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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8월 1일 오늘의 역사<말씀> : CCCC 국민소통운동본부
평택 소통 김 평 탁
소통 ! 여러분의 고견과 댓글로 국민 소통 운동에 적극 동참을 환영합니다
8월
AUGUST
8월.
August는 로마의‘ Augustus
황제의 달‘이라는 데서 생긴 이
름.
‘ Augustus’ 황제에게는 행운의
달로 이집트를 함락시킨 것도,
내란을 평정한 것도 바로 8월의
일이었다. 8월은 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산과 바다가유혹
의 손길을 뻗치는 달.
8월 24일 날씨가 좋으면 풍년
이 든다는 서양 속담도 있다.
8월을 여는 기도
차츰 높아지기 시작하는 하늘로
흰구름을 듬뿍 보내시는 하나님
그 사랑을 감사합니다
8월의 흰구름만큼이나 다양하게
피어있는 꽃들의 강변으로
엘리야의 까마귀들 날아와 오작교로 놓이고
견우와 직녀가 눈물로 만난다는 밤
8.15 그 감격으로 우리도 만나
끌어 안게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불볕이 식기전에 억새풀마저 키우시듯
8월이 가기전에
믿음도 교회도 마저 자라게 하시고
팔복의 진리로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영원한 해방자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8월 : 8월이 오면. 8월이 오면 우리는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하기 전에, 다 꺼져갔던 우리의 숨통이 되살아난 그 날을 상기하자 !
그 날이 왔기에 우리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웃으면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있었음을 깨달았지 않았는가 !
용솟음치는 힘이 어디에서 터져 나오는지를 우리는 보았기에 8월은 진정 인내를 배워주고 있지 않는가 !
8월이 오면 우리는 바다를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산을 밀치고 돌아 설 수 있는 인내를 발휘하자.
우리들이 기다리는 그 날은 8월의 그 날보다 더욱 푸른 미래를 안겨주는 날, 우리들의 청춘이 결실하는 그 날은, 엄동설한에 온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 날이 와서 어머니 눈망울에 눈물이 맺히고, 귀여운 동생의 보조개가 한없이 들어갈 때 8월에 응고해 두었던 한 여름의 화염(火炎)을 폭발시키자 !
8월에 와신(臥薪)하는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8월에 상담(嘗膽)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니,
진정 우리는 8월에 감사하자.
8월이 오면 우리는 다 꺼져갔던 우리의 숨통이 어떻게 되살아났는가를 보았기에, 우리는 8월에 참된 웅지(雄志)를 잉태시키자.
8월의 강이 손벽친다.
8월의 강이 몸부림친다.
8월의 강이 고민한다.
8월의 강이 침잠(沈潛)한다.
-8월의 강 : 박두진-
8월의 탄생석 : 감람석(橄欖石 ; Peridot). 대용석은 붉은 얼룩마노(赤縞瑪瑙). 올리브색의 보석. 투명하고 광택이 있으며, 냉철한 이성을 가지게 한다고 한다.
또 황금에 끼어 패물을 만들면 밤의 공포를 방지할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붉은 얼룩마노는 부부 화목과 늘 유쾌히 지낼 수 있다고 한다.
남성의 지환에 흔히 사용한다. ⇨1월 1일.
8월 1일·
오늘의 말씀
① 에스겔26:1 (제 십 일년 어느 달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② 시81:3-4 (월삭(月朔)과 월망과 우리의 절일(節日)에 나팔을 불지어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律例)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規例)로다.)
③ 월삭 1) 구약관련 성경(민10 :10, 민28 : 11-15, 대상23:31, 스3:5, 느10:33, 시81:3, 사1:13-14,사66:23, 호5:7, 암8:5)
2) 신약관련 성경(골2:16)
***** 월삭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날(日)[=구약에서는 욤, 신약에서는 헤메라] 라고 합니다.
이 날은 성경에서 그렇게도 많이 나오는 정해져 있지 않은 "그 날" 입니다.
또 이 날을 예수께서는 "사람들안에서 빛나는 빛" 이라 했고 이것을 생명이라고 하셨지요.
죄[=모른다]에서 알다[=깨달음]으로 변화, 거듭나는 순간이 바로 그날이요 욤이요 헤마라요 주일[=일요일 아니고...]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에서는 '예배할 때가 오나니"가 되어진 자입니다.
아무나 교회가서 일요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지요?
이렇게 하루 [=날, 빛의 자녀]가 된 자들이 깨달음에 깨달음으로 그 장성함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하는 데 날이 모이고 모이면 달이 되고 달이 모이고 모이면 해[=12달]이 되듯이 날[=빛의 자녀]이라 하는 것이고 달[=날들이 모여진 자, 즉 깨달음이 장성한 자, 선지자] 라 하는 것이고 해[=깨달음이 장성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란자 , 하나님과 동역자로 일하는 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영적여정에서 자신이 달[=월]이 된 때는 월삭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월삭에 대하여 !!
월삭은 기독교에서 초승달의 출현으로 표시되는 매달의 첫날을 종교적인 축제일로 지키는 일을 말하며, 이 날에는 형식을 갖춘 음식을 먹었으며, 지키는 방법은 여러 점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비슷했다.
일로부터의 휴식, 희락, 특별한 희생제사 등의 특징이 있다.
예식은 나팔을 불어 선포했고, 특히 7월의 월삭을 중시했다(“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라” 레위기 23:24~25).
바빌론 유수 이후의 유대교에서는 월삭의 중요성이 더욱 증가되었다.
종교적인 축일로 번제를 바쳤다(“월삭에는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민수기 28:11).
월삭에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엘리야(“제 십일년 어느 달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에스겔 26:1),
학개(“다리오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학개 1:1) 등이 있다.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하라
사무엘상 20:5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하고
이사야1장 말씀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오늘의 역사
① 대한제국 군대 해산(1907) : 고종의 퇴위․정미 7조약 등으로 반대하는 불온한 공기가 떠돌았으므로, 이토오와 일본 대장 하세가와는 순종을 협박하여 군대해산의 조서(詔書)를 내리게 하여 한국의 군대(당시 불과 9천명)를 1907년 오늘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로써 한국은 방위력이 없는 무력한 나라가 되고 만 것이다.
⇨7월 20일.
⇨7월 24일
“일본인들이 며칠간 한국과 한국인에게 전례 없는 존경심을 갖고 말할 정도로 용감한 항전이었다.”(영국 신문기자 F A 매켄지의 저서 ‘자유를 향한 한국의 투쟁’)
그들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이었다.
1907년 8월 1일.
서울은 새벽부터 비가 퍼부었다.
3441명의 대한제국 시위대 장병들에게 오전 10시까지 동대문 밖 훈련원(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맨손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군사훈련’이라고 했지만 실은 ‘군대해산식’이 목적이었다.
일제가 꾸민 간계였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군대해산 소식을 전해들은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격분한 시위대 장병들은 무기를 들었다.
대한제국 시위대의 마지막 투쟁, ‘남대문 전투’의 서막이었다.
일본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전투는 백병전 끝에 일본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숭례문에서 쏜 기관포가 천둥처럼 진동하고 성 안팎의 수백 집이 불탔다.
(중략)
여학교 간호부 몇 명이 탄환을 무릅쓰고 인력거에 아군 부상자를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
(중략)
장안 백성이 돈을 거둬 전사 장병의 장례를 지내고 곡을 한 뒤 돌아갔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전했다.
국방부가 펴낸 ‘군사(軍史)’에 따르면 이날 일본군은 중대장 1명을 포함해 4명이 죽고 22명이 다쳤다.
우리 편은 장교 11명 등 68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부상했다.
이 저항 정신은 의병 독립군 광복군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됐다.
100년 후 한국군은 최신예 전함 이지스함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역사의 수레는 ‘영광’과 ‘치욕’이라는 두 바퀴로 도는 걸까. 당시 상당수 대한제국 군대 지휘관들은 “장교는 해산 대상이 아니다”라는 일제의 말에 넘어가 부하를 회유하고 탄환을 회수하는 일에 앞장섰다고 ‘군사’는 평가하고 있다.
8월 30일 ‘장교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 장교들은 조용히 사라졌다.
64명의 해산 군인 출신 의병장 가운데 장교는 13명뿐이다.
역사는 ‘남대문 전투’의 진정한 승자로 그들을 기억한다.
