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任那人 蘇那曷叱知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습니다"고 청하였다. 아마 선황의 대에 來朝하여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일 게다. 그래서 蘇那曷叱知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즉 赤絹100필을 가지고 가게하여 任那의 왕에게 주었다. 그러나 新羅人이 길을 막고 그 것을 탈취하여 버렸다. 이 兩國의 증오심은 이때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다.
一에 이르길
<중간 생략>
천황은 都怒我阿羅斯等에게 묻기를 "너는 나라에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했다. 阿羅斯等은 대답하여 "그렇게 희망하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천황은 阿羅斯等에게 詔하여 "그대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으면 선황을 만나 뵙고 모시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의 본국명을 고쳐 御間城 천황의 이름을 追負하여 그대로 너희 나라 이름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에 赤織絹을 阿羅斯等에 주어 본국에 되돌려 보냈다. 고로 그 나라를 호칭하여 彌摩那國이라 일컫는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하생략>
/////일본서기 인용끝
생략된 부분의 내용을 밑에 있는 고대사산님의 글에서 인용합니다.
인용 시작/////
이설1에서 숭신대에 額有角人이 越國의 사반포에 정박하여 그곳을 角鹿이라 한. 意富加羅國의 왕자 都怒我阿羅斯等(=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 함. 혈문에 도착했을 때 伊都都比古가 자신이 그곳 왕이라면서 다른 데로 가지 말라 했으나 사람을 보니 참왕이 아닌 것 같아 일본
국의 성왕을 찾아왔다고 함. 섬들을 거쳐 북해를 돌아 出雲國을 거쳐왔음(* 각록에 도착한 상황).
인용 끝/////
///
都怒我阿羅斯等은 意富加羅國의 왕자인데 돌아가면서 수인천황에게 彌摩那國이라는 국호를 얻어 가지고 돌아갑니다. 수인이 都怒我阿羅斯等에게 국호를 바꾸라고 했고(?), 그런 연유로 意富加羅國은 彌摩那國이라 불리어 졌다는 내용입니다.
意富加羅國과 彌摩那國은 위의 인용문에서 같은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改汝本國名追負御間城天皇御名便爲汝國名]이라하여 너의 본래 나라이름을 고치어 彌摩那國이라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追負御間城天皇御名]이라하여 追負을 "~을 따서(~를 인용하여)"로 번역하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일본서기에도 {{御間城[미마기]天皇의 이름을 따서[追負] 너희 나라의 ....}}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追負에 인용하다는 뜻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
/// 사이의 바로 위의 글은 김인배 문배님의 "임나신론"에 있는 글의 일부를 요약하였습니다.
御名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 보면
어ː명(御名)[명사] 국서(國書)에 쓰는 임금의 이름. 어휘(御諱).
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御間城[미마기]天皇의 이름을 따서"라는 오독과 오역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한자의 뜻 그대로 [믿고 의지하여] 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위 일본서기의 기사와 관련 있는 것을 김성호님의 "씨성으로....."에 있는 관련 내용을 찾아 보았습니다.
책 283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한편 11대 수인은 귀국하는 임나왕자 소나에게 이르기를 "작고한 숭신텐노는 일명 미마키텐노이므로, 귀국하거든 의부가라를 미마나로 바꾸라"고 하매, 소나는 귀국하여 의부가라를 미마나로 개정하였다고 한다 미마나가 바로 임나의 일본측 발음이다.
그러나 숭신의 별명이 미마키텐노이기 때문에 의부가라를 미마나로 바꾸라고 했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마키텐노'란 호칭은 본인이 죽은 후에 그의 출생지나 선주지 또는 공적 등을 고려하여 부여된 추후로서 결코 그 역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미마키텐노에서 미마나(임나)란 지명이 생긴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숭신이 미마나(임나) 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그의 고향 지명에 따라 '미마키텐노'란 추호가 붙여진 것이다.( livemiri주 : 김성호님은 신공을 기장벌의 여인으로 해석하여 기장을 지금의 부산 기장으로 비정하였지요. [김성호님은 그의 저서 "비류백제....."에서 아달라이사금에게 한 대 맞고(죽을 정도는 아니고...) 도망을 한 곳이 기장.... 그 곳에서 배타고 간 곳이 일본d라고 했 던 것 같습니다. ] 일본서기를 보면 氣長足姬尊이라고 나오죠. ) 결국 숭신은 미마키인 즉 임라인이었으며, 그가 현해탄을 건너 개척한 북큐슈의 분국은 임나의 분국이었다. (livemiri주 : 김성호님은 그의 저서 "비류백제....."에서 일본서기의 숭신이하 중애까지를 비류백제의 담로국으로 기술하였는데 여기서는 임나의 분국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숭신은 부산 어디에서 왕질을 했는 모양입니다. )
제 글이 다음에 이어 질 것입니다.
