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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6 - 도요토미 히데요시 120년 센고쿠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하다!
일본에서 유명한 무장들은 부지기수지만 그중에도 독특한 캐릭터로 유별나게 다른 무장들과는 특이한 무장을
꼽으라면 단연 도요토미 히데요시인데.... 그의 이름만 보아도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를 거쳐 후지와라 히데요시에 마지막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입니다?
아시카가 막부는 1467년 쇼군 후계를 두고 “오닌의난(응인난)“ 으로 교토에서 10년간 시가전을 하지만 승부가
나지않아 논공행상이 없으니, 지방에서 올라온 무장들이 자립해 200개 나라로 갈라져 120년간을 싸우니
센고쿠 시대인데.... 오다 노부나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유년기에 마츠시타 유키츠나 휘하에서 군략과 무예를 배웠으나, 기간이 짧아 교양과 학식이 부족한
편이었지만 처세술과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임기응변은 일본에서 제일가니 경험과 학습을 통해 결점을
개선해 나갔으며 천하인이 되고 타락하기 전에는 쌀 한되 기준을 통일시키는 등 내정에도 유능한 편이었습니다.
군략도 장수가 되고나서 구로다 칸베에 등 측근을 통해 배운 탓인지 병법에 얽메이지 않는 기발함을 보였는
데... 또한 젊은 시절부터 근면 성실함과 능력으로 노부나가의 눈에 띄여 중용받았으며, 노부나가의
행보를 따르면서 자신의 수하들은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인물을 쓰고 아랫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노부나가의 눈에 든 계기는 겨울철 새벽에 주군의 침실 밖에서 주군의 짚신을 가슴에 품고는 체온으로
데웠다는 일화나, 노부나가가 물건을 사오라면 다른 가신들은 10만원을 받아 9만원 짜리 물건을
사오는데, 그는 자기 돈 2만원 보태 12만원 짜리를 사 오니 노부나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극상과 모략에 전쟁이 난무하는 전란의 시대에서 히데요시의 임기응변과 기지는 놀라운 수준이었고,
이는 특히 공성전에 있어서 빛을 발했는데.... 노부나가가 적의 견고한 성을 공격하기 위해
우리편 성을 쌓는데 다른 가신들은 3~ 4개월은 걸린다고 하자 그는 한달만에 쌓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히데요시는 상인들에게 큰 빚을 내어 돈을 쌓아 놓고는 성을 쌓는 돌이나 목재에 철 등 재료를 가져오면 바로 그
자리에서 현금을 지불하니 설사 적의 편 사람이라 해도 정체를 묻지 않았으며 또 성을 쌓는데 구획을 정해
며칠까지 쌓으면 보너스를 더해 현금을 지불하니 돗내기로 인부들이 죽자사자 달려드니 한달 만에 완성했답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볼리비아 포토시 광산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은 광산이 되는 이와미 은광을 손에 넣기
위해 먼저 돗토리성을 공격할 때..... 상인들을 시켜 돗토리성 근방의 쌀을 시세 보다 30%를 더
주고 사들이니 침공을 예상못한 돗토리성에서 비축한 쌀 마저 시중에 내다팔자 이제 군사를 움직입니다.
히데요시는 전투에서 민간인을 공격하거나 살상한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이때는 일부러
민가를 공격해 약탈하고 불을 지르며 반항하는 자는 죽이니 겁에 질린 백성들이
마을을 버리고 돗토리성으로 피신하니 그제서야 성을 포위한 다음 목책으로 요새를 짓습니다.
몇 달간 공격을 하지 않고 포위만 하는데 모리씨가 보내온 원군은 길목을 지키다가 쳐부수니 원군이 올
가망은 없어진 성은 안그래도 쌀을 시중에 팔아버린데다가 농민들마저 들어와 인구가 많아지니
금새 식량이 떨어지고 쥐까지 잡아먹다가 굶어죽어가니..... 몇달 후 전투없이 성의 항복을 받게 됩니다.
