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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무르익어 가면서 성큼 여름을 당겨 온 듯이 일요 법회가 있던 오늘 서울은. 역대 가장 더운 4월 기온이라 했습니다. 사찰 입구에도 때 이른 듯싶은 라일락이 향기를 풍기며 자태를 뽐내고, 곳곳엔 하얀 조팝꽃, 봄까치꽃, 화사한 영산홍까지 셀 수 없을 만큼의 꽃들이 앞다투어 소담하게 피어났습니다. 봄꽃이 피어나듯이 불광에도 따뜻한 봄의 기운이 가득하길 발원해 봅니다._()_
현관에서부터 주보를 배부하시며 형제들을 반갑게 맞이하시는 17구 봉사팀, 특히 오늘은 영화 '깨진 바루' 측에 도네이션 할 모금함을 만들고 계신 사무국 봉사팀, 오르락내리락 불광 형제들을 보광당으로 안내하는 엘리베이터 봉사팀 들은 오늘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오늘은 즐거운 일요법회의 시작임을 알게 합니다.
동대문구, 중구, 송파 1, 4구에서 떡과 생수 보시하시고 배분해 주십니다. 법당안내팀, 헌다팀. 모든 준비가 완벽합니다.
타종 소리를 듣고, 사회자님이 법회 시작을 알리니 부처님 전에 헌향, 헌다를 올립니다.
여법하게 일요법회를 참석하여 효림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보광당 가득 모여든 불광 바라밀 형제들.
금주의 법문 : 효림 스님(경원사 주지)
금주의 법어 : 경전을 읽고 이해하는 공덕
요즘 봄이 오는가 싶어서 봄을 시작하면 바로 여름으로 넘어간다. 그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 꽃이 피고 이제 봄인가 하고 느끼려고 했더니 어제 오늘의 날씨는 여름 날씨가 돼버렸습니다.그래서 봄의 상실 시대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청법가를 들으면서 제가 앞으로 나오는 걸 깜빡했는데 청법가를 보면 거룩한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셔서 법을 설하옵소서하고 법을 청하는 건데, 우리가 완벽한 인간이 되어서 스님이 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도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으로 스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스님이 되었다고 하는 그 자체만으로 훌륭해진 것이 아니고 스님이 되어서 내 못난 인간이 앞으로 도를 열심히 닦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하는 것이죠. 그런데, 누구나 스님이 되어 가지고 모두 대 아라한이 되어 경지에 도달하고 훌륭해지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오늘날은 법은 쇠퇴하고, 사람들의 근기는 하열해져서 갈수록 스님들이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주 다반사가 되었어요. 그래서 신도들로부터 사자좌에 오르사 거룩한 설법을 해달라고 하는 청을 받을 만큼 우리들이 그런 자격을 갖추었는가? 이런 것을 거듭해서 살펴보고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구한말이라고 하는 우리 역사의 아주 격변기 때 우리 불교사에 혜성처럼 나타나신 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스님이 경허스님이고 그 후에 우리 범어사를 중심으로 흔히 범어문중이라고 하는데 모든 선객들이 경허의 제자로 흡수되는 그런 시점에 경허의 불교하고는 그 특성을 달리하는 한 고승이 나타났어요. 그의 나이는 경허의 제자들하고 비슷합니다. 그 스님이 누구냐? 바로 용성이라고 하는 스님입니다. 이분은 훌륭한 선객이고 경허가 가지고 있지 아니한 새로운 특성을 나타냈어요. 선의 이론적 측면을 분명하게 밝히는 글을 많이 쓰셨고, 구한말의 스님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근대화에 대해서도 굉장히 깊이 고민을 하신 그런 분입니다.
