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정과 봉암사 조실을 지낸 서암스님은 수좌스님들이 수십년을 꾸준히 참선하는 이유는 한 번 맛본 참선의 경계를 잊지 못하고 다시 회복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전강스님도 득력만 해도 '깨달른 것보다도 더 좋다'고 할 정도로 화두의심으로 도달한 화두정을 강조했다. 깨닫지 못했더라도 참선과정에서 느낀 마음의 평안이 힘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화두정에 머물면 안되고 화두타파하여 확철대오해서 인가받고 광도중생해야한다.
아직 깨닫지는 못했지만 나 자신이 경험한 경계에 대해서 송담스님과 구산스님께 말씀드려서 제대로 했다는 확인을 받았기 때문에 참선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면서 쓰라린 심정으로 소개한다. 왜 쓰라린 심정인가 하면 옛날에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었다는 얘기여서 즉 지금은 없는 옛날 얘기를 하는 것이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아래에 있는 이 사이트 자유게시판에 쓴 나의 참선기 생활불교전법회 | 저의 참선기와 참선에 대한 의문점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Daum 카페 에 상술되어있는 내용중 참선 경계 부분이다.
1. 화두정 체험기
...학과공부를 해도 잠을 자도 걸어다녀도 화두는 산위에서 돌이 굴러내려오듯이 저절로 계속 의심이 더 커지다가 나중에는 돌이 허공에서 낙하하는 것처럼 의심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는 것이 아닌가?
잠에서 깬 후에 '아차, 어서 화두들자, 이 뭐꼬?...'가 아니고 이미 무서운 기세로 화두의심은 자는 동안에도 커지고 그 힘이 더욱 세어지고 있었음을 느꼈다. 수학공부와 영어공부에 집중해서 열심히 해도 그 수학영어공부의 집중 밑에서 화두는 화두대로 더욱 의심이 커지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알아지고 보이고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12월 초에 수학공부를 할 때에 전에는 이렇게 풀까 저렇게 풀까 고민하고 풀이과정도 한 단계씩 차례대로 생각하면서 연습장에 써내려가면서 이러한 과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풀었는데 화두의심속에서의 수학공부는 이러했다. 수학정석과 연습장을 펴놓고 손에 볼 펜을 쥐고 계획대로 2시간 수학공부를 시작하면 전처럼 생각하고 쓰고 하는 나가 안느껴지고 그냥 몰입했다가 몰입에서 나오면 2시간이 지났고 수학공부는 분명히 제대로 연습장에 풀면서 진도가 나가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과목공부인 국어나 영어나 사회, 독일어, 상업공부등은 수학공부에서 처럼 몰입했다가 문득 나오는 것은 아니고 전처럼 일일이 생각하면서 했는데 영어독해공부의 경우 영어사전도 찾고 해석을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과정을 다 느끼면서 공부했다. 하지만 공부하는 생각외의 잡념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고 공부자체에만 집중해서 했다. 완전하게 잡념이 더오르지않았다고 하지않고 거의라고 하는 이유는 완전히 잡념이 안들어왔다는 것은 너무 건방진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의 내 마음은 꿈도 없이 깊은 잠자는 마음, 화두의심하는 마음, 학과공부에 집중하는 마음,학과공부계획을 짜는 등 필요한 생각하는 마음의 네가지로 나눌수 있는데 그 각각의 마음에 그 것외에 다른 생각은 거의 없었다. 수학공부할 때는 수학공부외에 다른 생각이 안 들어왔고 필요한 생각 할 때는 필요한 생각외에 다른 생각이 안들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꿈도 없이 깊은 잠자는 마음과 공부에 집중하는 마음, 필요한 생각하는 그 밑에서 화두의심은 저절로 커지고 있었다. 공부계획이라든지 도시락을 가지러 언제 갈 것인지와 같은 필요한 생각도 전에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이게 낫지 않나’하면서 하나 하나 생각하는 과정을, 내가 알고 인식하면서 했었는데 화두의심이 스스로 커지는 이 경계에서는 내게 필요한 생각을 하자 마자 단계별로 인식하는 과정은 느끼지 못했지만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아, 도시락은 11시 30분에 가지러 가는게 낫겠다.’나 ‘이번 주 공부계획은 이렇게 해야겠구나’라고 답이 덜커덕 나와있는 것이었다. 마치 계산기에 105×38+25÷8을 입력하면 계산과정은 내부 프로그램이 알아서 하고 우리에게는 답만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하나 차례대로 생각하기는 했을 텐데 그 과정을 일일이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원하던 최적의 답이 덜커덕 나와있는 것이었다. 잠은 점점 줄어들었다. 곧 1월 중순경에 본고사 시험을 봐야 했으므로 최대한 시간을 확보하여 공부하기 위해서 한밤중에 졸리다 싶은 느낌이 오면 눕지않고 잠시 책상에 엎드려서 깜빡 자고 일어나서 계속 공부했는데 그래도 하루종일 피곤하지 않고 생생한 정신으로 집중해서 학과공부를 할 수 있었다.