야마구치와 히로시마등 6국을 지배하는 모리씨를 치기 위해 출진해서는 중요한 요새인 빗추(효고현) 의
다카마쓰성 (高松城) 을 공격하는데 너무 견고해 난공불락이니 총공격을 하면 병사들이
엄청 죽을 지경이라..... 손자병법에도 적의 견고한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지하책이니 피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성은 반드시 수중에 넣어야 하는지라 성의 주변을 면밀히 정찰하고는 성 주변에 해자로
이용하는 강이 흐르는 것을 보고는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투입해 강의 상류와 하류에
댐을 건설한 다음에 상부 댐을 트떠려 성이 물에 잠기자 배를 타고 성벽을 넘어들어가 공격합니다.
교토에 심어둔 첩자로 부터 아케치 마쓰히데가 모반해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케치가 모리측으로 보낼 전령이 지날 통로를 봉쇄한 다음에 성을 공격하니
마음이 급한 수하들은 그만 적과 휴전한 후에 빨리 교토로 돌아가야 한다고 성화를 부립니다.
히데요시가 말하길 우리가 유리하다는건 적도 아는데 갑자기 우리가 휴전을 제의하면 적은 우리측에 무슨 변고
가 생긴걸로 여겨 알아보려고 혈안이 되면서 버틸것이니 이런 때는 우리측 병사들의 손실을 감내
하고라도 강력히 공격해야 한다며 적에게 항복시 오히려 가혹한 조건을 내거니.... 가신들은 조마조마해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키다씨에게서 양도받았던 히메지성과 주민들에게 돈을 미리 지불하고는 교토까지
연도에 물과 가벼운 음식을 준비하게 해서 병사들이 급속행군이 가능하도록 했으니
아케치씨는 히데요시군이 몇달 후에나 돌아올줄 알았는데... 열흘만에 나타나니 대경실색 합니다.
오다 가문의 주인 자리를 두고 시바타 가쓰이에와 싸운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 (賤ヶ岳の戦い) 에서도
후방인 오가키성에 있던 히데요시는 오이와야마 요새 함락을 듣고 14시에 출발한 히데요시군은 기노모토
까지 산과 구릉을 포함한 52km 를 5시간만에 주파해 적군 앞에 나타나니 적들은 마치 귀신을 보듯 했습니다.
신속한 행군 속도는 연도의 농민들에게 돈을 주고 준비했으니, 주민들로 길잡이를 배치하고 도로에
횃불을 켜두며, 물과 주먹밥등 식사를 배치한 때문이니 전혀 예상치 못한 히데요시군이 출현하자
놀란 사쿠마 모리마사는 한밤중에 퇴각을 개시했지만, 다음날 새벽에 히데요시군에게 따라잡힙니다.
유럽에서는 처칠의 할아버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이 있으니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중 프랑스군과 바이에른 동맹군
6만이 울름에서 반을 위협하자 그는 저지하기 위해 1704년 5월 라인강과 모젤강이 만나는 코블렌츠에 상륙해
남쪽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를 공격할 것 처럼 위장한 후에 전격적으로 동쪽 블렌하임으로 달려갔는데... 신속한
이동을 위해 사람을 풀어 라인강 연변의 마을에 돈을 주고 주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진군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에치젠 (후쿠이현) 의 아사쿠라씨를 치기 위해 1570년에 출진한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매제인 아자이씨가 배신해 포위될 위기에 처해 본대가 퇴각할 때 히데요시는
적군의 추격을 막기위해 후방에 남겨진 "신가리 부대" 로 죽음을 무릅쓰고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아네가와 전투에서 오다군 13단의 진 중에 11단을 쳐부순 이소노 가즈마사를 꾀를 써서 아자이 가문에 역정보를
흘려 투항하도록 만들었고, 오타니성을 함락할 때는 성에 들어가 아자이씨와 담판해 부인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와 세 딸을 성에서 내보내고는 불을 질러 자결하게 만드는 공을 세우는등 꾀와 담력은 무궁무진합니다.
한 수, 한 수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노부나가의 입장에선 충성을 다하는데다가 뛰어난 기책으로 어려운
상황을 타파하는 히데요시를 중용하지 않는게 이상한 일이었으니, 교육을 못 받았음에도 대(大)
다이묘 모리 가문의 주고쿠 방면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것은 히데요시의 전술적 역량이 인정받은 것입니다.