용성스님의 가장 큰 업적은 조선 500년의 배불정책에 의하여 쇠퇴해진 불교계에 율장, 계율정신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계율정신을 부활시킨 것은 다른 어떤 고승과 견주어 봐도 매우 훌륭한 업적입니다. 용성스님은 원래 범어사에 사셨던 스님은 아니고 해인사에 사셨는데 그분의 제자가 동산스님이세요. 용성스님의 계맥을 이은 동산스님이 범어사에서 법석을 열면서 용성문도를 통칭 범어문도라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범어 문중, 동산스님의 문도에서 누가 나왔느냐? 그 대표적인 스님이 성철스님이십니다. 이 외에도 실질적으로 용성스님의 계맥을 이은 여러 스님들이 있습니다. 다 생략하고, 우리 불광법회에서 얘기하고 있는 광덕스님은 포교에 중점을 두고 용성에서 내려오는 근대화하고 현대화하는 불교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못지않게 용성에서 내려와 동산으로 이어지는 그 계맥을 이어 범어문중의 전계화상의 자리에 오르셨다는 점입니다. 계맥을 이은 전계화상이 이제 계를 설하잖아요. 스님들에게 사미계를 설하고 또 구족계, 완벽한 계율을 갖추었다고 해서 구족계라고 합니다. 구족계는 다시 비구 스님들에게 주는 비구계, 비구니 스님들에게는 비구니계, 또 일반 재가불자들에게는 보살계라고 하는 계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를 설할 수 있는 자격, 우리에게 계를 줄 수 있는 자격을 가지는 분을 전계화상이라고 하는데 광덕 스님은 불광사에서 불광법회 법주스님의 역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범어사의 전계화상이셨다는 것을 또한 밝혀 드립니다.
잠시 오늘 역시 젊은 가수 왔으니까 무슨 노래 부를 겁니까? (노래 :사랑은 늘 도망가)
제가 법문을 하기 전에 늘 서두로 게송을 하나 지어 가지고 해설을 해드렸는데, 오늘은 좀 그동안 했던 것 하고는 좀 다릅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게송을 가지고 왔습니다.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한국불교는 포교가 생명입니다. 포교가 생명인데 포교를 한다고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나는 포교를 할 줄은 몰라요. 내가 주지도 몇 군데 해 보고 포교를 해봤는데 내가 주지를 하면은 신도들이 많이 모이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포교를 잘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춰진 사찰에서 주지를 하니까 그렇게 신도가 많이 모였던 것이지 아무 신도도 없는 맨바닥에 가서 신도를 모아서 절을 한번 발전시켜보고 많은 신도들을 모아서 감동을 시켜봐라고 하면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포교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청정성입니다. 승려가 자기의 청정성을 확보해서 그것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격으로 감화를 주어야 되지, 입을 잘 놀려 가지고, 얘기를 잘하고, 감언이설로 해가지고는 제대로 포교가 안 되는 것이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종단에 총무원장도 하고 그랬던 자승이라는 스님이 이제 돌아가셨어요. 그 스님이 돌아가셨는데 그후 몇 개월이 흘렀죠. 나하고도 잘 아는 스님이고 또 인연이 없지도 않아요.그런데, 그 스님이 종단에 안 하는 벼슬이 없더라고요. 한 젊은 스님이 하는 유튜브 같은 데 떠도는 것을 보면 지저분한 내용들이 많더라고요. 좋은 절에 주지도 하고 돈도 많이 생기고 그러면 더욱 분발해서, 아니 확철대오를 하고 위대한 도덕을 갖추는 것까지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남한테 욕을 안 먹는 정도는 품위 유지를 하고 좀 그러지 왜 이렇게 욕을 먹고, 그나마 열심히 하는 스님들이 포교를 좀 해 보려고 하는데 거기에다가 재를 뿌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本來淸淨是佛光(본래청정시불광)이라. 불광이라는 게 뭐냐? 부처님 빛이잖아요. 그 부처님 빛이라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불광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 그것이 청정해지기만 하면 누구나 다 불광이 있어. 환하게 세상을 밝힐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불광이 있는데, 거기 불광은 어디에서 빛나는 거냐 청정한 데서 빛나는 것이다.
光爲衆生是法燈(광위중생시법등)이라. 그 불광, 빛나는 밝은 빛으로 중생을 위하는 것.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주는 것. 이것이 뭐냐, 법등이란 말이에요. 내가 불광법회에 와서 설법을 한다고 흉내를 내는 것이 상당히 오래됐는데 그러면서 계속 내 머릿속에 드는 것이 내가 학자 같으면 광덕의 사상은 이런 거다 하고 긴 논문을 쓰지만, 젊을 때는 저도 논문 많이 써봤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거 잘 안 해요.