100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 지도층의 배신과 망국의 한(恨)을 안고 스러져 간 이름 없는 ‘마지막 군인들’을….
(박용 기자 parky@donga.com.2007)
② 청일 전쟁 발발(1894) : 청일 전쟁이란 1894-1895년에 걸쳐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을 말한다.
당시 일본은 절대주의 국가로서 성장,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우선 한국에의 침략을 노리고 있었고, 청나라는 또한 한국에 대하여 종주권(宗主權)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한국을 둘러싼 양국의 다툼이 격화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1894년 6월에 동학란(東學亂)이 일어 났다.
동학란이 일어 나자 조선왕조에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중국의 이흥장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일본도 조선에 사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파병(派兵)하여 이로써 그들의 세력을 만회코자 하였다.
실제로는 청․일 양군이 출동하기 이전에 동학란은 진압되어 있었는데, 이 때 일본은 조선의 적폐를 제거치 않으면 내란이 재발한다는 이유를 들어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개혁을 꾀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국은 즉시 철병을 요구하여 여기서 양국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청군을 조선에서 축출하기 위하여 1894.7.25 청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하여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청군은 근대적인 군비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육전(陸戰)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을 추격하여 만주까지 침입, 요동반도(遼東半島)에서 요서(遼西)로 진격하여 북경을 엿보고, 황해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도 일본군은 청의 정여창 제독이 이끄는 북양 함대에 결정적 타격을 주고 더욱 위해위를 점령함으로써 만주에 진격한 육군과 호응하여 북경을 협공하는 태세를 보였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마침내 화의(和議)를 제의, 1895년 4월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③ 양정모, 올림픽 금메달(1976) : 1976년 오늘 !
제 21회 몬트리올 올림픽 !
레슬링의 양정모선수가 해방후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우승합니다.
양정모 선수는 레슬링 자유형 패더급에서 영광의 금메달을 차지합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이래 사상 두번째입니다.
예선전에서 캐나다 등 4개국 선수들을 차례로 꺽고 결승 리그에 진출한 양정모 선수.
미국의 데이비드를 이기고 몽고의 강적 오이로프를 꺽으면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합니다.
우리나라는 양정모선수의 금메달 획득에 힘입어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종합 19위를 차지합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이 7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최대 10개 정도의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미 금메달을 사실상 예약한 선수도 있다고 한다.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국민은 단연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여 년 전만 해도 올림픽 금메달은 전 국민의 염원이자 대한민국의 숙원이었다.
요즘처럼 대구의 기온이 35.8도까지 치솟는 등 전국이 폭염에 시달리던 1976년 8월 1일. 한 달째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까지 겹쳐 있었다.
열대야에 잠을 설치다 느지막이 잠에서 깬 국민에게 선물이 배달됐다.
대회 폐막을 불과 몇 시간 앞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금메달을 따냈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숨 가쁘게 전해졌다.
양정모는 이날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 마지막 경기에서 당시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인 몽골의 오이도프에게 8-10으로 졌다.
당시에는 예선을 거쳐 3명이 결승리그를 벌여 최고 점수를 얻은 선수가 우승하는 대진 방식이었다.
양정모는 결승리그 첫 경기에서 미국의 진 데이비스를 폴로 꺾은 반면 오이도프는 데이비스에게 판정패했다.
6점 차 이상이나 폴로 지지 않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서 마지막 경기에 나선 양정모는 “지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싸우겠다”며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다.
3라운드 한때 8-6까지 앞서 나가던 양정모는 막판 오이도프에게 역습을 허용하며 8-10으로 역전패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후 주심은 오이도프의 손을 들었다.
그러나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한 쪽은 최고점수를 얻은 양정모였다.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은 당시 양정모의 금메달 소식은 호외로 만들어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하루가 지난 월요일자 동아일보의 1면 머리기사는 ‘전 국민이 염원하던 금메달을 양정모 선수가 드디어 쟁취했다’고 전했다.
그랬다.
건국 후 처음으로 참가한 1948년 런던 올림픽 이후 은메달 5개, 동메달 7개만 땄던 당시 우리나라에 금메달은 쟁취의 대상이었다.
양정모 이후 우리나라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동·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만 67개를 따냈다.
명실상부 스포츠 강국으로 위상을 굳혔다.
그런 만큼 이제는 금메달에만 집착하기보다는 경기와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드라마를 즐길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2008)
④ 윤이상 오페라 <심청(沈淸)>, 바이에른 음악제 첫날 첫 프로그램으로 공연(1972) : 독일 뮌헨에서 윤이상(尹伊桑;1917~1995)의 오페라 심청이 초연됐다.
독일 극작가 하랄트 쿤츠가 대본을 쓴 심청은 그 해 뮌헨에서 열린 제20회 여름 올림픽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오페라 심청은 무대를 영생(永生)의 공간인 천상(天上)과 세상살이의 공간인 지상(地上) 그리고 죽음의 공간인 바다로 나누어 우리 고전 심청전을 새롭게 구성했다.
고음이 위태롭게 넘실대는 윤이상 음악의 탈투(脫套)는 선불교와 노장(老莊)의 분위기를 점점이 박은 쿤츠의 리브레토와 어우러져, 오페라 심청을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탈속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윤이상의 조국 한국에서 오페라 심청이 초연된 것은 작곡자가 작고하고 4년이 지난 1999년 들어서다.
그를 독일에서 납치해 간첩으로 몰았던 박정희 정권은 1979년에 무너졌지만, 뒤이은 군사 정권은 물론이고 민간 정권도 끝내 이 불온 인물의 조건 없는 조국 방문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1967년 사건은 흔히 동백림 사건이라고 불린다.
백림(伯林)은 베를린의 한자 이름이다.
이 사건에는 재불(在佛) 화가 이응로(李應魯)도 걸려들었다.
두 해 동안의 옥살이 끝에 서독 정부의 노력으로 풀려난 윤이상은 베를린으로 돌아가 얼마 뒤 서독에 귀화했고, 결국 독일인으로 죽었다.
작고하기 한 해 전인 1994년 정부가 그에게 내놓은 귀국 조건 때문에 윤이상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을 때, 기자는 베를린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20세기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가 틀림없을 그는 조국을 방문하기 위해 서약서라는 이름의 반성문을 쓰는 것은 그 때까지 자신이 추구해온 예술 세계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며 분개했다(고종석,2002).
⑤ 의약분업 본격 시행(2000) : 의사는 환자에게 처방전만을 교부하고, 약사는 처방전에 따라 약을 조제․투약하는 '의약분업' 제도!
우여곡절 끝에 2000년 오늘부터 본격 시행됐다.
예상대로 혼란과 파행이 빚어졌다.
동네의원들 가운데 정부의 의약분업 강행에 항의해 문을 닫은 곳이 많았고 대형 병원에서는 전공의들이 파업을 벌였다.
처방전을 들고 여러 곳의 약국을 전전한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미리 한 달 동안 계도기간을 뒀어도 당국과 병원,약국의 사전준비 부족과 환자들의 부적응으로 새로운 제도 도입이 가져온 사회적 진통은 매우 컸다.
⑥ 제주도, 전라남도에서 분리(1946) : 대한민국 최대의 섬인 제주도가 1946년 오늘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도로 승격됐다.
9년 뒤인 1955년 9월 1일에는 제주읍이 시로 승격하게 된다.
이 섬은 신라 때 '탐라'라는국호를 갖게 됐고 이후 명칭이 도이, 주호, 탐라 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리다 고려 충렬왕 때부터 제주라 불렸다.
1981년 서귀읍이 중문면과 통합하면서 서귀포시로 승격돼 현재 2시 2군 7읍 5면으로 편성돼 있다.
⑦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 시작(1650) : 오늘 시작하여 1653년 6월에 끝마쳤다.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 재위 26년 2개월(1623.3-1649.5)간의 사실을 적은 실록.
원명은 《인조대왕실록》이다.
50권 50책.
활자본(편년체).
규장각도서.
1653년(효종 4) 이경여(李敬輿) 주재하에 실록청(實錄廳)에서 편집,간행하였다.
이 실록은 인조 재위 동안에 있었던 정치․외교․국방․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이 시대순에 의해 편년체로 서술되어 있다.
인조는 세조․중종과 같이 전왕을 폐하고 즉위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일반적 기년법인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사용하지 않고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하였다.