* 집주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07-26 08:45)
고대사산 (2002-11-30 14:51:21)
1. [改汝本國名追負御間城天皇御名便爲汝國名]
===> 追는 逐, 隨의 뜻이 있어 '따르다'고 할 수 있고 負는 (짐, 빚 등을) '지다', '안다[부담]', '믿다' 정도인데 '인용'이라기보다는 이름지을 때 흔히 다른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것을 '따다' 라고 하는데 '따서 붙인다'는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옮겨 보면 [너희본국명을 바꾸되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서(따라서) 마땅히[便] 너희국명으로 삼아라]라는 정도의 명령문으로 생각됩니다.
<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2/20p>에 보면 [너희본국명을 고쳐, 어간성천황의 어명을 도[負]리떼 스나와[便]찌 너희국명으로 하라] 라고 되어 있는데 도[負]리떼> 도[取]루의 뜻으로 쓴 것 같네요. 동사활용형태는 아니지만. '스나와[卽]찌'는 한자는 다르지만 고어에 '곧', '당장'이라는 뜻이 있네요. 御名이란 그냥 왕의 이름이니까 높인다는 의미지요.
2. < 그러나 숭신의 별명이 미마키텐노이기 때문에 의부가라를 미마나로 바꾸라고 했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마키텐노'란 호칭은 본인이 죽은 후에 그의 출생지나 선주지 또는 공적 등을 고려하여 부여된 추후로서 결코 그 역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김성호>
===> 위의 내용이 이상한 것이 이 시점은 숭신이 죽고 수인 2년 시세조이므로 시호가 이미 지어져 있는 상태라고 보아야지요. 이설1 문장에도 수인을 섬긴 지 3년 되었다고 나오지요. 오히려 서기 원문이 이상한 것은 숭신 65년조에 이미 임나인이라고 부르고 있고 수인 2년 시세조에도 임나인이라 부르고 있는데 수인을 섬긴 지 3년째에 비로소 이름을 바꾸라 했다는 거지요. 이설에서 국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그 후 소급해서 기록했다고 생각하면 문제될 것 없을 듯합니다.
3. 상황을 보면 1) 숭신 65년조에 소나갈질지 첫 등장 조공 2) 다시 숭신 68년 "섬들을 거쳐 북해를 돌아 각록에 도착했을 때 숭신 (68년 12월 5일) 붕. 그래서 머무르며 수인을 3년 섬김.
* 그때 당시 12월도 햇수로 1년을 치면 수인 2년 시세조가 이설에서 3년 섬겼다는 말이 맞을 듯합니다. 다만 여기서 한 번 조공을 와본 인물이 이설에서 길을 잃었다는 둥 하는 것이 앞뒤 안 맞는 얘기이고 이것이 앞의 伊都都比古와 관련하여 일면 수인과는 전혀 다른 세력이 열도 입구[穴門/長門]에 버티고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요. 제 개인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이도도비고도--> 이도쯔히꼬>이도노히꼬[伊覩彦]로 보면 성씨록의 응신계열로 나오므로 그냥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4. ( livemiri주 : 김성호님은 신공을 기장벌의 여인으로 해석하여 기장을 지금의 부산 기장으로 비정하였지요. [김성호님은 그의 저서 "비류백제....."에서 아달라이사금에게 한 대 맞고(죽을 정도는 아니고...) 도망을 한 곳이 기장.... 그 곳에서 배타고 간 곳이 일본d라고 했 던 것 같습니다. ] 일본서기를 보면 氣長足姬尊이라고 나오죠. ) 결국 숭신은 미마키인 즉 임라인이었으며, 그가 현해탄을 건너 개척한 북큐슈의 분국은 임나의 분국이었다. (livemiri주 : 김성호님은 그의 저서 "비류백제....."에서 일본서기의 숭신이하 중애까지를 비류백제의 담로국으로 기술하였는데 여기서는 임나의 분국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숭신은 부산 어디에서 왕질을 했는 모양입니다. )
===> 그 책 본 적 있습니다. 논리의 비약이 심하지요. 다른 것 다 제쳐놓고 활동공간 즉 지명을 잘못 파악한 겁니다. 오끼나가[氣長]는 열도의 가야계 지명으로서 서기에서 가야계임을 알려주는 키워드로 쓰이고 있는 겁니다. 경남 양산의 기장과는 전혀 무관한 겁니다. 비근한 예로 천황 중에 같은 이름이 붙은 경우가 또 있습니다. 기장족희존이 기장벌출신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또 다른 사례도 동시에 기장벌 출신임을 증명해야 할 겁니다. 서명천황의 화풍시호가 息長足日廣額천황인데 오끼나가[息長]로 읽고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서명천황도 경남 기장출신일까요? 이 인물은 백제 동성왕입니다. 물론 가야계지요. 김씨입니다.