노부나가가 황금 술잔을 우물에 떨어뜨렸을 때 히데요시에게 술잔을 꺼내보라니, 하인들을 시켜
물을 많이 모아온 뒤 그 많은 물을 한꺼번에 때려 부어 충격으로 술잔이 떠오르게
해서 노부나가에게 바쳤다고 하며..... 히데요시는 기지가 뛰어난 외에 처세술도 탁월했습니다.
노부나가가 성(城) 을 하사한다는 영광을 내리자 시기할 가신을 의식해 오다가 제1가신이자 맹장 시바타(柴田)
카츠이에와 책사 니와 (丹羽) 나가히데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두 사람의 성에서 한 글자씩 따서 성(性) 을
기노시타에서 하시바(羽柴) 로 바꾸겠다며 허락해달라고 아부했는데 시기와 질투는 큰 위험이 됨을 알았습니다.
또한 天下人 (천하인) 이 되기 전까지 하층민 출신이라 서민의 입장에서 생각할수 있었으니... 심리를
파악해 매수하여 공작을 벌이거나,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식량을 긁어모아 적의 군량을 줄이는 책략을 쓰는등 여러 방면에서 빛을 볼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오와리국 (尾張国, 나고야) 에서 아시가루 (농민 보급병) 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곤궁하게 보냈으며 양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데, 관백 취임 후에 모친이
주나곤의 딸로 궁정에서 시녀로 일하다거 낙향한 후 자신을 낳았다고 선전한 적은 있습니다.
누나 닛슈니, 이부 동생 히데나가와 아사히히메에 효자라고 알려진 히데요시가 평생 효도한 어머니
오만도코로 (나카) 를 제외하면 친가 친척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명은 고자루(小猿,
새끼 원숭이) 또는 히요시(日吉) 이며 집을 나가면서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로 개명했습니다.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는 영지 야마토국의 이름을 따서 야마토 다이나곤이라 불리며 형의 충실한
동반자요 심복으로 활약한 인물로 그의 이른 죽음이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로 이어
졌으며, 아사히히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정략 결혼해 스루가 마님이라 불렸으나 곧 죽습니다.
오미국 (비와 호수) 을 평정한 뒤에는 노부나가로 부터 치쿠젠노카미 (筑前守) 의 관위를 받으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라고 개명하였다가 태정대신 (太政大臣), 관백(關白) 이 되면서
도요토미 (豐臣) 라는 성을 썼으며.... 후지와라 가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후지와라 라는 성도 있습니다.
겐 지(源氏) 씨족이었던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헤이시 (平氏) 계 임을 자처한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탓에 조선 측 기록에는 '평수길 (平秀吉, 다이라노 히데요시)' 이라고도 하는데
잘못된 것이며, 후지와라씨가 된건 당시 간파쿠 (關白) 는 후지와라 가문에서만 하는게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관례를 중히 여긴 일본인지라 다이묘들은 자기 가문을 겐지 (源) 나 헤이 지(平) 로 칭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가강 (源家康) 으로 불렸으니 이는 일본에서 꽤
중요한 것으로 각 가문에 따라 조정(천황) 에서 수여받을수 있는 직책 또한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가신들에게 물건 구입을 시키면 비싸기만 하고 품질이 낮은걸 가져오기
십상인데 히데요시는 가신들이 주고 산 것보다 좋은 것을 싼 가격으로 구해오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중용했다는데, 서민 출신이라 시중 물가에 정통했던데다가 자기 돈을 보탰던 모양입니다?
1555년에는 하치스카 마사카츠의 가신으로 들어갔다고도 하며, 하룻밤에 성을 만들어내보인 것으로 유명한
스노마타 이치야성 (墨俣一夜城) 일화도 1561년 무렵으로 나오지만 후세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만약 실제로 지었다면 목책을 세운 로마군 숙영지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570년의 가네가사키 전투에서는 급히 퇴각하는 노부나가 후위(신가리) 를 자청해 자살에 가까운 임무를 수행하고
살아나왔고, 1573년 오다니성 전투에 3천 군세를 이끌고 아자이군 격파에 일조한후 아자이 나가마사의 옛 영지
북오미 3개군 18만석을 영지로 받아 다이묘가 되어 나가하마성을 쌓았으며 조정에서 치쿠젠노카미 관위를 받습니다.