인조 재위기간에는 서인의 집권으로 정계가 재편되고 국가정책의 변화가 있었으며, 반후금정책(反後金政策)으로 인해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격동기가 되었는데, 《인조실록》은 조선 중기의 역사․문화 연구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1920년 영인본이 간행되었으며, 조선왕조의 다른 왕의 실록과 일괄하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⑧ 규장각(奎章閣) 설치(1776): 조선시대 왕실도서관.
정조가 즉위한 1776년 궐내(闕內)에 설치,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다.
세조 때 일시 설치되었다가 폐지된 뒤 정조가 즉위하면서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설립하였다.
창설한 뒤 우선 영조의 어필․어제를 봉안하는 각을 창덕궁 안에 세워 봉모당(奉謨堂)에 모시고,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새 활자를 만들어 관리 하는 일과 편서․간서를 맡겼다.
주로 출판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병합하여 외각으로 하였다.
1781년에는 청사를 옛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겼으며, 강화사고(江華史庫) 별고를 신축하여 강도외각(江都外閣)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西庫)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閱古觀) 등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보관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총 3만여 권에 달하는 현재 규장각도서의 원류이다.
관원으로는 제학 2명, 직제학 2명, 직각(直閣) 1명, 대교(待敎) 1명 외에 검서관(檢書官) 4명이 있었다.
각신들은 삼사보다도 오히려 청요직(淸要職)으로 인정되었다.
규모도 1781년까지 계속 정비되어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남에 따라 다시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하기도 했다.
또한 내외도서가 계속 수집․보관되어 1781년에는 총 3만여 권의 도서목록이 서호수(徐浩修)에 의해 작성되어, 이를 《규장총목(奎章總目)》이라 했다.
설립 이후 그대로 존속되어 오던 규장각은 1894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에 두었다가 1895년 규장원으로 고쳐 조선․중국의 도서와 각종 왕가 전보(傳寶)를 보관, 1897년(고종 34) 다시 규장각으로 환원시켰다.
1908년에는 근대적인 직제를 편성하여 전모(典謨)․도서․기록․문서 등 4과가 사무를 집행했는데, 이때에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각관서의 일기 및 등록과 정족(鼎足)․태백(太白)․오대(五臺)․적상(赤裳) 등 사고의 장서까지 관할하였다.
그뒤 1910년에 그 이름이 없어지고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도서 5353부 10만 187책, 각종 기록 1만 730책이 넘어갔다. 1912년에는 총독부에 참사관실이 설치되어 이들 도서와 관련된 사무는 참사관실로 이관, 1922년에는 학무국으로, 이어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 광복 뒤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하여 관리하였다.
현재 규장각 보관자료는 본래의 규장각도서 13만책, 고도서 2만 5000여책, 고문서 5만여 점, 목판 1만 7800여 장 등 총 22만여 점이다.
그 중에서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일성록(日省錄)》 《17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 《송조표전총류》 등 5종 3833책이 국보로,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금강반야바라밀경》 등 6종 22책이 보물로 지징되어 있다.
1989년 10월 서울대학교 안에 독립건물을 마련하였다.
⑨ <인간문제(人間問題)> : 강경애(姜敬愛)의 장편소설.
1934년 8월1일-동년 12월22일 어간《동아일보》에 연재, 발표되었다.
마름 소작인 주인공 선비의 아버지는 소작인들을 동정했다 하여 지주 덕호에게 맞아 죽고 어머니는 가슴앓이 병으로 죽자 선비는 덕호네 하녀가 된다.
첫째는 덕호에게 대들다가 소작을 떼여 결국 마을을 떠나 부두노동자가 되고, 선비도 덕호에게 유린당하고 덕호 첩이었던 간난이를 찾아 서울로 간다.
이미 노동운동에 관여하던 간난이는 선비를 데리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방직공장에 들어간다.
후에 부두노동자들의 시위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검거되자 간난이는 피신하고 선비는 고된 노동에 혹사당하고 마침내 폐결핵을 앓게 되어 해고당하는데, 선비를 좋아하는 첫째와 간난이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죽은 뒤였다.
첫째는 죽은 선비를 보면서 이것이 바로 수천만 년을 두고 인간이 해결하려 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1930년대 한국의 참담한 현실을 예리하게 파악해 보여 준 사실주의 작품이다.
⑩ 무어, 나이지리아 선수 지도 (1977) : 세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인 미국의 권투선수 아키 무어 !
1952년부터 10년동안 권좌를 누리고 챔피언 벨트를 넘겨준 지 15년만인 1977년 오늘.
나이지리아의 한 마을에서 어린 선수들에게 권투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선수시절 229전 194승 141KO라는 기록을 세우며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아키 무어 !
1963년 은퇴한 후 나이지리아의 국가대표 코치를 맡아 미래의 세계챔피언을 기르기 위해 노력합니다.
⑪ 중공 장사고분 사진발굴(1972) : 중공 호남성 장사시(長沙市) 교외에서 2천 1백여년 전에 매장된 여인의 시체가 그 형상이 거의 보존된 그대로 발견됐다.
더욱이 무덤 속에서 나온 1천여 점의 부장품(副葬品)은 민속학 연구에 새 자료가 될 뿐 아니라 한나라의 문화가 화남(華南)에서 어떻게 받아들여 졌는가를 밝힐 수 있는 고고학적 의의를 갖고 있다.
⑫ 유럽 회의(Council of Europe ; C.E) : 유럽에서 국방을 제외한 경제․사회․문화면에 있어 공동문제를 토의하며,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이다.
1949년 1월의 서유럽동맹(WEU) 이사회에서 설치를 결정, 그해 5월 런던에서 서유럽동맹 가맹국 19개국이 유럽 회의 규약에 조인, 8월 1일에 발족되었다.
최근에는 유럽 경제공동체와 유럽 자유무역 연합의 조정에 힘쓰고 있다.
본부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⑬ 프랑스 인권선언 :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Citizen.
기초 ; 라파이엣트(La Fayette).
공포 ; 1798.8.1.
구성 ; 전문 및 17개조.
제1조.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自由)이며 평등(平等)한 권리(權利)를 가지고 있다.
사회상의 차별(差別)은 다만 일반의 이익에만 의거하여야 한다.
제2조. 모든 정치적 조직(政治的組織)의 목적은 인권(人權)의 옹호에 있으며, 인권은 자유․재산(財産)․안전(安全) 및 억압(抑壓)에 대한 반항(反抗)의 권리를 보유(保有)하는 데 있다.
⑭ 베를린 올림픽 개막(1936) : 1936년 오늘 !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이 개막됩니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의 발상지 아테네에서 성화가 채화돼 봉송됐습니다.
49개 나라 4천3백8명의 선수가 참가한 베를린 올림픽.
히틀러는 베를린 올림픽 개최를 통해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려고 합니다.
개막식날 미국의 육상선수 제시 오웬스 때문에 히틀러는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100미터 육상경기의 우승자 오웬스는 히틀러가 열등한 종족이라고 경멸했던 흑인이였기 때문입니다.
**********************1935년 독일 '재무장'과 인종차별 정책에 따른 올림픽 보이코트 논란 끝에 오늘, 49개국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11회 베를린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필리핀과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의 국가가 선수단을 파견했다.
독일은 참가국 가운데 가장 많은 348명의 선수단을 출전시켰고, 미국은 18명의 흑인 선수를 포함한 312명이 참가했다.
베를린 올림픽은 히틀러의 정치적 목적을 훌륭히 달성한 일종의 정치 연출이었다.
올림픽 유치의 일등 공신인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독일 중앙 관광국이 중심이 되어 전세계 40여 개 국에 올림픽 선전 사무실을 열고, 13개 국어로 올림픽 포스터를 제작 배포했다.
또한 베를린 올림픽은 역사상 최초로 TV로 중계되었으며, 대부분의 메달을 휩쓴 독일 선수의 활약상을 방송함으로서 '위대한 독일과 아리안족' 선전이라는 히틀러의 올림픽 개최 의도를 충족시켰다.
독일은 유태인의 자국 대표 출전을 금지시켰으며, 유태계 미국 대표 육상 4백 미터 계주 선수 마티 글릭먼(Marty Glickman)과 샘 스톨러(Sam Stoller)가 경기 하루 전 독일과의 마찰을 우려해 다른 선수로 교체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번 대회에서 14명의 유태인이 각종 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했으며, 한국의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가 마라톤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려 일제식민지하 조선 민중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켰다.