나는 시인이니까 간단한 시로 광덕스님의 사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느냐 이것을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효 스님 하면 뭐예요? 화쟁이 원효스님의 사상을 대변한다. 원효스님의 그 위대한 수많은 저술이 있지만 하나로 딱 뭉쳐서 얘기하면 뭐냐 화쟁이다. 우리가 부처님 사상을 한마디로 집약해서 얘기할 때 뭐라 그러냐 대자대비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러면 광덕의 사상은 뭐냐 불광이다. 불광! 광덕스님의 위대한 사상과 철학은 어디로 집약되느냐. 불광이라는 말로 집약되는구나. 불광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 불광을 가지고 중생의 어두운 무명을 밝히자고 하는 거 그게 뭐냐 법등 운동이에요. 법등! 우리가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이 법에 등불을 켜자. 법에 등불을 켜는 게 뭐예요? 불광을 밝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시법등이다.
此光功德是光德(차광공덕시광덕) 그 빛의 공덕을 시광덕! 큰스님 이름이 광덕이잖아요. 내가 지금 광덕, 광덕하니까 큰스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 같지만, 저는 직계 상좌가 아니니까 원효도 원효라고 하고, 서산도 서산 서산 하듯이 동산도 동산 하듯이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그러나, 우리 직계 상좌이시고, 또 법통을 이어야 되는 우리 혜담스님 같은 경우는 光자德자 스님 이렇게 해야 되겠지만. 그런데 그 이름이 광덕이잖아요. 광덕! 빛광자 광덕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은 무엇이냐. 불광의 공덕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광덕이다.
그런데 내가 이 게송을 지어 가지고 친히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요 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절구(絕句)라고 그러잖아요. 시 같은 걸 써놓고 보면 시(詩)가 근사하게 됐네. 절구(絕句)가 하나 있으면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그게 뭐냐.
法燈集處佛光燿(법등집처불광요)라 이게 뭐예요? 법등이 모이는 곳에 불광이 찬란하게 빛난다 이거예요. 이 박수 한번 쳐 주세요.
처음보다는 지금 형제들이 많이 모이고 있는데, 법등이 이렇게 많이 모일수록 불광은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불광이 지금 어려운 국면에 처해 가지고 몇 년이 돼도 쉽게 풀리지 않고 있는데 여기에서 야 내 할 일도 바쁜데 이 참에 이거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지루하고 힘든데 포기해 버리자 이렇게 해 버리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야.
내가 몇 년이나 와서 혜담 스님한테도 만나고 할 때 그리고 회장단이 계실 때, 내가 끊임없이 덕담을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스님이 포기하지 않으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스님께서 중심을 딱 지켜 나가고 계시고, 또 법회장님 중심으로 집행부가 굳건하게 지금 잘 버티고 있잖아요. 여기에 대해서도 한번 박수 한번 치세요.
한국불교를 살릴 수 있는 기틀! 불광이 성공하면, 불광법회가 성공하면 한국불교가 삽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한 사람 개인 개인으로 보면 다 법등이잖아요. 광덕 큰스님이 만들어놓은 이 법등이 불광의 힘이란 말입니다.
법등이 모이는 곳 여기 이 법당이 자꾸 홍보를 해 가지고 여기 앉을 데가 없으면 이런 강단에까지 사람들이 꽉 차서 법회를 할 정도가 되어야 해요. 처음보다는 지금 법당이 많이 차서 고무적입니다. 법등집처불광요라. 법등이 모이는 곳에 불광이 빛난다. 여기서 요자는 빛날 요입니다. 얘기하면서 생각해도 참 멋지네. 보니까. 그러면 이제 또 숨을 한번 돌리는 의미에서 노래 한 곡 또 한 곡 불러보세요.(노래 :거리의 성자)
약속을 한 건 아닌데 하여튼 딱 맞는 노래를 부르니 좋습니다. 이제 금강경 본문을 읽어보기 전에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나 더 얘기를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제가 큰 스님의 직계 상좌도 아니고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존경하는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고 살아계실 때부터도 내가 모시고 가까이서 시봉을 하고 이러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문중 관계이기 때문에 자주 뵙지요. 뵙는데 제 기억에는 이 어른한테 꾸중들은 기억 밖에 없어요. 지금은 좀 많이 고쳐졌습니다만, 젊을 때는 항상 누더기만 입고 다니고 머리를 잘 안 깎는 습성이 있었어요. 머리가 터벅하게 기르고 있는 것을 보면 머리를 왜 안 깎느냐고 막 꾸중하시고, 옷도 좀 자주 빨아 입고 깔끔하게 입고 그러라고 꾸지람을 많이 들었어요. 꾸지람을 하실 때 당신의 가까운 문도이기 때문에 나한테 꾸지람을 하시는 것이지 아무 관계가 없으면 지나가는 스님인 것 같으면 꾸중을 하시겠어요. 내가 늘 그렇게 생각하고 그랬죠.