오미 (비와 호수) 출신 인재들을 발굴하는데 힘을 쏟았는데 유명한 인물이 이시다 미츠나리니, 히데요시는
천한 출신이라 가신들은 대부분 아내인 코다이인의 친인척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등 오미국 가신과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오와리국 가신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1575년에는 다케다군과 싸운 나가시노 전투에 참가했고, 이듬해에는 상락 (교토 상경) 하는 에치고국
(니가타현) 우에스기 겐신을 막기 위해 시바타 카츠이에와 연합전선을 펼쳤으나
견해 차이로 히데요시가 이탈해 오다 군이 대패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니 데토리가와 전투입니다.
노부나가의 격분을 샀지만..... 용서받고 시키산성의 마츠나가를 공략해 함락했으며, 주고쿠
공략에 참가하여 1579년까지 아카마쓰 (赤松), 마츠바라 (松原), 벳쇼(別所),
고데라 (小寺 : 가신 중에 구로다 요시타카가 있었다), 우키타 (宇喜多) 등을 항복시켰습니다.
빗추(효고현) 다카마쓰성을 포위할때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살해당하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
났는데, 히데요시는 다카마쓰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 한명만 할복하고 더 이상의 진군을 멈추는
내용으로 모리측과 화친하고 황급히 교토로 향했는데, 이를 주고쿠 대회군 (中国大返し) 이라고 합니다.
노부나가의 사망 첩보를 받았지만 눈 앞 다카마쓰성에 모리군이 있으니 히데요시는 교전을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군을 할수도 없는 처지였는데, 전투를 계속하면 마에다나 시바타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될게 분명했고 그렇다고 군을 돌리면 모리군이 추격해와 히데요시를 박살낼게 뻔했습니다.
히데요시는 당황해 어쩔줄 몰랐는데 이때 회군을 진언한 것이 귀모 (鬼謀) 라고도 불리는 구로다 요시타카
(간베에) 였으니, "마침 잘되었군요. 히데요시님에게 천하의 길이 열렸습니다." 라고 말하니 히데요시는
몹시 놀라 물건까지 떨어트릴 정도였고... 구로다의 말에 따랐지만 그 지략을 두려워하여 경계했다고 합니다.
구로다는 히데요시의 최고 참모가 되어 일본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니 그 전공으로 규슈의 부젠을 하사
받고 고쿠라성을 쌓았는데.... 그 아들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임진왜란시 제 3군 대장으로 출진해
황해도에 주둔했으며,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후쿠오카번의 번주가 되어 대대손손 이어집니다.
일본 전투사에 남을 주고쿠 대회군 (中国大返し) 은 6월 6일 오후에 다카마쓰를 출발하여 7일
밤에 히메지성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병장기를 모두
갖춘 대군이 30시간 만에 70km 를 주파했다는 기록만으로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알수 있습니다.
로마군이 가도에서 강행군을 해야 나오는 속도인데, 오랜 전란으로 도로 사정도 좋지 않던 일본의 형편과 나쁜
기후를 감안하면 무시무시할 정도의 피로와 피해를 무릅쓴 강행군으로 츠츠이가 “야마자키”
라는 단편 소설을 썼는데, 초반에는 진지하게 쓰다가 히데요시가 갑자기 전화기를 꺼내
신칸센과 전세 차량으로 이동하니 황당해하는 가신들에게 히데요시가 '설명 따윈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히데요시는 사람을 시켜 병사들이 지날 길목에 마을마다 돈을 줘서 병사들이 도착하면 물과 식사 및
새 신발을 조달받을수 있도록 해둔 뒤에 보급없이 무장을 최소화한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행군해 6월 13일에 교토 근교 야마자키에 도착하여 미츠히데 군과 회전하니 야마자키 전투입니다.