독일은 1차 대전 발발로 무산된 1916년 "6회 베를린 올림픽"을 유치한 전력이 있다.
히틀러는 대중동원을 위한 정치 연출로서 '올림픽'의 가치에 주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1940년 동경 대회' 이후, 올림픽의 영구 자국 개최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⑮ 메이플라워호 기념 항해(1970) : 네덜란드의 항구도시 라이덴 !
1970년 오늘 소형 선박 쉰여덟척이 항해에 나섭니다.
3백50년전인 1620년 오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을 기념하기 위한 항햅니다.
순례자 백두명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대륙으로 떠났습니다.
3백50년이 지난 오늘 쉰여덟척의 배들은 순례자들이 갔던 항로를 따라 노틀담을 거쳐 미국의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하면서 항해를 마칩니다.
⑯ 8․1선언(八一宣言)(1935): 정식 제명은 <항일구국을 위해 전국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다.
그 해 8월 1일자로 중국공산당과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정부의 연명으로 발표된 선언.
그즈음 중국공산당의 홍군 주력부대는 장정(長征) 도중 쓰촨성[四川省(사천성)] 북부의 마오얼가이[毛兒蓋(모아개)]에서 정치국 회의를 열고 있었다.
한편 7월부터 8월에 걸쳐 모스크바에서 코뮌테른 제7회 대회가 열려 천사오위[陳紹禹(진소우);王明(왕명)]가 중국공산당 대표로서 항일통일전선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마오얼가이의 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소비에트 기지를 지키려 하는 장궈다오 등에 대해 민주적인 항일민족통일전선 조직을 주장하여 그들은 물러났다.
8․1선언은 <국민당군이 홍군 공격을 그만둔다면 함께 구국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 임박한 일본의 대중국 침략에 맞서 일어설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선언은 마오얼가이에서 결정․발표된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모스크바 중국공산당 대표단이 당 중앙 이름으로 발표한 것으로 추정된다.
⑰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 등장(1873) : 외지 사람들이 미국 태평양 연안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먼저 연상하는 것은 뭘까?
길이가 2,825m에 이르는 금문교(金門橋)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터이고, 미국 속의 작은 중국이라 할 인구 5만여 명의 차이나타운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마켓스트리트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를 대뜸 떠올릴 것이다.
케이블카라고 해서 남산의 케이블카처럼 공중을 가로지르는 탈것을 연상해서는 안 된다.
현재 세 개 노선이 운행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는 여느 탈것처럼 지상을 달린다.
그러니까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는 구한말부터 지난 1969년까지 서울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전차와 비슷하다.
사실 자체 동력으로 달리는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는 실질적으로 전차이기도 하다.
이것이 케이블카라고 불리는 것은 초창기부터 20세기 중엽까지 그 운행이 증기터빈과 연결된 케이블에 차의 동체가 이끌리며 이뤄졌기 때문이다.
케이블카가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73년 8월1일이다.
샌프란시스코는 비탈과 언덕이 많아 노약자들이 걷기가 쉽지 않다.
앤드류 스미스 핼리디라는 사나이는 케이블로 움직이는 차를 이용하면 이 비탈길들을 쉽게 오를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고, 이런저런 실험 끝에 케이블카 시스템을 고안해내 1871년 특허를 얻었다.
130년 전 오늘 샌프란시스코의 새크라멘토 거리를 처음 달린 케이블카는 발명자의 이름을 따 핼리디 폴리(핼리디의 엉뚱한 짓)라고 불렸다.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케이블카는 교통 수단의 의미를 많이 잃었지만, 샌프란시스코시는 이 도시의 상징적 탈것을 보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케이블카 박물관까지 운영하고 있다.
1964년 미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를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한 바 있다(고종석,2003).
⑱ 美MTV 개국(1981) : 8월 1일 미국 뉴욕에서 MTV라는 이름의 방송국이 문을 열었다.
MTV는 음악TV(Music TV)의 약자로 24시간 내내 뮤직비디오만 트는 채널이다.
MTV는 첫 뮤직비디오로 영국 출신 더 버글스의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네(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선택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예언이었다.
가수라는 직업이 등장한 이래 이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가창력과 연주력이었다. 일개 방송국이 이를 바꿔 놓을 수 있을까.
예언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만다.
1980년대 이후는 비디오형 스타의 전성시대였다. 대중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했고, 가수들은 점점 더 화려한 영상과 볼거리로 화답했다.
MTV 시청자들은 지루해할 틈이 없다. 지루할 만하면 바로 화면이 바뀌어 버린다.
10대는 어차피 인내심과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는 나이대가 아닌가.
비디오자키(VJ)들은 예전의 디스크자키(DJ)와 달랐다.
10대들은 그들의 자유분방함에 열광했고, MTV는 학교가 매년 신입생을 받듯 새로운 팬들을 계속 받아들였다.
기업으로서 MTV도 빨리 바뀌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영학자들은 MTV의 성공 비결로 고객 중심의 운영을 꼽는다.
초창기부터 시청자들의 선호도와 반응을 연구했고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
시청자들을 프로그램에 직접 등장시켰고 랩, 댄스, 라이브 등 주제에 따른 다양한 코너를 만들어 냈다.
마이클 잭슨은 마돈나와 함께 MTV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가수 가운데 한 명.
하지만 초창기 MTV는 그의 음악을 틀지 않았다. 백인들에게 초점을 맞추다 1983년 인종 차별을 이유로 법적 제재를 받자 재빨리 방침을 바꿨다.
이렇게 방영된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 스릴러는 최대의 히트작이 됐다.
뮤직비디오가 등장한 이유는 결국 음반을 많이 팔기 위해서다.
MTV의 가장 큰 업적은 로큰롤을 비디오 영역으로 꼬여내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이 연예물인지 판촉물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스티브 레비, 롤링스톤지)
MTV의 등장인물은 가수이자, 뮤직비디오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광고 대상이다. 현대인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엿보게 한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2006)
⑲ 나일 해전 : 1798년 8월1일 오후3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나일강 입구 아부키르만에 정박한 프랑스 함대를 찾아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함대를 뒤쫓은 지 두 달여 만이다.
프랑스도 영국 해군을 발견했으나 양 함대의 거리가 좁혀진 오후6시까지 경계를 강화했을 뿐 별다른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적정 정찰을 거쳐 작전계획을 세운 뒤 다음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게 이전까지의 해전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태양이 지중해의 수평선에 잠길 무렵 넬슨은 전열함 13척을 소총 사정거리까지 접근시켜 선공을 퍼부었다.
밤새 치러진 포격전의 결과는 영국의 압승. 주력인 전열함의 수와 크기에서 앞서고 함포 구경도 컸으며 해안포대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음에도 전멸하고 말았다.
야간전투를 예견한 넬슨은 전등으로 아군 간 식별표시를 해놓은 반면 피아 구분도 못할 정도로 갈팡질팡했던 프랑스는 전열함 14척 중 3척이 격침되고 9척을 빼앗겼다.
프리깃 2척도 잃었다.
전열함 2척과 프리킷 2척만이 간신히 도망쳤다.
영국은 218명이 죽고 677명이 부상 당한 반면 프랑스의 피해는 전사 1,700명, 부상 600명, 포로 3,000명에 달했다.
나폴레옹의 첫 패배인 나일 해전의 결과는 근대사의 흐름을 갈랐다.
프랑스에 눌려 지내던 유럽 각국은 2차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애 써 확보했던 이탈리아와 지중해의 패권을 잃었다.
나일 해전의 승리를 넬슨이 전사하며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한 트라팔가 해전(1805년)보다 높게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이집트에 발판을 마련해 홍해와 인도를 지배하고 오스만튀르크까지 분쇄해 유럽을 완벽하게 포위, 알렉산더와 로마를 합친 것보다 큰 제국을 이루려던 나폴레옹의 야망이 꺾였기 때문이다.
(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
⑳ 치마 금지령(Dress Act)(1746) : ‘왕국 내 모든 남성들의 치마 착용을 금지한다.
어길 경우 6개월 징역에 처하고 두번째 위반하면 해외 식민지로 7년 이상 추방한다.’
영국 의회가 1746년 8월1일 결의한 ‘치마금지령’의 골자다.