그런데 왜 이 얘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큰스님으로부터 한발 비껴 서 있으니까 저는 오히려 이 시대에 정말 불광이고 법등이 우리 광덕 큰 스님이시다라는 것을 이런저런 계산하고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얘기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동안에 제가 몇 번 얘기를 했어요. 한국 불교의 희망이다. 광덕스님이야말로 한국 불교의 희망이다. 한 사람의 사상과 철학은 살아 있을 때보다 돌아가시고 나서 그 후손들이 그 사상과 철학을 어떻게 갈고 닦고 계승하느냐 여기에 따라서 성패가 갈라지는 겁니다.
성패라 하면 좀 이상하지만, 육조혜능이라고 하는 저 남방에서 아주 구석진 조계라고 하는 지역 우리가 조계종이잖아요. 조계라는 것은 지명입니다. 그 조계라고 하는 곳에 계시던 스님, 무명 스님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육조단경이라고 하는 이 경전을 편집하고 세상에 알린 그러니까 6조 혜능의 사상을 현창하신 분이 신회라고 하는 스님이에요. 혜능 스님이 제자, 신회라고 하는 스님인데 그 스님이 크게 현창을 했어요. 그런데 그 뒤에는 이제 신회스님 계통에서 계속 큰 인물이 나오지 않고, 남악 회양이라고 하는 스님 밑에서 마조 도일이 나오고 거기서 혜능의 사상을 계승하게 되는 그런 역사적 사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오면 한번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여튼 신회라고 하는 스님에 의해서 육조가 살아있을 때가 아니라 돌아가시고 난 뒤에 중국 문화, 중국 문명을 바꿀 정도로 혜능은 위대한 고승이 됐습니다. 중국의 성자를 꼽으라고 그러면 공자, 노자 이런 사람들을 꼽잖아요. 그런 분들과 다르게 중국에서 불교인으로서 가장 위대한 성자가 누구냐. 혜능인 거예요.
한국 불교 조계종은 한국 스님으로서는 이 도의국사(道義國師)라고 하는 설악산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스님인데 그 스님을 종조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6조 혜능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듯이 광덕의 사상과 철학을 우리가 이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고 현창(顯彰)할 수 있는 사람들은누구냐. 바로 여러분들이고 또 앞에 앉아 계시지만 우리 혜담스님이시다. 상좌들이 많이 있지만 지금 현재 우리 불광법회를 지켜주시는 유일한 분은 혜담스님이잖아요. 여러분들도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 한 집안도 명문 집안이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버지가 죽고 그 밑에 그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받는 종손이 생겨야 되잖아요.
조선이라는 나라는 망해서 조선 왕조는 없어져 버렸어. 그런데 저 하회마을 같은 데 가보면 류성룡이 지역에 건설한 그 왕조는 지금도 전 국민이 가서 관광하고 구경하고 류성룡의 종손이 누구냐, 퇴계 이황의 종손이 누구냐, 이런 것이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의 종손이 얼마 전에 죽었는데 전 세계적인 톱 뉴스로 나갔다는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 보다 외국에서 중국에서 조문을 오고 조사를 보내고 조화를 보내고 그랬다는 기사를 신문에 나온 걸 봤어요.
그렇듯이 광덕 법통을 잇는 스님은 혜담스님입니다. 박수 한번 치세요. 오늘은 자꾸 박수를 많이 치고 그러는데, 이런 얘기를 내가 안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오늘은 금강경 제24 福智無比分(복지무비분)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아주 짧아요. 금강경 17, 18분을 넘어서면 금강경 내용이 아주 짧습니다. 내용이 몇 줄 안 돼요. 제24 복지무비분, 한문으로 된 걸 먼저 한번 읽겠습니다.