1582년 6월 27일 기요스 회의가 열렸으니 장남 노부타다는 혼노지의 변에서 죽은지라 중신들이 차남
노부카츠와 삼남 노부타카 파로 대립하는데, 히데요시는 장손인 산보시
(오다 히데노부) 를 지지하여 옹립하니 오다 노부타카 및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에게 탄핵장을 받습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양자이자 노부나가의 4남 하시바 히데카츠를 상주로 장례식을 성대히 치러 회피하고
12월에 에치젠(후쿠이현) 의 시바타 카츠이에가 폭설로 군을 움직일수 없는 틈을 타서 기후성의
오다 노부타카를 공격해 화의를 맺었고 이듬해 봄에는 이세의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공격해 항복을 받습니다.
2월 말에 출진한 시바타 카츠이에와 오다 노부타카로 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마에다 토시이에의 배반과
신속한 반격으로 승리해 4월 24일에 시바타 가츠이에와 시즈가타케에서 일전을 벌여
승리하니 가츠이에는 부인 오이치와 함께 성에 불을 질러 자결했고 5월 2일 오다 노부타카가 할복합니다.
오다 노부카츠는 도쿠가와의 편에 섰으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후 영토와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오다
노부타카는 히데요시를 반란을 일으킨 종놈으로 취급하고 대항했으나 패배한게 분했던지
섬뜩한 절명시를 남겼으니, "예로 부터 주인을 치는 곳이로구나. 천벌을 기다려라 하시바 지쿠젠."
과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버지 요시토모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은 곳이니 이를 빗댄
구절이며, 이때 히데요시의 관직이 지쿠젠노카미 였으므로 하시바 지쿠젠
노카미 히데요시 (羽柴 筑前守 秀吉) 라고 했으니 줄여서 하시바 지쿠젠이라 한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1584년에 오다 노부카츠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키이의 사이카슈,
쵸소카베 모토치카 등이 노부카츠측에 가담하니.... 이세의 구키 요시타카 및 오다 노부카네, 미노의 이케다
츠네오키를 포섭해 초반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하구로 및 나가쿠테 등에서 도쿠가와군에 연패 합니다.
히데요시가 전선에 나서자 오다 노부카츠가 도쿠가와와 상의 없이 단독으로 강화에 응하여 전쟁은 종결되었는데,
전투에서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정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 서자 히데요시는 여동생을 아내로 주고 어머니
까지 사실상 인질로 보내주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귀순하고 오다 노부카츠는 소국의 다이묘로 쫓겨납니다.
10월 중순 히데요시는 조정 (천황) 에서 정 5위하 좌근위권소장 (차관급) 에 임명되었고
11월 22일 에는 권대납언(태정관의 차관으로 조선의 도승지격) 으로
임명되니 이로써 관위로도 오다가(家) 필두가 되어 명실공히 히데요시 정권을 수립합니다.
1584년에 오사카성을 쌓았고, 1585년 3월 정이위 내대신에 서임되었으며 3월 21일 도도 타카토라로
키슈를 정벌하게 하여 평정하였으며, 10만 대군을 동원해 시코쿠 섬의
쵸소카베 가문을 정벌하였고, 7월 25일에 쵸소카베로 부터 상락(교토 상경) 을 약속받는 등 평정합니다.
후지와라 씨의 수장인 코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관백 직을 수여받았는데, 율령 외
직위로써, 헤이안시대 대 귀족 후지와라 가문이 섭정(셋쇼) 과 관백(간파쿠) 을 장악한
섭관정치를 벌인 바가 있었지만 이제는 명예직 공가의 직위였으니 한서》(漢書) <곽광전>
(霍光傳) 의 “모든 정사는 곽광에게 거친 뒤에야 천자에게 아뢰었다.” 는 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듬해 1585년에는 관백이 된 뒤 오기마치왕(천황) 으로 부터 씨(氏うじ) 로서 도요토미를, 성 (姓かばね)
으로서 아손 (朝臣あそん) 을 하사받아 도요토미노 아손 (豊朝臣) 을 칭했고 10월 다이묘
끼리의 전투를 금지시켰으며, 12월 25일 태정대신 (太政大臣) 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정 최고위 관직입니다.
과거 일본의 성씨는 씨와 성 두 개가 별개였는데, 본래 씨는 혈통을 나타내는 것이고 성은 작위와 관직을
나타내는 기능을 하였으니..... 이 때 씨를 이름에 쓴 경우 혈족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격조사 노(の) 를 붙여서 읽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올바른 표기는 '도요토미노 히데요시' 입니다.