법 제정의 목적은 스코틀랜드 저항운동 억압. 스튜어트 왕조 복원을 내걸고 끈질기게 저항하는 자코바이트파의 반란을 1746년 4월 완전히 진압한 후 고지대(스코틀랜드)의 모든 전통을 금지하며 이 법을 만들었다.
영국판 ‘내선일체(內鮮一體ㆍ일제의 조선동화정책)’였던 셈이다.
치마는 과연 고지대의 전통복색이었을까.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에 따르면 치마는 물론 씨족이나 가문을 구분하는 격자무늬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킬트(kilt)로 불리는 치마 자체도 스코틀랜드 노동자를 고용한 영국인 제철업자가 길고 거추장스러운 원피스 형태의 전통의상을 작업용으로 간편화한 발명품에 불과하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런 주장에 펄펄 뛰며 고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라고 주장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치마금지령이 정반대의 효과를 냈다는 점이다.
반영감정이 오히려 치마의 저변을 확대시켰다.
귀족 등 재산가들도 노동자들의 복장이라고 무시하던 치마를 애국심에서 입었다.
결국 영국은 36년 뒤인 1782년 금지령을 풀었다.
스코틀랜드 근위연대 병사들이 치마를 입고 국왕 열병식을 치른 1822년부터는 ‘킬트 문화’는 완전한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상인들의 판매전략에 따라 격자무늬 천도 정신 없이 팔려나갔다.
스코틀랜드의 치마 문화가 탄생한 지 300년이 채 안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만들어진 전통’만큼은 낯설지 않다.
개항 이후 서구를 따라잡은 일본의 제도와 문화 대부분이 ‘만들어진 전통’이다.
왕을 신성시하는 이른바 ‘천황제도’부터 음식에 이르기까지.
(인터넷한국일보, 2009/07/31)
㉑ 기타 오늘의 역사
1402(조선 태종2) 신문고 설치
1648 스위스,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
1793 프랑스 미터법 채택
1816 영국의 버질 홀 함장 서해안 방문하여 한문성경 전달
1834 영국 노예해방 선언
1876 가뭄으로 곡식을 절약하기 위해 양조 금지
1880 노드필드대회 창설.노드필드 기독교사역자대회는 종종 노드필 드 성서대회라고도 불리는데, 이 대회는 무디에 의해 매세추 세츠주 노드필드에서 창설됨.
1896 독일, 민법공포
1906 미국-독일, 호혜관세조약 조인
1907 미국 공군 설치
1908 대심원이하 각급 재판소 개원
1911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 설립
1912 장로교 총회 조직
1914 독일,오스트리아 대소 선전포고
1916 잉거슨 내한.미북장로회 한국여선교사,간호원.미국 출신.미동 병원 세번째 간호원으로 부임.전도사업에 진력함.
1920 김좌진-이청천, 대한의용군 조직
1923 일본 관동 대지진, 7만4천명 사망
1925 진생 창간.편집 겸 발행인 앤더스.발행처 기독청년면려회 조 선연합회.이 잡지는 기독청년면려회의 기관지이다.
1926 한국 최초의 월간 종합지 '개벽' 강제폐간
1927 경성무선국 완성, 통신 개시
1927 중국 공산당 최초의 대규모 전투 '남창기의(南昌起義)' 발발
1930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실업자 폭동
1936 로스엔젤레스한인기독교회 창설.LA한인장로교회에서 시무하 던 김중수목사가 사면당한 후 동지회(이승만)과 그의 후원 세 력이 중심이 된 한인단체.
1937 일제, 고등보통학교의 조선어 과목 폐지
1939 나치독일 폴란드 침공. 2차 세계대전 발발
1939 국립부여박물관 개관
1941 미국, 대일(對日)석유수출 전면 금지
1941 미소경제원조협정 조인
1943 일제, 한국인에게도 징병제 시행
1943 버마 독립선언
1944 바르샤바 시민 반소련 무장 봉기
1945 출옥성도들 교회재건운동 시작, 북한장로교회 재건
1945 조선민주당 결성
1945 조선학병동맹 결성
1946 그리스 국민투표로 왕제 부활
1946 6.6.4제로 학제변경
1947 한국의 국제무선부호를 'HL'로 결정
1948 서독 제헌의회 개최
1950 미의회, 국방생산의 경제통제법 의결
1950 미국, 대만과 방위협정 조인
1951 로마이어 사망.성베네딕트회 수사.순교자.세례명 에우제비오.
한국명 노안락.독일출신.해방후 공산당 천주교 탄압때 체포되 어 옥사함.
1951 미-호주-뉴질랜드 3국 안보조약 조인
1952 일본, 경찰예비대와 해상예비대를 통합하여 보안청 신설
1952 중석불 사건 수사 본격화
1953 국군의 방송 발족
1955 제네바서 미국-중국 회담 개시
1956 루드 내한.구세군 사관.한국명 유부린.위도우슨 사령관의 비 서로 일하였고 외원단체연합회에서 활동함.
1958 미 해병대 제1진 대만 도착
1958 국방부 군종과 발족
1959 미국, 국민당 정부와 대만방위협정 체결
1960 베냉,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0 서울경제신문 창간
1961 경찰청 발족
1961 제1차 비동맹국 정상회담
1961 중소기업은행 발족
1961 KBS 서울 중앙방송국, HLSA에 채녈을 신설하여 경인지구방 송
1961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광주시 대신동 이 사무엘선교사와
Sarah Barrry선교사 설립
1963 국민의당 발족
1963 노동청, 철도청 발족
1963 미.소 직통전화 개통
1966 동파키스탄에 대홍수 이재민 500만
1966 영 여객기 유고서 추락 95명 사망
1967 미국 루나비오터 5호 발사
1972 마이크로버스 의암호 추락사고, 25명 사망
1974 한국-그레나다, 국교 수립
1975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 헬싱키선언 조인
1975 이스라엘 이집트간 시나이 격리협정 가조인
1975 여의도 새 국회의사당 준공
1976 김해 국제공항 개항
1976 생명의 전화 개통 / <월간목회> 창간
1976 해방후 첫 올림픽 금메달 획득
1977 북한, 해상군사경계선 설정. 한국 부인성명
1980 국보위, 신원기록 일제정리와 연좌제 폐지 결정
1981 새여권법 발효
1981 서울지하철공사 발족
1981 해외여행 자유화 시작
1981 미국의 24시간 음악방송 MTV 개국
1982 케냐에 불발 군사쿠데타
1982 전두환대통령, 태평양정상회담 실현위한 5개항 원칙 제시
1983 한국고대문화전, 동경 국립박물관에서 개막
1983 24개국과 국제전화 자동화 개시
1983 소련 미사일로 KAL기 격추. 탑승자 269명 전원 사망
1984 오트볼타, 4일부터 부르키나파소로 국명 변경 결정
1985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학인 401인 선언
1985 1912년 대서양에서 침몰한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 잔해 발견
1985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학인 401인 시국선언
1987 한국-몰타, 국교 수립
1987 중앙지의 지방주재기자제 부활
1988 소련, 미국의 참관 아래 SS12 미사일 폐기 개시
1989 전교조 가입 공립학교 교사 485명 직위해제
1990 정부, AFKN 채널 2 반환 UHF 34채널 신규 배정 한미간 합 의 발표
1991 경찰청 발족
1991 이스라엘 사미르 총리, 중동평화회담 참여 결정
1991 미국,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등 발트3국과 수교
1994 인천북구청 세금횡령사건수사(80명적발,21명구속,4명수배)
1994 출생신고시 사용가능한 인면용한자 108자 추가
1996 고려대 박춘호 교수,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으로 피선
1998 대만 반체제인사 린이슝, 제2야당 민주진보당 주석에 취임
1999 파나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미레야 모스코소(52)가 취임
2000 지하철 7호선 전구간 개통
오늘의 인물
① 장택상(張澤相 ; 1893.10.22 - 1969.8.1) : 초대 외무장관.
호는 창랑(滄浪).
경상북도 칠곡(漆谷)출생.
⇨ 8월 7일.
⇨10월 22일.
② 홍사준(洪思俊 ; 1916.8.1 - 1980.5.23) : 호 연재.
부여와 경주의 박물관장을 지냄.
미술사학자.
충청남도 서천출생.
한문수학 후 서울중동학교 3년을 졸업하였다.
