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운봉의 밤하늘엔 번개가 치고 있었다. 꽉찬 보름빛을 발하는 달을 가리려는 듯 검은 구름이 밀려오는 속에서 번개는 이따금씩 찢어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리산 서북의 끝자락에 위치한 바래봉엔 하얀 실타래같은 산안개가 산을 감싸 안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의 뒤틀림속으로 하얀 달이 구름에 가리며 빛을 잃고 있었다.
몸보다 더 큰 베낭을 맨 두 청년이 운봉 읍내를 가로지르고 있다. 읍내라고 하기에도 너무 거창한 것일까.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이질 않는다.
조그만 시골 마을엔 갓나온 해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은 볕이 아스팔트를 데우고 있다.
어제밤의 뒤틀림과는 달리 하늘은 맑게 개여있다.
청년들은 베낭이 무거운지 전봇대 아래 내려놓는다.
이십대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두 청년. 한 청년의 이름은 이상과현실(이하 이현), 다른 청년의 이름은 연하천원추리(이하 원출).
그들은 지금 지리산으로 가는 중이다.
마을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국도위엔 열에 증발하는 수증기가 아지랑이 모양 피어오르고 있다.
조급함 때문인지 원출은 연이어 담배를 빼어문다.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이내 사라진다.
이현은 연신 땀을 닦아내며 버스가 오는 방향을 주시한다.
마침 백무동으로 가는 버스가 청년들의 손동작에 멈춘다.
버스안엔 지리산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버스는 인월을 지나 백무동으로 접어들고 있다. 도로 양쪽엔 피서를 즐기러 온 타지 차들로 메워져 있고, 계곡 안엔 아침 더위를 잊으려는 듯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의 움직임으로 활력을 띠고 있다.
버스는 종점에 서고 사람들을 하나씩 뱉어낸다.
이현과 원출은 숨을 한번 크게 쉰 후 하늘을 쳐다본다.
운봉에서 바라본 하늘과는 달리 산안개가 옅게 가리워져 있다.
형형색색의 텐트로 물들어 있는 야영장에서 물을 받은 후 둘은 하동바위길로 오르기 시작한다.
(이하 산행기)
08:25
백무동...
만남도 있고 헤어짐도 있고...
정상을 향하는 설레임과 하산의 아쉬움이 교차하는 곳...
어느 계곡이 그렇지 않겠느냐만은 백무동만은 이상스레 이 두가지의 의미가 각별하다...
특히 2월 22일의 기억이 기분좋지 않게 떠오른다...
그래서 담배 한대 피고 출발했다...
베낭을 무겁게 메서인지 걸음이 영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단 둘만의 산행이라면 이렇게 무겁지는 않으리라는 탄식을 서로 내뱉는다...
다섯사람의 산행을 계획으로 텐트며 비박장비들로 베낭은 평소무게의 두배의 짐을 싣고 있다...
땀이 금새 옷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이제 오르기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하동바위에서 만나기로 하고 먼저 발걸음을 재촉한다...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하나둘 앞질러간다...
애인과 함께온 사람들이 많다...
하나도 안부럽다...
친구에게서 빌어 온 고도계시계(카시오 prt40b-3)는 영 감을 잡질 못하고 있다...
녀석은 지금쯤 오대산 어딘가를 또 헤매고 있을텐데...
어제 비가 온 듯 하기도 한데 계곡물은 그리 많아 보이질 않는다...
울창한 숲 덕에 볕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다만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다...
09:15
하동바위...
베낭을 벗고 계곡물을 수건에 적셔 몸을 닦는다...
땀이 범벅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오이며 과일이며를 먹는다...
돌위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하늘도 보이지 않고 새들도 지저귀지 않고...
다람쥐 녀석만 고개를 갸웃이며 가끔 지나간다...
담배를 세대째 피울 때쯤 형이 도착한다...
싸온 오렌지와 오이로 목을 축이고 출발이다...
10:40
참샘이다...
하산한 듯한 일행들이 이제 막 오르려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있다...
약간은 시끄럽게 느껴진다...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고 그들과는 좀 떨어진 위로 오른다...