일본의 직위 체계는 조정의 권위 실추오 무느졌으며 막부가 들어서자 실권은 슈고(지방
수호) 등 무가직에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오면 그것 또한 유명무실에 가까웠고,
다이묘들은 무가직 뿐만 아니라 조정의 관위 또한 뇌물을 주고 얻어내거나 참칭했습니다.
최고직인 관백직은 공가(公家) 에서도 최고 명문 후지와라 씨의 오섭가 끼리 돌아가면서 취임하였는데,
혼노지 사건 직전 조정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정이대장군, 관백, 태정대신 중 원하는 관직을 주겠다고
한 바 있었으나 대답을 듣기 전에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죽었으니 '삼관추임문제' 라 합니다.
히데요시는 무가 출신으로써는 최초로 관백에 취임하였고,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음으로써 오섭가가
아닌 새 가문이 관백에 취임했다는 의의를 갖는데, 일본의 성씨 제도는 우리의 성(姓) 에
해당하는 씨 (氏; 우지) 와 거기서 갈라져 나온 가문을 나타내는 묘지 (苗字 묘자)가 구별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오섭가의 일가인 후지와라씨(本姓, 본성) - 코노에(苗字 묘지) 가의 일원으로 관백에 취임했으나, 일왕
(천황) 으로 부터 도요토미(氏; 우지) 를 하사받음으로써 새가문을 열게된 것으로 기존의 원평등귤 (源平藤橘 ;
미나모토, 타이라, 후지와라, 타치바나 등 4대 씨족) 과 어깨를 견주는 풍신 (豊臣, 도요토미) 씨를 창설한 셈입니다.
'원평등귤' 의 4대 성씨는 성립한지 500년이 넘는 세월 어떤 도전도 받은적이 없는 일본 고유
전통이었기 때문에 파격적인 행동이었는데, 일본을 쥐고 흔들던 최고 권력자
히데요시 조차도 조정의 최고위직인 관백에 오르기까지는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마카와 씨나 다케다 씨 및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는 다이묘 출신이었으니 '원평등귤'
에 혈통을 갖다 붙이기도 쉬웠지만, 출신이 비천한 아시가루 출신의 히데요시는 자신의
성씨를 '원평등귤' 로 날조할수 없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새로운 성씨인 풍신(豊臣) 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거의 모든 라이벌들을 군사력으로 굴복시켰지만 도쿠가와 만큼은 무력이 아닌
외교로 신하로 삼아야만 했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위는 오다
노부나가만 못했던지라 조정에서 관백이나 태정대신을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 생 생을 하면서 관백에 오른 것은 히데요시가 앞으로는 막부(쇼군)가 아닌 조정의 일원으로써 율령체계
에 입각한 통치를 하겠다는 의미였으며, 이후로도 조정의 관직을 무사들에게 수여하고 조정의 실권을
회복시켰으며 정점인 관백직을 도요토미 가가 세습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려는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백 직을 후계자로 내정하였던 처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물려주었고,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사사한 후에도 다른 누구에게도 관백
직을 내리지 않았으니 이는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장성을 기다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 체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가문의 당주가 관백이 된다는 관례가 필요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어렸던지라 관백이 되지 못한채 히데요시가 사망했고,
후견 세력도 마땅치 못하여 정권이 무너지니 이는 히데요시가 스스로 벌인 실책이었습니다.
관백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살려두고 실권을 전부 빼앗으면 후환이 있을지 모르니 중요한 것만 빼앗고 히데요리를
받쳐줄 권력 기반을 만들어 두는게 상책이었지만 히데츠구가 후일 히데요리를 죽이거나 히데츠구가 죽지않는
이상 히데요리가 장성해도 이어받지 못하는등 걸림돌이라 판단한 나머지 히데츠구와 가족들을 전부 죽여버렸습니다.