그뒤 경성 예명학교(禮明學校)·양현여학교(養賢女學校)교원을 역임하고, 1932년부터 부여군청으로 옮겨 고적보존 사무를 담당하였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장과 경주분관장을 지내고 다시 국립부여박물관으로 돌아와 정년을 맞이하였다.
경주에서는 첨성대와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실측하였으며, 1967년부터 한국일보사 주관의 신라 5악조사단에 참가하여 토함산과 계룡산 지구에서 새로운 유적과 유물을 발굴조사하였다.
특히, 경주 동해구에서 문무대왕 해중릉 조사에 참여하고, 경주 단석산 신선사(神仙寺)의 마애불상 조사에서는 그곳을 김유신(金庾信)의 기도처로 추정하였다.
또한, 평생 백제문물의 희귀함을 개탄하면서 신라와 일본의 불교문물의 연원이 백제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한국의 석탑과 석불이 백제에서 발생한 사실을 강조하여,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의 다층석탑과 충청남도 부여 정림사오층석탑의 조사, 그리고 서산지역의 초기 마애삼존석상 발견에 공헌하였다. 나아가 익산을 백제 무왕대에 천도한 곳으로 주장하였는데, 이와같은 주장은 마침내 익산발굴에 연결되어 백제유적과 유물조사의 큰 성과를 얻게 하였다.
학계활동으로는 고고미술동인회의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나아가 한국미술사학회 창립과 그 발전을 위하여 공헌하였다.
정년퇴임 후에는 부여에서 후배를 지도하며, 문화재수리에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추모시조집 《서심초 敍心草》와 논문집 《연제고고논집》 등이 있다〈黃壽永〉 .
③ 김용기 사망(1988) : ⇨9월 5일.
④ 박양균(朴暘均 ; 1924.8.1 ~ 1990) ; 시인.
경상북도 영주(榮州) 출생.
성균관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52년 《문예》에 시 <창> 등이 추천되어 등단하였고, 같은 해 첫 시집 《두고 온 지표》를 발간하였다.
이어 꾸준한 작품활동을 전개, 1976년 시집 《일어서는 빛》, 1985년 《전시장(展示場)에서》 등을 발간하였고, 그 밖에 평론 <모순(矛盾)에의 해방>이 있다.
⑤ 김도성(金燾星 ; 1911.8.1 - 1956) ; 시인․영문학자.
평안북도 정주출생.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40년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한 뒤, 중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하였다.
1948년 광복 전부터 써오던 작품들을 모아 시집 《고란초》를 냈다.
1949년 교환교수로 도미(渡美), 이듬해 6․25사변이 일어나자 일본 동경의 유엔군사령부 심리작전부(心理作戰部)에 자원, 근무하였다.
1952년 제2시집 《갈대》를 동경에서 출간하였고, 이듬해에 논문 〈현대영시단(現代英詩壇)의 동향(動向)〉을 발표하였다.
외로운 이상주의자로 워즈워스(Wordsworth, W.) 등의 영국 낭만파 시인들의 시풍에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으로 〈눈 내리는 밤〉(1942)․〈겨울 밤〉(1949)․〈베개〉(1952) 등이 있다.
〈눈 내리는 밤〉은 특히 낭만적․이상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인생을 외로운 겨울나그네에 비유, 정체 모를 비애와 그리움을 조용히 노래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맑고 순수한 적막감 위에 차가운 안식을 노래한 점이 그 특성으로 지적되고 있다. 제2시집으로 《갈대》를 출간하고 귀국한 뒤 죽었다.
⑥ 고운봉(高雲峰 ; 1920 ~ 2001.8.1) : 한국의 대중가요 가수. 울림이 깊고 우수어린 창법으로 깊은 호소력을 지닌 가수로 평가되었다.
1942년 《선창》을 발표하면서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한 뒤《남강의 추억》, 《홍등야곡》등 많은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한국 가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본명은 고명득(高明得)으로, 1920년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1942년 비 내리는 쓸쓸한 부두를 배경으로 이별의 아픔을 담은 《선창》을 발표하면서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한 뒤, 《남강의 추억》《홍등야곡》《명동 블루스》《백마야 가자》《인생은 육십부터》 등 많은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짙은 우수가 깔려 있으면서도 깔끔하고 점잖은 창법과 적당한 울림으로 깊은 호소력을 발휘한 가수라는 평가를 받았고, 말년까지도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활동을 쉬지 않았다.
1998년 한국 가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고, 2000년 6월에는 고향인 예산군 덕산온천지구유 안에 노래비 '선창'이 세워졌다.
2001년 8월 1일 노환에 따른 뇌경색으로 사망하였다.
⑦ 고은(高銀 ; 1933.8.1 ~ ) : [요약] 현실 참여의식과 역사의식을 시를 통하여 형상화한 현대 시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 참여하며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서 왔다.
대표작으로 《피안감성》 등이 있다.
본명 고은태(高銀泰)
별칭 법명 일초(一超)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전북 군산
주요수상 한국문학작가상(1974), 만해문학상(1988), 중앙문화대상(1991), 금관문화훈장(2002)
주요작품 《피안감성》(1960), 《문의 마을에 가서》(1974), 《만인보(萬人譜) 1~9권》(1986~90)
↑ 백담사 고은 시비 '그 꽃'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2리 설악산에 위치한 백담사.
만해기념관이 위치한 백담사 내에 있는 고은의 시비.
현실 참여의식과 역사의식을 시를 통하여 형상화한 현대 시인 고은은 1988년《만인보》로 제3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본문] 본명 고은태(高銀泰).
전라북도 군산에서 출생하였다.
군산중학교 4학년까지가 공식적인 학력이다.
1952년 20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법명은 일초(一超)로 효봉선사의 상좌가 된 이래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를 써왔다.
조지훈 등의 천거로 1958년 《현대시》에 《폐결핵》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간행하였고, 1962년 환속하여 시인으로, 어두운 독재시대에 맞서는 재야운동가로서의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
1974년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를 출판하며 시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다.
그 해부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 참여하며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서 왔다.
1983년 이상화(李相華)와 결혼하였고 20여 년간 지은 시들을 정리하여 《고은 시 전집》1, 2권을 민음사에서 간행하였다.
1986년 《세계의 문학》에 《만인보(萬人譜)》연재를 시작, 그 해 창작과 비평사에서 《만인보》 1, 2, 3권을 간행한 이후, 1988년에 4, 5, 6권, 1990년에 7, 8, 9권을 간행하여, 다음 해 《만인보》로 중앙문화대상을 받았다.
1993년 《백두산》 연작을 완성하였고, 1999년 《머나먼 길》을 출판하였다.
《피안감성》에서 《신언어의 마을》(1967)에 이르는 초기시는 주로 허무와 무상을 탐미적으로 노래한 반면, 《문의 마을에 가서》를 발표한 이후부터는 어두운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현실에 대한 치열한 참여의식과 역사의식으로 시 세계가 바뀌어갔다.
게다가 1980년 5월 이후부터 시작된 투옥, 고문, 연금은 그의 시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역사와 현실 참여를 노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웅주의에 물들지 않고 진솔한 삶의 내면을 드러내 그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루었다.
연작시 《만인보》로 시적 형상성을 얻은 뒤 장편서사시 《백두산》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하였다.
(두산백과사전)
⑧ 이우정(李愚貞 ; 1923.8.1 ~ 2002.5.30) : [요약] 한국 신소설의 개척자인 이해조의 친손녀이며 정치인이다.
한신대학 교수를 지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을 창설했고,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을 파헤치는 등 여성노동자를 위해 일했다.
1992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5월 30일.
전숙희(田淑禧 ; 1919.3.15 ~ 2010.8.1) : [요약] 단편소설로 창작활동을 시작으로 수필 집필에 진념한 수필가.
문화사절단 일원으로 대만 등의 국제펜클럽 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탕자의 변》 등이 있다.
국적 한국
활동분야 수필
출생지 함남 협곡군
주요저서 《탕자(蕩子)의 변》
[본문] 1919년 함경남도 협곡군(陜谷郡)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나왔다.
졸업반 때인 1938년 《여성(女聲)》에 단편소설 〈시골로 가는 노파〉를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로는 수필 집필에 전념하여 1954년 수필집 《탕자(蕩子)의 변》이 첫 출간되었다.