깜빡 잠이 들었을 때에 꿈을 꾼적이 없이 숙면을 취했는데 잠에서 깨어나도 화두의심덩어리 (疑團)는 숙면속에서도 저절로 커지고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의단이 같은 크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산위에서 돌이 가속도가 붙어서 더 빠른 속도와 힘으로 굴러내려오듯 하다가 이 무렵에는 돌이 허공에서 떨어지면서 엄청난 가속도가 더해지는 것처럼 꿈도 없이 깊이 잠든 상태에서도 화두의심은 더 깊어지고 있었음이 느껴졌다. 굳이 숫자로 말하면 잠자기전 화두의심 정도가 100이라면 잠에서 깬 직후의 정도도 그대로 100인 것이 아니고 1000으로 더 힘이 붙었고 깬 직후에도 그 힘(알 수 없는 의심)은 계속해서 더 커지고 있다고 느꼈다. 100에서 1,000으로 늘어난 것은 깬 직후에 갑자기 100에서 1,000으로 급속도로 증가한 것이 아니고 깊은 잠을 자느라 내가 지금 꿈도 없는 숙면속에서 ‘이뭐꼬?’하고 화두의심을 하고 있구나라는 인식은 못했지만 잠자는 그 밑에서 의단은 100-300-500-700-900으로 커지다가 숙면에서 깨어나면서 1000으로 커진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러므로 잠잘 때에도 화두의심은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고 깬 직후에도 계속해서 10,000, 100,000으로 1,000,000의 크기로, 나아가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의심의 크기가 저절로 커졌다. 허공에서 바위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데 어느 정도 지나면 어딘가 바닥에 닿을 수 있을 법한데 계속 닿지를 않고 속도가 무섭게 더 빨라지기만 할 뿐, 즉 의심의 크기가 끝이 없는 듯이 더욱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수학공부를 할 때도 밥먹을 때도 말할 때도 걸을 때도 꿈없이 깊은 잠을 잘 때도 하루 종일 의심은 저절로 커졌다. 의단(疑團)의 바다위에서 수학공부의 파도, 똥누는 파도, 밥먹는 파도, 얘기하는 파도, 꿈도 없이 깊은 잠자는 파도가 치는데 저절로 커지는 의심덩어리위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行住坐臥語默動靜)이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의 새로운 차원을 느꼈고 참선법은 참이었다. 동네길을 걷다가 문득 내가 느끼고 있는 이것이 환상이 아닐까 라고 점검을 했는데 분명히 환상이 아닌 생생한 현실이었다...
마음은 편안하고, 새로운 차원의 마음의 상태를 느끼니 깨달음이 분명히 있다는 확신,어떤 복으로 내가 이 귀한 법을 만났는가 하는 고마움, 기어코 최종 깨달음에 도달해야겠다는 각오, 절대 이 좋다는 경계에 머물면 안되고 더욱 이뭐꼬?를 해야한다는 다짐으로 살았었다. 하지만 깨닫지 못했다. 업으로 인해서... 수좌스님 친구는 그 업이 전생에 내가 살인을 많이 한 업일 거라고 했는데 잘 모르겠다.