須菩提(수보리)야,
若三千大千世界中(약삼천대천세계중)에
所有諸須彌山王(소유제수미산왕)하여
如是等七寶聚(여시등칠보취)로
有人持用布施(유인지용보시)라도
若人以此般若波羅蜜經(약인이차반야바라밀경)으로
乃至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을
受持讀誦(수지독송)하여
爲他人說(위타인설)이면
於前福德(어전복덕)은
百分不及一(백분불급일)이며
百千萬億分(백천만억분)
乃至算數譬喩(내지산수비유)라도
所不能及(소불능급)이라.
이제 한글로 번역한 걸 제가 읽어드릴게요.
수보리야 만약 3천대천세계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산 가운데,
가장 높은 산 수미산, 수미산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경전에 나오는 그 상징적 산입니다.
그런데, 히말라야 산에 가면 수미산이라는 산이 실제로 있다고 합니다. 아주 기묘하게 생겼어요. 그 산이요. 옛날에 어떤 한국의 어떤 시인이 가서 참배를 하고 여행하는 거 방송국에서 방영을 해서 보여주는데 산이 멋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렇게 산이 잘생기니까 산의 명칭이 경전에 나오는 수미산이 됐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히말라야 산처럼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 수미산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히말라야산이잖아요. 그 산만큼 많은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사람들에게 보시를 하면은. 이 소리예요. 어떤 사람이 있어 그 많은 보배를 가지고 보시에 사용하더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반야바라밀경 혹은 사구게 등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며 타인을 위하여 설명을 한다면 앞의 복덕은 100분의 1도 못 미치며 백 천만 억분의 1도 되지 못하고, 그 어떤 숫자로도 비유해도 능히 미치지 못하는 바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
금강경 그것은 누구나 읽으면 되는 것이고, 그거 별거 아닌데 그걸 가지고 그게 수미산만큼 쌓은 보배가 아니라, 돈 100만 원 가져 갈래? 아니면 금강경 가져가서 읽을래? 하면, 금강경은 다른 데 가서도 흔히 구하는 거니까 하고 100만 원 날름 내가 주머니에 집어넣겠다. 이런 게 흔히 듣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이 말의 뜻이 뭐냐 말이에요. 앞에도 계속 이런 말이 나왔었어요. 아침에 보시를 하고 또 점심, 저녁에 또 하고, 하루 세 번씩 그렇게 수많은 억겁을 두고 보시를 한다 할지라도 금강경 사구게 하나를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은 비유가 우리가 상상을 초월하는 좀 과장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우선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 조건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100억 돈을 갖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을 실제 봤어요. 갑자기 코인이 가격이 폭락해 가지고 100억이 몇천만 원으로 돼버렸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얼굴이 사색이 되고 밥맛도 없어지고 살맛도 없어지고, 아이고 내가 100억 자산가처럼 행동했는데 갑자기 그 돈이 그냥 싹 하고 그냥 날아가 버리고 없어졌구나. 주식을 사놨는데 가격이 오를 줄 알고 샀는데 그만 IMF가 와 가지고 주식이 폭락해서 완전히 쫄딱 망했구나.아니 재산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어떤 재산이 그렇지 않은 게 있습니까? 금을 사놓으면 괜찮을 줄 알고, 금을 사놓았는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값이 팍 떨어져 갖고 폭락하고 그러잖아요. 이처럼 허황한 것이 재물이다 이거예요.
그러나 이것으로는 비유가 좀 부족할 것 같지요. 더 구체적인 비유를 하나 들어서 말씀드려볼게요. 해적선이 금은보화를 가득, 어디 가서 훔친 걸 싣고 가다가 난파가 돼갖고 무인도에 가서 딱 정착을 했어. 거기에 타고 있던 사람 다 죽었어요. 근데 한 사람이 딱 살아남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무인도를 벗어날 방법이 없는 거야. 그러면 금은보화를 배 안에 가득 싣고 있는데 그게 어떤 가치를 가지나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 해변가에 굴러다니는 돌조각 하나하나나 배 안에 가득한 금은보화가 전혀 차이가 없는 겁니다. 어릴 때 그 만화책에서 읽었어요. 그런 게 나오더라고 만화책에.
