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생애
* 다음 백과사전의 방응모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 노무현 정권하에서 만든 조선일보를 친일로 매도하는 만화자료가 있는데, 힘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역사를 자기의 것으로 조작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한 확인 자료로 실어본다.
생애 초기
방응모는 1883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동률면 소암동에서 농부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빈곤한 가정환경으로 16세 때까지 서당에 드나들며 한학을 익히다가 21세 무렵 잠시 서당 훈장을 지내기도 했다.
1911년 신식 학교에서 일시적으로 교편을 잡았으나 그만두었다. 11년 정주읍내 변호사 사무소에 취직, 1914년까지 대서업에 종사했다. 1915년 자신의 집을 이용해 여관업을 시작했다.
언론 활동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여 분국장에 취임했다.
1923년 동아일보 정주군 분국이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 지국장으로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였고,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한 여자교육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조만식·송진우·안재홍·김성수 등의 주도로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인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결성되자, 방응모는 민립대학 기성회에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정주군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지부가 설립되자 기성회 정주지부 상무위원을 맡았다.
이후 광산업에 뛰어들어 1925년 교동광업소를 인수, 경영하며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뒤 조선일보(朝鮮日報)에 입사하여,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거쳐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교동광업소를 운영하며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1933년 7월 8대 사주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9대 조선일보 사주로 취임, 활동했다.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
언론, 사업 활동
첫 번째 부인 승계도와 두 번째 부인 이인숙 사이에서 자녀가 없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 방재윤은 방우영, 방일영 형제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는 1940년 방응모보다 먼저 요절하였다.
1930년 세 번째 부인으로 배영옥과 결혼하였으나,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년 광산을 정리하고 언론사업을 비롯, 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2]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또한 만해가 일제의 배급을 거부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만해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방응모는 만해가 병석에 누운 1944년에는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3]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 한용운·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4]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는 한편, 출판부를 신설해 〈조광〉(1935. 10)·〈여성〉(1936. 6)·〈소년〉(1937. 4) 등의 월간 잡지를 차례로 창간했으며[5], 1936년 동방문화학원(뒤에 숭문중학교·고등학교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9월에는 〈조선일보〉의 조간 1회, 석간 2회의 1일 3회 발행을 시작하기도 했다.[5]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4][6] 1933년 이심회(以心會:후에 序中會, 방응모장학회 등으로 명칭이 바뀜)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국내 대학생과 해외유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하기도 했으며, 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學院:지금의 숭문중·고등학교 전신)의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7] 또한 자신의 막대한 재원을 들여 1936년부터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위 조림사업을 벌였으며, 그 전 해인 1935년부터는 경기도 화성시수원군 팔탄면 일대에서 만 2년간에 걸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8]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창립에 창립발기인 으로 참가했고, 조선춘추회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2월 조선인의 군사동원을 위한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7월에 영국 타도를 주장하며 전국 차원에서 적극적 배영운동을 벌이기 위해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상담역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3월 잡지 《조광》의 발행인으로 취임했다.
1943년 화신백화점 점원 출신인 노호용과 결혼하였다. 1944년 첫 아들 방재선을 얻었다. 그가 바로 현재 조선일보 사주 일가와 재산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방재선이다. 이후에도 방응모는 노호용과의 사이에서 방재효, 방재규 등 두 아들을 출산하였다. 1944년 9월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후 조선항공공업 감사에 피선되었다.
광복 이후 언론 및 정치활동
광복 직후 =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8월 말과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9월 초 안재홍 등이 좌경화되는 건준체제에 반발하여 건준을 탈퇴하자 방응모 역시 건준을 탈퇴하였다.
이후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거쳐 11월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12월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재정적 후견인으로 활동했다. 그뒤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10월 이승만(李承晩) 등의 주도로 독립촉성중앙회가 결성되자 독촉에 가입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9]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11]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9월 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에 선출되었다.
김구와의 결별과 만년
이후 한국독립당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나, 1948년 1월 이후 김구의 노선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갔면서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12]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도 직접 나서서 <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12]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한국독립당 공천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어 끌려가던 중 1950년 8월경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13][14] 남한에서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 기간만료로 실종처리 되었다.
사후
친일 행적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친일 행위를 한 기록과 활동이 있다. 1933년에는 고사기관총 구입비용 1600원을 군에 헌납하였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37년에는 경성방송국 제2방송에 출연하여 일제가 중국의 베일을 절멸케하여 극동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강연을 하였다.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6월에는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다. [15]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
– 원산에서의 순회 강연[16]
논란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부 보수세력으로부터 논란이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조선일보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세력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17][18] 또한 한국정토학회 고문이자 서울 정토사 주지였던 박설산(1918~2007)이 학도병에 끌려가기 직전인 1943년 12월 28일 밤 서울역에서 스스로 왼발을 선로에 올려 발가락을 절단해 징집을 기피하자 방응모는 만해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설산을 걱정하면서 퇴원할 때 돈을 전달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19]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