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화와 한반도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1981년 국립 대만대 유학시절 작성한 중국어 논문(渤海沿岸 早期無字卜骨之硏究)한 편을 꺼냈다. 27년 전에 쓴 사연 많은 논문은 갑골문화와 우리나라 갑골문화의 관계를 처음으로 다룬 것이다. 논문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이 발행하는 ‘고궁계간’(81~82년)에 3회 연재되었다. 대만 국립편역관이 펴낸 갑골학의 교과서인 ‘갑골문과 갑골학’(張秉權·장빙취엔)도 이 교수의 논문을 갑골의 기원을 가장 잘 논증한 논문으로 평가했다.
“그때까지 갑골문화라 함은 은(상)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만 여겼거든요. 내 은사이자 안양 인쉬(은허·殷墟) 유적을 발굴한 스장루(石璋如) 리지(李濟) 선생은 물론, 대륙의 후허우쉬안(胡厚宣) 선생 등도 모두 갑골문화의 원형을 황화 중류와 산둥반도에서 찾았어요.” 하지만 이형구 교수는 달랐다. 갑골문화가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영역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갑골(甲骨)은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귀갑(龜甲·거북의 배 부분)이나 동물의 견갑골(어깨뼈)로 점을 치는 행위(占卜)를 말한다. 즉 거북이나 짐승 뼈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이겨 좌우로 터지는데, 그 터지는 문양(兆紋)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한자의 ‘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또한 발음이 ‘복’(한국발음), 혹은 ‘부(중국 발음)’인 것도 터질 때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복은 왕이 주관했으며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했다. 은말(제을~주왕·BC1101~1046년)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貞자를 보면 맨 위에 卜자가 있고 그 밑에 눈 目자, 맨 밑에 사람 人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점(卜)을 보는(目) 사람(人)이라는 뜻이다.
점을 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그리고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지를 기록한다. 가장 오래된 월식사실을 기록한 은(상)의 무정(武丁·BC 1250~1192년) 때의 갑골을 보면 癸未卜爭貞 旬無禍 三日乙酉夕 月有食 聞 八月(계미일에 정인 쟁이 묻습니다. 왕실에 열흘간 화가 없겠습니까? 3일 뒤인 을유년 저녁에 달이 먹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여덟번째 달에)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점을 친 뒤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책(冊)이다.
은(상)나라 사람들은 하늘신과 조상신, 산천·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을 쳤다. 국가대사에서 통치자의 일상 사생활까지, 예컨대 제사·정벌·천기·화복·전렵(田獵)·질병·생육까지.......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다. 그리고 이 갑골문화야말로 발해문명, 즉 동이족이 창조한 문명의 상징이다. 갑골문을 보면 선왕선고(先王先考), 즉 조상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결국 동방의 예법과 효사상은 발해문명 창조자인 동이가 세운 전통이다.
사실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동이족만의 특징이었다.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이는 신전과 적석총, 제단 등 3위 일체 유적은 바로 하늘신·지모신·조상신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예법의 탄생이자,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상징한다. 그리고 점복신앙과 갑골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형구 교수가 갑골문화의 기원을 발해연안에서 찾은 이유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그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부여·고구려의 점복기사는 삼국지 위지뿐 아니라 후한서와 진서(晋書) 등 중국사서에 차고 넘친다. 신라의 경우엔 아예 왕과 무(巫)가 동일시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 기록을 보면 2대 남해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방언에 이르길 무(巫)라 일컬었고, 세인들이 귀신(조상을 뜻함)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이를 공경하고, 존장자를 칭하여 자충이라 불렀다고 했다.
그런데 ‘차차웅’ 혹은 ‘자충’을 방언으로 ‘무(巫)’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자음으로는 차차웅(츠츠슝)이나 자충(츠충)이 매우 비슷하다. 또 점복의 목적과 결과를 말하는 길흉(吉凶·지슝)과도 유사하다. 길흉의 한자음을 표음해서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하지 않았을까. 그럴듯한 해석이다. 점복신앙의 단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시조설화에서도 엿보인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龜何 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이 교수는 끽(喫)자는 구워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점복에서 불로 지지는 행위를 뜻하는 계(契)자가 와전됐거나 가차(假借)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불변을 뜻하는 계(契)자는 갑골에 새긴 문자 혹은 불로 지져 터진 곳을 뜻하기도 한다.
1962년 시라무룬(西拉木倫) 강 유역인 네이멍구 자치구 바린쭤치(巴林左旗)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갑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갑골 외에도 동이족의 대표 유물인 지(之)자형 빗살무늬 토기가 공반되었다. 연대는 BC 3500~3000년이었다. 이 연대는 중국·대만학계가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2000년)보다 1000년 이르다. 또한 고조선 문화에 해당하는 발해연안의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흔히 발견된다. 츠펑 즈주산(蜘蛛山)·야오왕먀오(藥王廟) 유적, 닝청(寧城) 난산건(南山根) 유적, 베이뱌오펑샤(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물론 이 유적들의 연대는 상나라 초기 갑골이 출토된 유적보다 이르다.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뼈를 사용했다.
갑골문화는 은(상)의 중기~말기, 즉 무정왕~주왕(BC 1250~1046년) 사이에 극성했다. 글자가 있는 갑골, 즉 유자갑골(有字甲骨)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無字甲骨)이었다. 대부분 발해 연안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 갑골의 분포도를 보면 재미있어요. 발해 연안에서 갑골 재료로 주로 쓴 것은 사슴과 양이었는데, 시대가 흐르고, 또한 남으로 내려오면서 소가 많아지거든요. 이것은 시대와 사회가 농경사회로 급속하게 변했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또 하나 발해문명 사람들이 기후가 온화한 중원으로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남천(南遷)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발해 연안에서 태동한 갑골문화가 중원으로만 확산된 게 아니었다. 1959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에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가 81년 처음 논문을 쓸 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갑골문화는 일본 야오이(彌生)시대와 고훈(古墳)시대에도 보이는 현상인데 왜 한반도에는 없을까. 같은 동이족의 발해문명문화권인데도….
그런데 81년 가을 귀국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 교수에게 한 편의 보고서가 전달됐다. 당시 동아대 정중환 교수가 건넨 김해 부원동 유적 보고서였다. 그 보고서에 바로 복골의 존재가 있었다. AD 1~3세기에 한반도에서도 갑골문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다.
이후 봇물이 터졌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등에서 갑골이 속출했다. 수 천 년 전부터 점복과 굿을 좋아했던 사람들. 지금도 20만명에 이르는 무당과, 30만명에 달하는 역술인들이 성업 중인 민족의 전통은 이토록 뿌리 깊은 것이다.
그렇다면 동이족이 한자를 창조했을까. 발해문명 창조자인 은(상) 시대에 갑골문자가 창조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하지만 아직 연산산맥 동쪽이나 한반도에서는 문자가 있는 갑골이 나오지 않았다. 발해문명 창조자들인 동이족이 남으로 내려가 중원문화와 어울려 함께 한자를 창조하지 않았을까….
첫댓글 妙門 선생님 덕분에 갑골문에 대한 의미와 분포등 좋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