널따란 바위에 앉아 담배를 피려니 형이 도착한다...
11:30
능선 바위에 올라보니 겨울과 달리 나무가 울창해서 칠선쪽이 잘 보이질 않는다...
형의 베낭에서 약과와 초코렛으로 허기진 배를 달랜다...
11:45
소지봉 통과
11:57
헬리콥타 내리는 x자 통과
12:30
망바위다...
사람들이 꽉 차있다...
생태탐방단체에서 온 듯한 사람들이 나비며 꽃이며 동식물 정보를 이야기하고 있다...
망바위 꼭대기로 오른다...
가깝게 천왕봉이 보이고 연하봉 촛대봉이 보인다...
어디선가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새 형이 도착...
바위위로 올라온다...
바람에 몸을 말리고 내려와 옥수수캔 오렌지 오이를 먹고 좀 쉬고...
13:30
둔한 느낌이 들던 다리가 드디어 굳어지고 말았다...
몇걸음 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짐이 무겁긴 무거운가보다...
형을 먼저 보내고 바람부는 바위에서 마사지를 한다...
걱정이다...
이런식이면 안되는데...
좀 쉬고나니 뭉쳤던 다리가 풀린다...
조심조심 오른다...
14:20
산장이 보이는 널따란 곳...
바위에 누워 얼굴을 가리고 눕는다...
14:50
장터목 도착...
대단하다...
형이나 나나 둘다 기가 막혀 웃었다...
하동바위길을 여섯시간만에 오르다니...
둘다 감격에 겨워 웃었다...
무적이를 찾았으나 보이질 않는다...
형이 전화를 해보아도 통화가 안된다고 한다...
우선 배고픔을 면해야기에 라면에 햇반을 먹는다...
거시기도 식후경이던가...그러나 장터목 앞뒤로 산안개가 덮혀 밑이 보이질 않는다...
판쵸를 깔고 잠을 청한다...
잠결에 무적이를 찾는 현실형의 목소리가 장터목에 울려퍼지는 소리가 둘려온 것 같기도 하였다...
17:30
무적이는 오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세석으로 향한다...
19:20
촛대봉...
산안개가 가득하다...
서쪽하늘로 구름사이에 해가 잠시 머문다...
그리고 이내 가려지고...
19:30
윗샘과 아랫샘 중간 시멘트 구조물 옆에서 비박...
밥을 먹고 술을 마시려 했지만 다리도 그렇고 술마실 상태가 아닌 듯하다...
서쪽하늘이 점차 어두워오고 있었다. 어둠을 기다린 듯 별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세석평원에도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마지막 햇볕으로 영신봉의 그림자가 사이고 이내 서쪽 촛대봉의 그림자가 달빛에 밀려 평원으로 드리워지고 있었다.
거림골을 타고 온 바람이 평원을 한번 훑고 지날 때마다 철쭉 밭은 거친 몸짓으로 쏴~아 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밤이 깊을 수록 산안개가 슬그머니 촛대봉 능선을 너머 평원에 찾아들고 있었다.
촉촉한 느낌으로 나무들을 너머 바위를 넘어 어느새 평원은 자욱한 안개바다가 되고 있었다.
06:30
기상...
김치가 없다...국거리가 없다...
라면을 끓이고 꽁치를 넣고...간을 맞추기 위해 현실형의 집에서 가져온 고춧잎을 넣고...
그런대로 먹을만 했다...
그때 형이 엽기적인 일을 저지르려고 한다...국속에 옥수수를 넣으려는게 아닌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슬펐을 것이다...
08:20
출발...
영신봉 바위에서 땀을 식힌다...
영신대인 듯한 곳이 아래 보인다...
장이형님의 산행을 떠올리며 둘이 웃었다...
09:30 전후
칠선봉...지나가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긴 휴식을 취한다...
오늘은 날씨가 좋다...
사방의 경치도 좋고...
11:00 전후
선비샘이다...
사람들이 많다...
오렌지를 먹으려는데 옆에서 아저씨가 묻는다
"저기요, 오렌지 하나 팔면 안될까요?"