아직 화두타파는 못하고 혹시 참선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지나간 얘기를 이렇게 올리고 있다.변진섭 노래에 '홀로 된다는 것'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 중에 '이별은 두렵지 않아, 눈물은 참을 수 있어,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해'가 있는데 그 중에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해' 부분을 '하지만 잊혀진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해'로 개사해서 나 자신이 서글프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다. '잊혀진다는 것'은 화두타파해서 중생제도하겠다는 간절한 삶의 목표가 흐려지고 슬금 슬금 잊혀지는 듯하면서 '어, 내가 참선했었지. 이뭐꼬?를 의심했었지...확철대오하겠다는 염원을 가진 적이 있었어...'라고 지나간 얘기하듯 하는 내가 될까봐 아니, 되어가고 있는 듯 싶어서 슬프다.그래도 참선을 붙잡고 있는 것은 경험한 화두 경계가 있기 때문이고 다행히도 그 경계가 제대로 한 것이라는 확인을 송담스님과 구산스님이 해주었다. 그것이 아직도 이뭐꼬? 이뭐꼬?하게 하는 힘이 된다.
2. 성성적적 (惺惺寂寂) 적적성성 (寂寂 惺惺)에 대해 원불교교무님이 쓰신 글
{정전터치 29} 좌선, 적적성성과 성성적적
선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망념을 쉬고 진성을 길러서 오직 공적 영지(空寂靈知)가 앞에 나타나게 하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수행품 12장) 선 법회에 참가하는 현지인들은 '입정'의 상태에 대해 관심이 많다. 과연 '정(定)에 드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어느 골프선수가 마지막 퍼팅을 하려는 순간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관중들은 걱정을 했지만, 골프선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퍼팅을 성공시켰다. 시합이 끝난 후 기자가 물었다. "마지막 퍼팅 때 비행기 소리가 방해가 안 됐나요?" "예? 저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요." 퍼팅에 고도로 집중했기 때문에 비행기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말하는 입정의 상태라고 볼 수 있을까?
대종사께서는 '적적성성, 성성적적'을 선의 강령으로 잡아주셨다. 정의 상태에서는 고요함과 깨어있음이 100% 공존해야 한다. 교당에서 선을 하다보면 밖에서 차 소리도 들리고, 때로는 전화벨 소리도 들린다. 차 소리나 전화벨 소리가 선에 방해가 된다고 느껴지면 '성성'하지만 '적적'하지 않은 것이고, 차 소리나 전화벨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다면, '적적'하지만, '성성'하지 않은 것이다. 입정상태에서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고요함을 깨지는 않아야 한다.
앞의 예에서, 올바른 입정상태라면 비행기 소리가 뚜렷이 들리지만 그것이 자신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비행기 소리를 못 들었다면 '성성'이 부족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좌선을 오래오래 계속 할수록 물아의 구분과 시간과 처소에 대한 관념이 더 분명해져야 하지 않을까? 연마해보시기 바란다.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는'(무시선법) 경지나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법위등급) 경지가 다 한 가지이지만, 수행에 직접 표준 잡고 나가기에는 '적적성성, 성성적적'이 가장 좋은 것 같다.
불교의 선부터 기독교의 심리치료, 명상치료에 이르기까지 수만 가지 수행 방법들이 세상에 넘쳐나지만 크게는 무기(無記)를 제거하면서 적적성성을 익히는 방법(호흡관, 단전주, 위파사나, 유념공부 등)과 망념을 제거하면서 성성적적을 익히는 방법(염불, 화두선, 무념공부 등) 두 가지로 요약된다.(박성기 교무)
좌선이 가장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초보자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수행자라 할지라도 좌선과 자신에 맞는 동선(태극권처럼 몸을 움직이며 하는 선. 선무나 절 등이 포함된다)을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선을 통한 입정의 체험이 있다면 일원상 진리의 이해가 훨씬 수월해 진다. 좌선도 좋고, 염불이나 태극권, 절, 선무도 좋다. 입정상태를 체험하기에 노력해보자.
<미주서부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