그런 와중에 어떤 꼬마들이 무인도에 왔어요. 그 꼬마들한테 요청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금은보화 다 줄 테니까 우선에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치즈가 있느냐 내 치즈가 먹고 싶은데 치즈 하나하고 금은보화 하나 하고 바꾸겠다. 이러는 거예요. 최종적으로는 애들이 타고 온 배와 금은보화를 모두 바꾸자는 거예요. 그 배 하나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야. 그 많은 금은보화가. 세상에 나왔을 때 금은보화가 의미가 있는 거지 무인도에 있으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게에 금덩어리를 지고 저 끝없는 사막을 여행하고 있는데 목이 타서 지금 죽을 지경이야. 그러면 물 한 잔이 더 중요하지 그 지고 있는 금덩어리가 더 중요하겠어요? 절대 가치가 아니에요. 금은보화라는 것은. 필요할 때는 그게 무한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으나 또한 한순간에 그 가치를 상실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겁니다.
집에 요즘 강아지 하나 키우는 사람들 많잖아요. 그 강아지는 주인이 사랑해 주고 이뻐해 주는 거 그게 더 중요하지. 그 강아지한테 1억짜리 통장 줘봐야 아무 의미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 강아지에게 만약 사람과 같은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을 누가 줄 수 있다고 하면 아 너 금은보화를 가질래, 사람과 같은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그것을 가질래 그러면 그 강아지가 뭘 선택하겠어요? 마찬가지예요.
경전에 그런 비유가 많습니다. 우리가 노예로 사는 거야. 노예로. 학벌이 좋은 사람은 학벌의 노예,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은 지식의 노예,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은 재물의 노예, 참 어릴 때 그렇게 귀엽고 예쁘게 자식 잘 키워놓으면 좋을까 싶어서 자식을 그렇게 정성스레 키워놓고 늙어서 보니까 자식의 노예. 시집보내놓고 여기 보살님들 맨날 늘 노예 노릇하고 살잖아요. 딸이 와서 엄마 나 바빠서 못 하고 있으니까 설거지 좀 해줘. 그러면 달려가서 또 설겆이해줘야 되잖아요. 엄마 왜 김치 안 담아와 그러면 또 김치도 담아서 갖다 줘야 되잖아요. 이래서 이런 노예 저런 노예 평생 노예노릇하고 살잖아요.
얼마 전에 선거가 끝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지지하는 사람이 당선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지지하는 사람이 떨어지고 그래서 섭섭한 사람도 있고 기분이 좋은 사람도 있고 그럴 겁니다마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주인이다 이거예요. 노예가 아니고 더 이상 절대 군주에 소속돼 있는 소유물이 아니예요.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이 주인이고 우리는 종이로소이다. 이게 아닙니다.
불교 사상은 내 자주 하는 말입니다마는 내가 뭐 책을 보면 얼마나 봤으며 또 책을 많이 보는 그런 학문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참선하는 선객이지만 서양 사상 같은 거 읽어보니까 그리스 철학이 유명한 줄 알고 있지만, 소크라테스 또 누구 누구예요 그런 사람들이 사상 읽어보니까 별거 아니야. 불교 사상, 불교 철학에 비하니까 그건 완벽성이 없어요.
플라톤 사상이 굉장하다고 내가 어릴 때 선배들한테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 읽어보니까 껍데기예요. 껍데기. 아니, 우리가 부처님이 되고 안 되고 이런 걸 떠나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 불교보다 더 완벽한 게 어디 있어요?
불교가 사상을 얘기할 때 법수(法數)라 그럽니다. 사성제, 팔정도도 위대하지만은 반야심경에서 보면 우리가 사물을 받아들이는데 육근을 통해서 받아들인다고 해서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 이러잖아요. 이것을 우리가 그냥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고 하지만, 제일 마지막은 식(識)입니다. 식(識). 우리의 알음알이가 우리의 감각 기관,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받아들여져서 알음알이가 형성된다고 하는 이런 논리는 어떤 철학에서도 없어요. 어떤 철학에서도.그런데 그러한 불교 사상과 철학에서 마지막 종점이 뭐예요? 금강경에 와서 너가 개념적으로 너 자신을 형성해 놓고 있는, 나라고 형성하고 있는 나, 그것은 진짜 너가 아니다.
불광법회의 이 밝고 찬란한 불광, 반야지혜! 불광이 뭐예요? 반야(般若)아닙니까? 반야(般若)! 끊임없이 광덕 스님이 강조한 그 반야의 사상으로, 그 반야의 불빛으로 쫙 비춰버리면 내 안에 있는 我慢(아만), 我執(아집) 또는 내가 불교 사상이나 철학을 조금 알았다고 생각하는 법칙 이런 것이 흔적도 없이 싹 사라져버리는 거야.