"이거 파는거 아닌데요"
아저씨의 목소리는 갸날프게 떨고 있었다...
칼로 오렌지의 배를 땄다...
반쪽을 아저씨에게 주고 한쪽을 먹으려는데...
아저씨의 친구인 듯한 분이 저쪽에서 오고 있었다...
그들의 작전은 훌륭했다...
그래서 나머지 반도 줬다...
오이를 먹으려는데 자꾸 옆이 의식되었다...
그래서 오이도 하나 드렸다...
다리 좀 주무르고 다시 출발...
13:00~16:00
벽소령이 보인다...
그리고 처음으로 원추리를 보았다...
장터목에서 세석으로 세석에서 오는 동안 길옆을 보아도 보이지 않던 원추리였다...
녹색 꽃대에 노란 그 꽃잎...
꽃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잘지냈냐고...
나무숲이 끝나고 햇볕이 강하다...
달빛소나타가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보름이다...
벽소령에 도착하니 가제트 형님과 으악새 형님과 젊은 분이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부식을 얻고...
형님들은 떠나고...
둘이서 점심을 해결하고 그늘에 가서 낮잠을 청하고 있을 때...
무적이가 나타났다...
무적이를 본 순간 원추리가 생각났다...녹색 줄기를 따라 노랗고 주황색의 꽃잎을 달고...
무적이의 복장은 원추리꽃 색깔과 같은 색이었다...
무적이는 여섯시쯤 장터목에 도착했단다...30분 차이였다...
칼바위길을 지나쳐 청소년수련원쪽으로 로타리로 간거란다...
장터목에서 고마운 분들을 만났다며 같이 내려오는데...
백무동에서 6시간동안 같이 올랐던 그 사람들이었다...
인사를 다시하고...
그때 현실형이 광야형님을 부른다...
광야형님이었다...그리고 따르라 형님...
그리고...그리고...산처녀님...
어제 벽소령에서 만나기로 했다던 산처녀님이었다...
산처녀님은 중간에 조난(?)도 당해보고 이틀동안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단다...
떠나는 광야형님과 따르라형님이 무적이에게 먹을 것을 많이 주는 것 같다...
인사를 나누고 대피소옆에 자리를 깔고 저녁대신 무적이의 부침개와 소주로 저녁을 해결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벽소령의 밤은 고요하다.그리고 달빛은 차갑다.덕평봉을 뒤덮던 하얀 산안개를 흩어놓으며 소소히 떠오르는 벽소령의 달은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네처럼, 한많은 영혼들처럼 애처롭게까지 보이고 있었다.
보름달.
그것은 지친 영혼들에게 그리고 머나먼 산길을 떠나는 나그네에게는 구원의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하얀 달빛을 받은 나무들은 저마다의 나지막한 숨소리를 뿜어내고 있었다.
달이 산을 넘어 빛을 잃어가자 다시금 산안개가 덕평봉을 휘감으며 뱀처럼 슬글슬금 계곡을 내려왔다.
하늘엔 검은 먹구름이 별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달빛에 빛을 잃고 있다가 달빛이 잦아들어 다시금 빛을 발하려는 별들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별들이 속삭이던 전설의 이야기는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에 잠겨 새벽을 흐르고 있었다.
22:30
몇잔 먹지 않은 술에 머리가 아프다...랜턴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뒷머리가 띵하다...
달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는데 쌍쌍으로 놀러온 친구들이 쑈를 벌이고 있다...
그들을 뒤로하고 절벽으로 향한다...
달이 밝다...
구름 한점이 달빛을 가리는데...그건 분명 용이었다...용모양의 구름...공교롭게도 달이 차지한 곳은 용의 눈부분이었다...
순간 두려움이 생긴다...주위가 사늘한 느낌이다...둘러보려니 겁이난다...그래서 담배를 피웠다...
구름이 지나가고 달은 원래의 달이다...
야간산행을 한 듯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랜턴을 켜서 사람이 있음을 알리고...
23:30
자려고 돌아와 누우려니 현실형이 달구경을 가고 이어 무적이가 달구경을 간다...
그리고 새벽 내내 셋이서 이야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