식적’이어야 ‘기도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심정과 감정을 여러 모양으로 표명한다. 사랑, 찬양, 감사, 예배, 봉헌, 복종, 믿음, 희망, 신뢰, 의탁, 통회 그리고 여러 은총의 간구 등등. 이와 같은 심정과 감정이 어는 정도 의식적으로 드러나야 비로소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이 활동을 당신께 대한 사랑으로 바치겠습니다.” - 생활 속에 이와 같은 의식을 가지는 것도 여러 ‘단계’와 ‘정도’의 차이가 있고, 여러 ‘농도’와 ‘강도’의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아주 생생하고 선명하고 열렬하고 능동적인 의식부터 빈약하고 막연하고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의식까지 여러 의식들을 가질 수 있다. 이 차이는 개개인마다 다르고 또 각 개인에게도 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어느 때는 열렬히 활기 있게 사랑, 찬양, 감사 등의 심정을 표명하는가 하면, 다른 때는 막연하고 희박하게 표명하고, 또 어느 때는 아무 의식도 하지 않고 그냥 살아기가도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 늘 주님께 대한 사랑, 찬양, 감사 등의 심정을 보다 생생하고 열렬한 모양으로 표명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해서 늘 의식적 기도의 행위를 계속하여 사는가-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근본적 과제가 되는 것이다.
생활 속에 늘 주님께 여러 심정을 표명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고, 또 때화 상황에 따라 여러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① 어떤 기도문이나 화살 기도를 계속 반복하여 외운다.
② 자유 기도로서, 주님과 자유로운 형태로 대화하듯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며 계속 기도한다.
③ 기도문을 외우거나 말하는 것도 없이 순전히 내면으로만 여러 심정들을 주님께 표명한다.
④ 주님께서 여러 사물 안에 현존하심을 의식하고 느끼며 산다. (자기 안에, 타인 안에, 여러 피조물 안에, 사건 안에, 여러 행위와 활동 안에 등등.)
⑤ 늘 하느님 안에, 하느님께 의지하여, 하느님을 숨쉬며 산다는 의식을 계속 유지한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 듬북 잠겨 존재하고 산다는 전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의식을 가지며 산다.
5) 기도와 활동을 하나로 융화시킨다
자기 인격과 생활 안에 기도와 활동을 하나로 융화시키는 것은 아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특히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기도만 잘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고, 또 인간적 활동만 잘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다. 먼저 기도와 활동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화해, 화목시키고, 그 다음에 기도와 활동이 상호 분리되고 완전히 다른 행위, 다른 체험이 되어 있는 상황을 통합시켜 단 하나의 행위, 단 하나의 체험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은, 활동이 기도를 흡수할 수 있도록 활동 자체를 옳고 선하고 정성된 자세로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활동의 내용과 활동하는 내적 자세와 그 동기와 목적을 옳고 선하고 정성되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하는 것이다. 활동 자체가 나쁘거나 활동하는 내적 자세가 불순하거나 어떤 좋지 못한 동기와 목적으로 활동한다면, 그 활동은 기도를 흡수하지 못한다. 활동 자체에 마음이 사로잡히거나 불안, 두려움, 흥분 등의 심리 상태로나 혹은 무성의, 형식주의, 무질서 등의 자세로 활동할 경우에도 그 활동은 기도를 흡수하기 어렵다. 한편, 악의와 사리 사욕을 버린 활동, 순수한 헌신과 사랑의 활동은 기도를 쉽게 흡수하고, 활동하면서 기도하는 ‘활동 속의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침착하고 질서와 정성이 있는 활동도 비교적 기도를 잘 흡수할 수 있다.
기도를 보다 쉽게 흡수하는 활동의 ‘순수화’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악의와 욕심과 교만으로 인한 활동’에서 ‘선의와 헌신과 겸손으로 인한 활동’에로, ‘마음이 없는 활동’에서 ‘사랑의 활동’에로, ‘형식적 활동’에서 ‘정성 담은 활동’에로, ‘외면적, 자기 중심적 활동’에서 ‘내면적 자기 봉헌의 활동’에로, 그리고 ‘자기 멋대로의 활동’에서 ‘하느님의 뜻대로의 활동’에로 단계적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이것이 ‘활동의 순수화’이며, 활동이 순수화되면 순수화될수록 기도를 흡수하게 되고, 활동 속에서 기도하게 된다. 이리하여 기도와 활동이 일치된 하나의 행위가 되고, 그렇게 일치되었을 때 그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의 삶은 ‘기도의 삶’이 되는 것이다.
6)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산다
그리스도교적 영성 생활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일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고 봉헌하여 사는 사람이다.
먼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일의 ‘목적’, ‘동기’, ‘이유’, ‘중개’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고 바친다. 매일의 일상적 일도 특별한 일도, 활동도 고생도 고통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행하고 바치고 받아들인다. 인간적으로 어려운 일도,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하고 참고, 사랑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봉사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의 ‘기준’이 되신다. 우리의 인생관, 가치관의 기준이 되시므로,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여 모든 것을 평가하고,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동반자’가 되신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운 친구 또는 애인으로 모시고, 그분과 애정을 나누어 모든 것을 함께하여 살아간다. 특히 수난하신 그리스도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부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을 나눈다.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마치 그리스도를 감각적 육안으로 보듯이, 항상 그분을 가까이 모시고 그분의 손을 잡아 그분께 의지하여 사는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동일화’ 또는 ‘일체화’를 뜻하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1 고린 12, 27)이요, “그리스도의 지체”(1 고린 6, 15)이며, “또 하나의 그리스도”이므로. 그리스도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 “예수처럼 생각하고, 예수처럼 말하고, 예수처럼 행동하고, 예수처럼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현실은 이 “그리스도처럼” 또는 “마치 내가 그리스도인 양”의 표현 이상으로 실제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따라서“만약 내가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 것인가?” 하고 자문하기보다 “나는 실제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이니까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따져야 할 것이다.
“예수의 지혜”(1 고린 1, 30)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예수의 사랑”(2 고린 5, 14)으로 사랑하고, 예수의 감정으로 느끼고, 예수의 눈으로 보고, 예수의 입으로 말하고, 예수의 손으로 만지고 일한다. 이리하여 “예수의 삶”(갈라 2, 20)을 살게 된다.
결국 그리스도적 영성 생활의 극치는 다음 성서 말씀을 그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 7-8).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그 밖에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 고린 10, 31).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 21).
이와 같이 사는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복되고 보람찬 영성의 삶을 살 것이다.
* 이 글은 도화동 천주교회 김은주 엘리사벳 자매님의 도움으로 입력되었습니다.
<사목, 1991년 12월호, pp.37-44 / 인천교구 시노드 홈페이지에서>
출처 :가톨릭 영성의 향기 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