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동행하는 삶(5)
예수님 안에서 죽을 때
롬15:17-18을 읽고 사도 바울이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써 보십시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것을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구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죄사함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란 다음에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내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역사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죽음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이미 죽은 자임을 모르고 자꾸 죽으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아이구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합니다.
그러나 죽으려 한다고 죽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장례식을 치른 자임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고백하며 나아갈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죽음’이 임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1)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임하면 모든 문제가 바뀌고 맙니다.
두려움도, 염려도, 걱정도, 미움, 원망도, 욕심도,
조바심도 다 사라짐을 느낍니다. 그 주체인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혈기, 욕망, 정욕, 이런 것들은 십자가에만 죽습니다.
옛 자아가 죽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면 눈이 뜨입니다. 평안과 감사, 기쁨과 사랑,
믿음이 일어남을 느낍니다. 천국이 보입니다.
영혼구원의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비로소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게 됩니다.
우리도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당신도 한번쯤은 죽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죽어야 합니다. 육에는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이 계속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것을 이용하여 하와를 넘어뜨리고, 다윗을 넘어뜨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면서,
사실은 아브라함이 그 자신을 바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성품, 판단, 꿈을 원하셨습니다.
3일 동안 아브라함은 철저히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지 않고는 모리아 산에 못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죽이지 못합니다.
아니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대한 집착과 자랑,
신뢰가 너무 너무 강합니다.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전혀 없으나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 있지 않나?’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의지하고 높이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길 힘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죽으면 죄를 이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못 이길 죄를 죽으면 이깁니다.
죽으면 역경도 불평도 없습니다.
두려운 사람도 두려운 일도 없습니다.
염려도 걱정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란 나의 의지를 버리고 주님의 의지로 행하고,
나의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감정으로 느끼고,
나의 지식과 경험을 의존하지 않고
매순간 주님께 묻는 자세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갈2:20의 말씀대로 사는 것인
데 이 ‘죽음’은 날마다 누려야 합니다.
롬6:13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는 자기를 자기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소유로 인정하는 자입니다.
<적 용> 1. 당신은 죄와 교만과 성질을 힘들여 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