1600년 동서 18만 대군(전국에서 30만)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로 실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관백 직을 다시 귀족인 후지와라 오섭가에 돌려주었고, 자신은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여
막부를 통한 통치로 돌아갔으며, 관직을 공가(公家)의 것과 무가(武家) 의 것으로 엄격하게 나눕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시대에 히데요시의 이러한 정치체제 구상은 일왕(천황)을 존중한 것으로 높게
평가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개창은 천황을 무시한 것으로 평가
하게 되어 히데요시는 충신으로, 이에야스는 역신으로 평가하여 천황의 권위 강화에 써먹게 됩니다.
이는 메이지 유신 자체가 기존 패권 세력인 도쿠가와 가문을 권력에서 거세해 버리고 조슈번과
사쓰마번등 존황 세력이 정권을 잡는 과정이었기에, 유신 마무리 과정에서 유신의 당위적
명분을 위해 도쿠가와 집안 자체를 무조건 악의적인 권력 집단으로 매도할 필요가 컸기 때문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시 도요토미 가문이 믿을만한 병력은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오타니 요시츠구, 우키타
히데이에 등 소수에 불과했고, 오사카성 전투때는 병력이 늘긴 했지만 에도 막부에 반감이 큰 낭인들을 금은
보화로 고용한 인물들이었고 이외에는 도쿠가와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당하던 가톨릭 신도 일부가 가세한 것입니다.
1587년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으로 규슈를 정벌하여 시마즈 가문을 복속시켰고, 같은 해 교토에
주라쿠다이(聚樂第 취락제)라는 대저택을 건축하여 이듬해 일왕(천황) 을 초청
했으며 칼사냥(刀狩り) 및 해적 금지령을 내렸으며 규슈에서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1589년에는 측실인 요도도노로 부터 도요토미 츠루마츠(鶴松) 라는 후계자를 얻었으며 도요토미 가문은
탄탄대로의 길을 밟은 것처럼 보이는데, 요도도노(요도기미) 는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의 장녀이니 츠루마츠는 도요토미 가문과 오다 가문의 피를 모두 받은지라 고귀한 신분인 것입니다.
1590년에는 간토 지방의 호조 우지마사를 노렸는데 일왕(천황) 까지 초청했던 취락대에 불참했던 호조
가문을 곱게 보지 않았지만 호조의 오다와라성이나 간토 6주 평원에서 나오는 인구수가 거슬렸던
것인데, 이시다 미츠나리 등 가신들은 전쟁 보다는 설득해 상락(교토 상경)을 시키자는 의견이 강했습니다.
이때는 아들 츠루마츠가 살아있었기에 히데요시는 일단 참고 받아들였고 즉시 상락하라는 사신을
보내니.... 우지마사도 상락을 하되 1590년 봄이나 여름 즈음에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히데요시는 즉각적인 상락을 원했기에 거부했고, 호조 가문 침공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호조는 이전부터 다케다 가문과 누마타 지역을 두고 분쟁하였는데, 다케다 가문 멸문 이후
휘하에 있던 사나다 가문이 차지한 뒤 분쟁지역 중 하나였으며 히데요시가 다이묘들
끼리 전쟁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기에 사나다 가문은 히데요시에게 항전 허락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재판을 열었고 중재 하에 '사나다 가문이 통치하던 누마타 영지의
2/3 를 호조에 넘기고 사나다 가문의 선조 선산이 있다고 주장한
나구루미 지역(누마타 영지의 1/3)은 사나다가 통치한다'는 판결을 내려 중재시킵니다.
그러나 호조 우지마사는 이 판결이 만족스럽지 못했고 나구루미가 누마타 보다 고지대에
있어서 움직임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고 판단하며 도요토미의 중재를 무시하고
병력을 출진시켜 사나다 가의 나구루미를 무단으로 침범하여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취락대에 불참한 호조가 괘씸했고 자신의 중재도 무시하며 나구루미를 침공하여 빼앗음으로써 먹칠을
한만큼 히데요시는 극도로 분노햇으니, 일단 명분을 위해 최후통첩으로 "좋은 말 할때 나구루미
성을 사나다 가문에게 돌려주고 중재안을 따르면서 상락하는 것이 좋을 것." 이라는 사신을 보냅니다.