이게 이게 불교 사상이거든. 그러니까 이게 금은보화에 비할 수 있느냐. 금은보화에. 그래서 우리가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는 인생, 누가 인생이 무엇입니까? 하니까 어두운 밤에 대해를 여행하고 있는 것, 일엽편주를 타고 대해를 여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거기에 나침반 역할을 하고, 하나의 불빛 역할을 하는 것이 뭐예요? 불광이잖아요. 佛光! 그래서 불광은 나침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은보화를 그렇게 많이 쌓아놓고 보시하는 것보다 경전 한 구절을 읽는 게 위대하다. 이 금강경에서 또 자주 얘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위대한 사상이라 그러셨는데 내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믿을까요? 이거 믿겠습니까? 이런단 말이야!
한번 살펴봐요. 불교 이전의 사상과 철학은 무엇으로 돼 있느냐? 구원을 얘기할 때, 누가 너를 구원해 주느냐 절대 전능한 어느 존재가 아니 그게 신이라 해도 좋고, 알라라 해도 좋고 여호와라 해도 좋다 이 말이에요. 그것이 너의 구원을 이룰 거다. 그러면 우리가 제물을 바치고, 고관이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 해서 갖다 바쳤다. 뭐 이런 내용이거든.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면 바치고, 마누라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면 바치고. 그렇게 해서 숭배할 그 사람은 왜 그럽니까? 그 사람이 너를 구원할 거다.
그런데 불교는 어떻게 가르쳐요? 그런 허망한 것, 그런 것 믿지 말아라. 그게 너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합니까? 너를 구원할 사람은 오직 너 자신밖에 없다. 이게 얼마나 무섭고 위대한 사상입니까? 그런데 이걸 가르쳐 주어도, 아 불교는 어려워, 힘들어. 내가 나를 구제한다는데 어떻게 하면 나를 구제할 수 있습니까?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가르쳐 주는 방법이 좀 다르겠지만 누가 나한테 와서 그래. 그러면 내가 나를 어떻게 구제합니까? 그래, 네가 스스로 구원받고 싶으면 너 자신의 삶만이라도 깨끗하게 살아라.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 너를 구제할 사람은 너 자신이다. 이러니까 그걸 다른 사람도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 놀라운 거야. 놀라운 거. 그러면서 다시 하나를 더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집착을 버리는 데, 이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이거 참 아까워서 잘 못 가르쳐주는 건데 오늘 네가 너를 구제하기 위하여서는 너 자신의 집착에서부터 벗어나라. 자식에 대한 집착, 재물에 대한 집착, 오만 집착을 다 갖고 있잖아요.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너는 중요한 게 뭐냐 너 자신에 대한 집착, 그것으로부터 벗어 나면 너는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해방될 것이다.
해방이 뭐냐? 해방. 너 자신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그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아상인 거예요. 무아상! 아상으로부터 벗어나면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 해방이 되는 것이다. 이게 참 아는 사람이 보면 너무 쉽고 막힌 사람을 보면 참 아득하고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이런 가르침을 끝으로 오늘 설법을 마치겠습니다.노래 한 곡 부탁합니다.(노래 : 광덕 스님) (청명거사님 녹취)
오늘도 효림 스님과 법회에 동행하시어 법문 중간중간 노래를 불려주신 가수님들.
♬ 찬탄곡 : 산사의 봄( 반영규 작사, 김수미 작곡) 마하보디 합창단 ♬
댕그랑 풍경을 스치는 바람 남녘의 꽃소식 실어오는가
동자는 뜬구름에 마음을 싣고 양지쪽 진달래는 방긋 움텄네
따르르 목탁소리 메아리 지고 조는 듯 고요한 산사의 봄
후박나무 새순이 성큼 돋았고 요사채 마루에 달빛 노닐 때
가부좌 틀고서 헤는 무량 겁 오고도 안 온 듯 가고도 안 간 듯
따르르 목탁소리 메아리 지고 조는 듯 고요한 산사의 봄
발원문 낭독 : 송파 34구 명등 금강문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법회 후, 다양한 메뉴의 점심 공양을 준비하여 오순도순 둘러앉은 불광 형제들의 정겨운 법등 모임 풍경.