1954년 아세아문화재단 후원으로 1년간 미국 문화계를 시찰하고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비교문화를 연수하였다.
1957년 배로 귀국하는 도중 태평양 상에서 엮은 기행수필집 《이국(異國)의 정서》을 간행하였다.
1959년에는 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대만을 찾았고, 그 후 일본·독일·미국·프랑스 등의 국제펜클럽 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
1966년 전기(傳記) 《여수상 깐디》, 1969년 두 번째 수필집 《밀실의 문을 열고》를 펴냈으며 1970년 동서문화교류를 목적으로 월간지 《동서문화》를 창간하였다.
1972년에는 인도와 이스라엘 등을 방문하고 귀국한 뒤 수필집 《삶은 즐거워라》를 펴냈고, 1973년 네 번째 수필집 《나직한 발소리로》를 냈다.
현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명예회장과 계원조형예술대학 이사장을 맡고 있다.
수필의 특징은 여성의 심리를 조촐한 필치로 표현한 데 있다.
대표작으로 《탕자의 변》 《고생기(苦生記)》 《흰눈이 날리던 날》 《학문의 매력》 《여자된 기쁨》 등이 있다.
(두산백과사전.2010)
故 전숙희씨에 금관문화훈장.
정부는 지난 1일 별세한 수필가 전숙희씨에게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2010.8.5).
60여년 동안 창작과 문단 활동, 한국문학의 해외홍보 등을 통해 문학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됐다.
⑨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 1819.8.1 - 1891.9.28) : 멜빌은 <백경 Moby Dick>(1851) 등 바다와 모험을 다룬 작품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이다.
미국 뉴욕시티에서 앨런 멜빌과 마리아 갠즈보트 멜빌의 4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성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830년 가업인 수입업이 망하자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업을 마친 뒤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1841년 포경선의 선원이 되었다.
항해를 하며 겪은 여러 가지 경험과 모험은 <타이피족 Typee>(1846)과 <오무 Omoo>(1847) 등 모든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포경선에서 일하며 얻은 경험을 토대로 쓴 <백경>에서 멜빌은 고래잡이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주인공과 고래의 처절한 사투에 빗대어 인간의 영혼과 파괴적 충동 등에 대한 자신의 관심사를 극화했다.
<백경>을 쓸 당시 멜빌은 <주홍글씨 Scarlet Letter>의 작가 내서니얼 호손과 가깝게 지내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백경> 이후의 작품으로는 <피에르 Pierre>(1852)․<이즈라엘 포터 Israel Potter>(1855)․<사기꾼 The Confidence-Man>(1857)․<빌리 버드 Billy Budd>(1924) 등이 있다.
⑩ 프랑스 앙리 3세 피습(1589) : 8월 1일 프랑스의 왕 앙리 3세(1574~89 재위)가 피습당해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위그노 전쟁(1562~98) 중에 즉위한 앙리 3세는 재위기간 내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인 위그노 간의 갈등에 시달렸다.
자식이 없던 앙리 3세의 후계자로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나바라의 왕 엔리케가 등장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위협을 느낀 로마 가톨릭 세력들은 기즈 공작의 주도하에 해체되었던 신성동맹을 재결성했다.
앙리 3세는 1588년 12월 기즈 공작과 그의 동생인 기즈 추기경 루이 2세를 암살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앙리 3세와 신성동맹 간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다.
앙리 3세는 나바라의 엔리케와 힘을 합해 신성동맹의 본거지인 파리를 공격했으나 결국 열렬한 자코뱅 수도사인 자크 클레망의 손에 피살당했다.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나바라의 엔리케는 부르봉가 출신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왕위에 올라 앙리 4세가 되었다.
⑪ 나이팅게일 사망(1910) : ⇨5월 12일.
⑫ 코시모 메디치(Cosimo Medici ; 1389 - 1464.8.1) : 325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영화를 누렸던 기간이다.
교황청 주거래은행으로 지정된 1412년부터 마지막 후손 지안 가스토네 토스카나 대공이 1737년 사망하기까지 메디치 가문은 교황 3명과 프랑스 왕비 2명을 배출해냈다.
메디치 가문의 명성이 수백년 간 이어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째는 자선과 기부다.
은행업에서 번 돈을 종교행사나 건축ㆍ조각 등에 아낌없이 퍼부었다.
‘고리대금업자’라는 비난을 희석시키자는 차원이었지만 자선은 가문의 명망을 드높였다.
두번째 이유는 정치권력화. 시민들의 지지와 축적된 자본을 기반으로 피렌체의 권력을 잡았다.
메디치 가문의 권력을 굳힌 주역은 코시모 메디치.
창업자 조바니의 장남으로 1389년 태어난 그는 수도원 학교에서 독일어와 프랑스어ㆍ라틴어를 배웠다.
학업을 마친 뒤 로마지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의 운영방식을 익혀 훗날 피렌체를 지배하는 데 써먹었다.
1464년 8월1일 75세를 일기로 사망한 후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국부(國父) 칭호를 얻었던 그는 역사에서도 기억되는 인물이다.
르네상스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흥망사’를 쓴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코시모라는 이름은 르네상스의 동의어나 다름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코시모가 르네상스의 개척자라는 영예를 얻은 실제 원인은 조바심. 아름다운 성당을 건축해야만 고리대금업을 한 죄를 씻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어 건축과 조각ㆍ미술품에 투자했고 다른 부자들의 모방이 잇따르면서 르네상스의 꽃은 활짝 피었다.
코시모는 ‘재산의 사회환원’에서도 원조격이다.
카네기와 록펠러, 워런 버핏까지 재산을 사회에 내놓은 문화의 밑바탕에는 ‘하나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다 되돌려드리겠습니다’라는 코시모의 신조가 깔려 있다.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7)
⑬ 클레오파트라(Cleopatra ; B.C 69 - BC 30.8.1)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최후의 여왕.
미모와 재치로 유명.
시저, 안토니우스의 애인.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여 자살하였다.
B.C 31년,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선전포고를 내렸다.
공식적으로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선전포고였지만 사실은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사랑의 포로가 된 안토니우스가 페니키아․시리아․키프로스 등 자기 관할하에 있는 로마의 영토를 제멋대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증여하였기 때문에 취해진 안토니우스 토벌전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함대를 그리스 악티움 해전에서 궤멸시켰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 해전에서 탈주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 이듬해(BC30년),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시리아와 리비아의 두 방면으로 진격해 왔다.
안토니우스는 용감하게 출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부하 장병들이 갈수록 옥타비아누스쪽으로 귀순해버려, 8월 1일에는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되고 말았다.
악티움 해전의 패전과 알렉산드리아의 함락이 안토니우스에게 파멸을 초래시켰으며, 아울러 자기 자신도 파멸하게 되었음을 뼈저리게 느낀 클레오파트라는 지하묘지에 숨어서 안토니우스에게 그녀가 죽었다고 알리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여, 나는 그대를 잃은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지금 나도 그대 곁으로 간다.
다만 내가 용기에 있어서 여자보다 못한 자였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 억울할 뿐이다.』라고 말하고서 칼로 자기를 찔렀다.
바로 그다음 순간,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안토니우스는 그녀 곁에 운반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몸을 끌어 안고 불행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한 사람의 로마인으로서, 훌륭한 로마인에게 명예로운 패배를 한 것이니 자기를 행복하게 여겨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 데리고 가서 개선식을 장식하리라 생각한 옥타비아누스는 지하묘지에 틀어 박혀 비탄에 잠긴 클레오파트라를 끌어내는 데 성공, 감시인을 붙여서 연금하였으나 그녀는 여왕의 성장을 하고 황금 침대에 누워 무화과를 담은 광주리 속에 숨겨둔 독사에게 유방을 물게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39세의 클레오파트라는 22년간 이집트왕으로 재위했었으며 그 가운데 14년 이상을 안토니우스와 서로 사랑하였다. 이 사랑 때문에 그녀는 이집트의 왕위와 자신의 생명을 바쳤고, 안토니우스는 대로마 제국과 자신의 생명을 버렸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3백년간 지속되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멸망하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령 중 하나가 되었으며, 안토니우스의 죽음에 의하여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 공동체의 유일한 실력자로 남게 되었다.
⑭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 ; 1915 - 1997.8.1) : 러시아 피아니스트.
심장병으로 사망.
피아노의 큰 별이 떨어졌다.