그러면 서기를 지은 인물들이 경남 기장을 숨기고 열도에 갖다 붙였을까요? 근강국도 가야인이 개척한 가야계 지명입니다. 오오미[近江]란 이름도 近江>큰江>大水>오오미즈>오오미(즈) 이렇게 변한 겁니다. 지금은 '오오미'로 읽고 있지만 고대엔 그냥 '큰강'으로 읽었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 이두문자 近이 그대로 남아있지요. 수인기 3년 3월조에 천일창이 도착했을 때 하리마[播磨] 육속읍부터 죽 지명들이 나오는데 그게 모두 가야인들이 개척한 가야계 지명들입니다. 그것도 극히 일부지요.
5. 가장 큰 문제는 일본서기에서 신라와 분쟁이 엄청 많은 것으로 나와있는데 그 분쟁의 시발을 여기 붉은 비단 100필 탈취에 있다고 설정한 겁니다. 워낙 현재의 각종 설들과 거리가 멀어 가슴에 와닿지 않을런지는 몰라도 제가 연구한 바로는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꾸민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임나=신라=금관가야=아라가야=대가야(고령의 대가야는 판단유보)입니다. 소나갈질지=아라사등=우사기아리질지간기=소잔명존(신대기 상8단, 淸)=磐井=眞井(신대기 천안하의 서약조, 사기에는 眞淨)=언파불합존=신공 62년 己本旱岐=기능말다간기 등등 전부 동일인물입니다. 2년조에는 이 인물을 임나인(대가라왕자, 성씨록에는 임나왕 등등)으로 설정하고 신라와 원수졌다 해놓고 3년조에서는 그 아들 천일창은 신라왕자로 설정했다는 것이 인위적으로 꾸몄다는 겁니다. 그 이후 허구헌날 신라와는 원수인 것처럼 기술한 겁니다. 사실은 알고 보면 가야를 임나와 신라로 이름을 분리하여 다른 나라처럼 기술한 겁니다. 백제가 망하고 열도로 건너간 후에 반도에는 신라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가 그대로 있으니 마치 반도의 경주신라로 착각하기 좋게 되어있지요.
"너희본국명을 고쳐, 오[追]히떼 어간성천황의 어명을 도[負]리떼 스나와[便]찌 너희국명으로 하라"===> 뜻은 '따라', '좇아'라고 할 수 있는데 어찌 보면 負와 중복되는 의미 같습니다. 현대어로는 발음도 같지요. '오[追]우', '오[負]우'
<일본서기/암파문고/2000년/권2/21p/주6.7>에 보면
['미마나'라는 이름은 '미마끼(이리비꼬)'라는 이름에서 나왔다는 설. 이 설화는 원인과 결과가 逆으로서 미마나라는 이름으로부터 천황의 이름(미마끼이리비꼬)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성씨록 未定雜姓 右京의 三間名公의 조에는 彌麻奈로 적고 있다]
이어서 <권1/417p/보주5-7>을 보면 임나와 관련된 기록들을 열거하고 도표까지 그려가며 임나의 유래라든가 그 위상이라든가 그들 나름대로의 임나에 대한 시각이 반영된 내용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말미에 보면
[임나를 미마나(彌摩那, 彌麻奈, 三間名, 御間名)로 읽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原名은 단정할 수 없으나 任那라는 漢字가 한국인이 붙인, 어떤 지명을 나타내기 위해 充當된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렇다면 미마나는 原名의 '일본사투리'로서 원명에 비교적 가까운 것일 지도 모른다. 수인 2년조의 分注에 의하면 어간성천황시에 처음으로 조공했으므로 천황의 어명(어간성입언명)을 따서 '미마나국'으로 했다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逆일 지도 모른다]라고 일인들도 보고 있군요.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위의 한자 말고도 분류가 안된 不載姓氏 중에 美麻那라는 이름도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