그러나 호조 가문은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화친에서 항전을 선택하며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자,
히데요시는 호조 정벌을 결정해 복속된 다이묘들에게 병력을 모아 집결하라는 한마디에
무려 22만 병력이 모였고 복속된 가문들이 진군하기 편하도록 2개 방향으로 병력을 나눕니다.
히데요시등 기준 서쪽에 있는 도쿠가와, 모리, 쵸소카베, 호소카와, 시마즈, 구키 등 다이묘들은 간토 평야로
진군해 오다와라성을 포위했고, 간토 평야 북측에 있는 우에스기, 사나다, 다테 마사무네등 다이묘들은
사나다 가문의 영지를 거쳐 간토 평야 북쪽을 침공후 특정 지점에서 갈라져서 총 3방향으로 침공하도록 합니다.
도쿄 서남쪽에 오다와라성은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성이었고 5대 100년을 이어온
호조씨의 오다와라성만 해도 3만 병사가 있었지만 히데요시가 이끄는 군대는
몇 배나 많은 만큼 정면으로는 승산이 없었기에 호조는 철저히 농성전에 들어갑니다.
호조싸는 대군의 식량 문제나 예산 문제로 히데요시가 끌고 온 다이묘들이 내분으로 스스로
파훼되거나 자기 보다 식량이 먼저 떨어져서 후퇴할 것이고 동맹이었던 센다이의
다테 가문이 북쪽의 호조 병력과 함께 도우러 올 것이라는 낙관론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토 평야 북쪽도 우에스기를 주축으로 한 히데요시 침공군에 의해 성들이 함락되고 있었으며,
다테 마사무네는 호조를 지원하기는 커녕 빙빙 원거리를 돌면서 눈치를 보다가 히데요시의
군대가 대군이고 분열의 조짐이 없다고 판단한 후에는 백의를 입고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히데요시는 오사카 남부 무역항, 사카이항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축적된 막대한 금은보화 덕에
3개월간 식량이나 전쟁 비용이 충분한 반면에, 호조는 포위되어 보급이 없었고 식량도 급격한
속도로 줄어들며 원군은 오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고는 호조 우지마사는 3개월 만에 항복합니다.
포위 중에 다테 마사무네등 토호쿠(동북)의 다이묘들도 항복 의사를 표했으므로 1590년 이 시점에서
일본의 통일은 완수되었는데, 히데요시는 도쿠가와를 경계했으니 미카와 지방등을 다스리던
도쿠가와를 간토 6주로 전봉시켜 오사카서 좀 멀리 배치시킴으로써 천하인의 자리를 공고히 합니다.
이에야스의 영지를 곱절로 늘려주니 영전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간토 평야는 곡창지대이긴 하지만
영주민들의 반항적인 기질로 잇키(민중 봉기) 도 많이 일어나던 지역이었으니
이후 히데요시가 이를 빌미로 도쿠가와를 숙청할수도 있으니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겉으로 보기에 영전이라 거부할 명분이 부족하니 어쩔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즉,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간토로 보내 잇키에 시달리며 서서히 힘을 갉아먹거나 여차하면 숙청하겠다는
의도였지만 그러나 히데요시의 이 선택은 도쿠가와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나머지 최악의 오판이
되었으니..... 이에야스는 곧바로 치수 정비 및 영주민들을 달래면서 민심을 사니 잇키를 완전히 잠재웁니다.
임진왜란때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참여하랬지만“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온지 2년 밖에 안되었고 호조 정벌로
수복중이라 병력을 이끌고 영지를 비우면 잇키가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해 곤란합니다”라는 명분으로 거절했고
몇년후에 참여하라고 할려니 세력이 안정되고 커진 바람에 조선에서 공을 세우면 위험하다는 판단에 말도 못합니다.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된후 히데요시가 엇나가지 않게하고 판단을 도와준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병사했고, 같은해 적장자 도요토미 츠루마츠도 3살로 사망하니 너무 슬퍼한 나머지 상투를
칼로 잘라 버렸으며 둘의 사망이라는 충격으로 히데요시가 잔혹하고 의심 많은 성격으로 변하게 됩니다.
1591년에 처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아 관백 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태합 (太閤) 을
칭하여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선언했지만.... 훗날 친 아들이 태어나니 이를 뒤집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