독일계로 우크라이나서 태어난 리히터는 달관의 연주, 고집스런 자기세계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이었다.
그에게는 천재성, 재능이니 하는 상투적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노력.집착.극기 따위, 땀 냄새 물씬한 단어들이 제격이다. 리히터는 만학이었고, 늦깎이였다.
우크라이나 지트미르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 겐리히 네이가우스 문하에 들어갈 때가 22살이었다.
길렐스 로스트로포비치 프로코피예프와 교유한 것도 이 무렵이었고,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소나타 6번을 초연하면서 모스크바에 데뷔했다.
30살 때 소연방 콩쿠르에 우승했고, 모스크바 음악원을 33살에 졸업했다.
그의 존재를 미국에 알린 것은 밴 클라이번과 에밀 길렐스. 45살(1960년)때 뉴욕 카네기홀 데뷔연주는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서방세계에 그의 명성은 레코드로나 전해질 뿐이었다. 독일에는 1971년 56살 때 데뷔했다.
상업적 명성과 담을 쌓고, 자기방식을 고집한 기행은 유별났다. 공연당일 연주를 취소하는가 하면, 연주곡도 즉흥적으로 골랐다.
외국 연주 때는 비행기를 싫어해 피아노를 배에 싣고 다녔고, 무대 조명을 어둡게 하라며 연주장 스태프를 골탕 먹였다.
앙코르 사절, 인터뷰 사절도 유명한 일화다.
⑮ 라마르크(Lamarck ; 1744.8.1 ~ 1829.12.18) : [요약] 프랑스의 박물학자·진화론자.
생명이 맨 처음 무기물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유기물로 변화되어 형성된다고 하는 자연발생설을 역설하면서 이것이 필연적으로 여러 기관을 발달시키고 진화시켜 왔다고 주장하였다.
또, 진화에서 환경의 영향을 중시하고 습성의 영향에 의한 용불용설을 제창하였다.
원어명 Chevalier de Lamarck Jean-Baptiste-Pierre Antoine de Monet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박물학
출생지 북프랑스의 바장탱
주요저서 《무척추동물의 체계》(1801) 《동물철학》(1809)
[본문] 북프랑스의 바장탱의 귀족가문에서 출생하여 소년시절을 신학교에서 보냈다.
17∼25세에 군대에 있다가 파리에 가서 은행원이 되었으나, 식물원 견학에서 자극을 받아 식물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의학과 식물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식물지》(1778)를 출판하여 유명해졌다.
프랑스혁명과 함께 개편된 파리식물원의 무척추동물학 교수로 임명되어(1793), 동물학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또, 그는 화석과 지질학 등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서서히 진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저서 《무척추동물의 체계》(1801)에서 최초의 진화사상을 보이기 시작하여, 그의 진화론이 명확하게 나타난 것은 《동물철학》(1809) 및 《무척추동물지》(제1권, 1815)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생명이 맨 처음 무기물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유기물로 변화되어 형성된다고 하는 자연발생설을 역설하면서 이것이 필연적으로 여러 기관을 발달시키고 진화시켜 왔다고 주장하였다.
또, 진화에서 환경의 영향을 중시하고 습성의 영향에 의한 용불용설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획득형질 유전론으로서, 라마르키즘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진화론은 당시 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퀴비에의 천변지이설로부터 비판을 받아 인정되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가난과 실명으로 고통을 받았다.
(두산백과사전.2009)
⑯ 기타 오늘의 인물
1592 하키트 출생.콘벤트리와 리치필드의 주교.그는 8년간에 걸쳐 리치필드대성당을 복구시켰고,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많은 기 여를 함.
1614 모어 출생.케임브리지 플라톤학파의 가장 뛰어난 일원중 한사 람.
1715 루이 14세(프랑스 부르봉 왕조) 사망
1728 엠버리 출생.미국 최초의 감리교 목사.[트로이협의회]인 최초 의 감리교 단체를 조직하였다.
1754 니마이어 출생.할레에 있는 대학교의 교수이자 총장이며 프랑 케 재단의 이사.프랑케 재단의 독일어와 라틴어학교에서 교 편잡음.
1775 뉴엘 출생.감리교의 개척 설교자.퇴직할 때까지 순회목사로 활동함.
1826 뉴먼 출생.감리교 감독.설교가 강연자로 유명했고.그의 교단 의 감독대표로 세번이나 선출됨.
1845 독일작곡가 엔겔베르트 훔퍼딘크 출생
1846 로제르트 출생.카알 2세 대공 치하에서 오스트리아 내부에서 진행된 반동 종교개혁의 역사에 대한 활동과 서한집을수록 함.
1857 무어 출생.회중교회 교도.미국 해외선교위원회 자문위원이 되 었으며,1905년 이후로는 자문위원장이 되었다.
1875 `타잔'작가 에드가 라이스 버로즈 출생
1885 허간 출생.장로교 목사,교육가,사회사업가.호는 백석.토마스순 교기념선교회 전도대의 일원으로 웅진지방을 순회하며 전도 해 많은 교회를 설립함.
1888 윤화락 출생.기독교 장로,의료인,교육자.윤화수 동생.연동교회 에 다니면서 한약방 및 침술을 이용 선교함.
1903 홀 출생.미북장로회 선교사,목사.1905년 내한한 맥리어 결혼 후 건강상 본국에 돌아갔지만 새문안교회 신축때 강대상,강 대비품을 일체 기증함.
1903 이피득 출생.감리교 목사,수난자.1927년 1월에 감리교 협성신 학교 졸업.
1922 호이트 출생.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의사.한국명 허익두.대구동 산병원 의사로 부임 원장인 플레처를 도와 의료선교를 시작 함.
1923 복싱 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 출생
1935 쿡 사망.덕망높은 신비주의자.시온주의자이며 대영제국에 팔 레스타인 통치를 위임한[국민연맹] 치하의 팔레스타인의 최 초의 랍비.
1935 컨트리싱어 콘웨이 트위디 출생
1935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출생
1939 배우 릴리 톰린 출생
1944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케손 사망
1973 파나마 실질적 독재자 토리호스 사망
1973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독의 최고실력자 울브리히트 사망
2003 프랑스 여배우 마리 트랭티냥 사망
오늘의 세시
① 팔삭(八朔 ; August 1st of The lunar Calendar) : 음력 8월.
초하룻날의 일컬음.
농가에서 그 해 처음으로 햇곡식을 베는 날이다.
② 서양의 8월 : 고대 영국인들은 8월을 ‘잡초의 달(Weed month
)’이라 불렀다.
8월에는 잡초가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
또한 8월에는 양털을 깎으므로 ‘털 깎는 달(Shear month)’로도 불렀다.
밀 수확기이기도 한 8월엔 빵을 만들 수있는 곡식에 대한 감사 축제가 열려 ‘빵 축제의 달’이다.
서양의 학제가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는 것도 8월의 수확에 유래하며, 따라서 학생들에게는 한 학년을 마치는 ‘결실의 달’이다.
③④⑤
오늘의 샘터
① 허먼 멜빌의 말 : "육체가 영혼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육체에 속해 있는 것이다."
② 허먼 멜빌의 소설 : <백경(Moby Dick)>에서
" 뛰어올랐다!
고래가 뛰어올랐다 !
너무도 힘차게 백경이 연어처럼 하늘 높이 몸을 솟구쳤고,
새파란 바닷물이 삽시간에 하늘로 떠올랐다.
물방울들은 빙하처럼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번쩍 빛나다가
산골짜기에 밀어닥치는 소나기처럼 자욱한 구름안개가 되었 다."
③ " 마른 천둥 우릉대고
햇덩어리 활활 끓고
시간의 하얀 저쪽
바다들이 일제히 혁명처럼 밀려오고
사막 영겁
침묵들이 윙윙대며 불사의 새로 날고 있다."
- 박두진의 시 <8월>에서 -
④ " 8월 1일, 토요일.
여름의 달이요 휴가의 달이다.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려 하는 것인가?
전쟁이냐 혁명이냐? 아니면 평화냐?"
-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가(家)의 사람들> 중에서 -
⑤ 오늘의 문답 (‘8’ 이야기)
제01문 : 당신, <팔불출><팔불용><팔불취><팔정도><팔성도><팔자타 령><팔도강산> 아십니까?
답 : ⇨1월 8일.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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