불교 영화를 제작하였으나 홍보비가 부족하여 개봉관을 찾지 못하는 영화 '깨진 바루' 제작진에게 기부할 모금함이 보광당 입구에 마련되었습니다. 불광 형제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 동참하여 200여 만 원이 즉석 모금되어 제작전에게 바로 전달되었습니다. 김행수 감독님께서 감사하다는 답신도 보내주셨습니다. 불광 형제 여러분 감사합니다.
법회를 마치고 바로 대웅전에서 금강경 독송을 이어가고 계신 불광 바라밀 형제들
토요일 오후 보광당 청소 및 좌석 배치해 주시는 청정팀의 노고로 일요법회 준비는 완벽하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도 쉬지않고 조계사, 봉은사에서 1인 시위 기도 정진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토요일, 불광 형제들은 변함없이 시위 정진 중인데 토요법회 법사로 오신 마가스님은 우리가 서 있는 일주문을 외면하고 주차장 쪽으로 일행을 손으로 부추기며 서둘러 들어가시고 계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지난해 일요 법회에 오셔서 혜담 스님께 호법부장하실 때의 위력을 보이시라고 하신 말씀은 올곧게 불광 법회를 지켜가라는 말씀이었을 터인데, 지금 반대되는 일을 하시는 것이 부끄러우신 것인지, 당당하지 못한 것임을 인지하시는 것인지, 마가 스님은 시위대를 피해 성급하게 걸음을 옮기시는 저 모습이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인지 안타까웠습니다.
또 법문 중에는 '오늘은 9시에 불광에 도착했는데 현관에 시위자들이 있어서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무서운 마음이 들었고 보기가 참 힘들었다' 라는 말씀을 하시더니 덧붙여 '지하 4층에 들어와서 마음이 안정되었다.'라고 하시네요.
뒤돌아보니 , 불광사태는 6년이 넘었고 불광 법회에서 시위 정진을 시작한지 만 2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특히 오늘 사 측 법사로 오신 마가 스님의 행보를 뵈니 불광 형제들이 더 위대해 보입니다.
출가승께서도 불과 작년에 하신 약속을 지키지 못하시는데, 2년 이란 긴 시간 동안 불광 정상화를 위한 시위 현장에 참여하시는 불광 형제들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사 측에서는 불광 형제들이 일당 받고 동원되는 시위대라고 한다니, '豚眼見有豚 佛眼見有佛(돈안견유돈 불안견유불)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하신 무학대사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_()_
우 리 는 횃 불 이 다. 스 스 로 타 오 르 며 역 사 를 밝 힌 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감사하는 힘찬 하루를 시작하며
*법등이 모이는 곳에 불광이 찬란하게
빛난다*
*불광법회가 성공하면 한국불교가 삽니다*
효림스님 *감로법문* 감사드립니다.
불광형제분들이 다시 볼수있도록
녹취하신 시위팀장 청명거사님과
일요법회 진행과정을 세밀하게 편집하신
마음님! 애쓰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마음님 화려한 봄꽃으로 불광법회 일지를 시작하셔서 더욱 돋보이고 멋있습니다_()()()_
법문 풀어쓰기를 앱으로 쉽게 해주신 청명팀장님 놀랍도록 훌륭하십니다_()()()_
법의 등불이 모여 세상을 밝히는 불광임을 간절하게 알려주신 효림스님 매번 감사합니다_()()()_
수고많으셨습니다.
본래 청정한 것을 믿고 끊이없이 확인하며,
마음은 항상 스스로 원만히, 밝아서 두루
비추고 있다는 말씀^^
다시 한번 더 마음을 다져 보면서.......
효림스님 감사합니다.^^
항상 1인 시위에 동참 해주시는 형제분님들^^
노고가 많으십니다. 감사에 말씀을
올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
https://band.us/band/87959366/post/2297
"한국불교를 살릴수 있는 깃틀! 불광이 성공하면, 불광법회가 성공하면 한국불교가 삽니다."
효림스님의 불광법회에 대한 격려의 말씀과 금강경을 시대에 맞게 쉽게 법문해주시는 공덕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마음님의 법회일지 편집으로 일요법회가 완성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수희찬탄드립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