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원 50주년 맞는 뉴욕 원각사
글 편집부
미주에 한인이민자들이 몰려들어 한인사회를 형성하던 초기인 1974년에 미주에서는 시카고, 로스 엔젤레스, 뉴욕시 등 한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에 한국 사찰들이 건립되었다. 시간순으로 보면 시카고 불타사,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뉴욕 원각사이다. 50년 전에 건립된 이 사찰들은 이제 그 지역의 대표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미주에서 가장 많은 한인들이 사는 로스 엔젤레스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던 관음사는 2006년 도안스님 입적 후 후임 주지가 없어서 이제는 로스엔젤레스 불교계에서 그 존재감이 거의 없어진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 3개 사찰의 간략한 연혁과 사진을 2번에 걸쳐 소개한다.
1974-2024, 뉴욕원각사
창립상황:
뉴욕원각사는 법안스님의 미국 입국과 관련이 깊다. 법안스님은 동국대부총장을 하다가 1973년 미국에 입국하였다. 당시 미국에는 1972년에 입국한 숭산스님과 정달스님, 숭산 스님 전에 입국한 고성스님이 있었고, 카나다에는 삼우스님이 있었다. 법안스님이 입국함에 따라 한국스님이 여섯 분이 되었다. 달마사에 한계정 스님은 원래 조계종 중앙 포교사였는데 숭산스님이 달마사로 초청하여 스님이 되었다. 숭산스님은 프로비덴스, 정달스님은 켈리포니아에 있었다. 고성스님은 동부에 있었다.법안스님은 뉴욕의 시라큐스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1974년에 뉴욕 맨하탄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에 어느 보살이 스님을 보고 한국 스님이냐고 물으면서 식당 바닥에 머리를 닿게 절을 하였다. 이 보살님이 스님께 ‘석가 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자고 부탁하였고,
법안스님이 수락하여 ‘불탄절’ 행사를 플러싱 신도 집에서 하였는데 당시에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성공적인 행사를 마치고 난 후에 보살님들은 법안스님에게 뉴욕에 사찰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법안스님은 하바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 객원연구원으로 가려고 계획하였기 때문에 대신 이 신도들에게 숭산스님을 소개해 주었다. 당시에 신도들은 숭산스님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법안스님에게 연락을 받은 숭산스님은 일본에 있는 구윤각 스님을 오게 하여 뉴욕원각사 주지를 하게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구윤각 스님을 원각사 초대 주지로 1974년에 맨하탄에서 42가에 있는 빌딩에서 출발하였다. 당시에 그 사찰에 나갔던 사람들은 별로 없는데 브롱스 거주하는 이상배 거사는 1973년 미국에 와서 그 사찰에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구윤각 스님은 1년도 되지 않아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숭산스님이 2대 주지를 맡았지만 스님은 프로비덴스 홍법원을 비롯하여, 여기 저기 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해야하기 때문에 원각사에 상주하면서 주지를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신자들은 보스톤으로 법안스님을 찾아가 설법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법안스님은 하바드에서 영어공부를 하면서 보스톤에서 뉴욕까지 기차로 오고 가면서 원각사 신도들을 위해 활동하다가, 1975년 하반기에는 아예 원각사로 거처를 옮기고 부주지 직책으로 포교활동을 하면서 뉴욕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하여 뉴욕 원각사 주지 숭산스님, 부주지 법안스님 체
제로 운영하다가 1976년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마치고 숭산스님이 주지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하고 원각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였다.
숭산 스님의 뒤를 이어 법안스님은 1976년 8월에 원각사 3대 주지로 취임하였다. 원각사 창립이 이렇게 법안스님, 숭산스님, 구윤각스님이 얽혀있기 때문에 창건에 대해 숭산스님과 법안스님은 본인들이 창건하였다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한다.
1987년에 발행된 숭산스님의 자서전 성격의 책인 ‘천강에 비친 달’에 보면, “법안스님과 숭산스님이 하바드대학교 영어연구학교에서 함께 영어공부를 하였다. 하바드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여러 사람들이 뉴욕에 절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윤각’이라는 내 상좌를 불러다가 원각사를 만들어 그 상좌에게 맡겼다. 그런데 윤각이가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내가(숭산스님) 맡아가지고, 있다가 법안스님에게 맡겼는데 지금은 잘 운영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숭산스님이 주도적으로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숭산 스님의 이 주장에 대해 법안스님은 필자에게 뉴욕에서 신도들 만난 과정을 설명하면서 “내가 석탄절 행사를 하여 신도들이 모였고, 그 신도들을 숭산스님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절이 시작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윤각스님이 떠나게 되어 내가 보스톤에서 뉴욕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원각사 법회를 하고 1975년부터는 상주하면서 원각사에서 포교활동을 했다. 사람도 내가 모았고, 단체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법안스님이 창건자라고 주장하였다. 뉴욕에 살던 사람들은 ‘뉴욕 원각사’하면 법안스님을 연상하였고 법안스님이 원각사 창건자로 한국일보 등 일간지 신문에는 많이 보도되었다.
법안스님은 서예전시회 통해서 원각사 대웅전 건립 자금 마련.
스님 중에는 서예를 잘 하는 분들이 많다. 미국에서 활동한 스님으로는 법안스님을 필두로 백림사 혜성스님, 필라델피아 법장스님도 서예를 잘하는 스님으로 평가를 받는다. 법안스님은 주말에 원각사에서 서예지도를 오랜 기간 하였다.
뉴욕에 원각사 건물을 마련하기 위한 기금 모금 방법으로 법안스님이 택한 방법은 서예전이었다. 1978년 한국의 신문회관에서 서예전을 필두로 1981년, 1982년 뉴욕에서 서예전을 하였다. 또 1980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예전을 하여 15만 달러를 모아서 필라델피아 원각사 건물을 구입하였다.
이런 전시회 기금과 신도들의 자체 건물을 구입하려는 의지가 합해져 1978년 뉴욕시 퀸즈 잭슨 하이츠로 자체 건물을 구입하여 이전하였다. 그리고 4년 후인 1982년에는 이 건물을 매각한 돈과 서예전 기금으로 모은 돈, 신도들의 헌금으로 다시 맨하탄으로 17가로 이전하였다. 이 시기인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는 당시 대부분 사찰에 신도들이 많이 모여들던 시절이었다.
이 맨하탄 시기에 젊은 수경스님이 법안스님과 혜관스님을 도와 원각사 법회에서 예불을 집행하고 제사 등을 담당하였다. 수덕사 문중의 수경스님은 독경을 잘하였는데 보살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한국으로 돌아간 수경스님은 문규현 신부와 함께 새만금 간척공사를 반대하는 삼보일배, 그리고 불교환경연대를 맡아서 환경운동을 하면서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스님이다.
맨하탄 시기에 법안스님은 초청법회를 자주 하였다. 뉴욕주립대학교 박성배 교수는 매월 한 번씩 정기적으로 나와서 설법을 하였다. 이외에도 뉴욕시립대학교 김영근 교수도 자주 나와 강의를 하였으며, 뉴욕에서 공부하던, 서창원 목사를 비록하여 많은 기독교계 인사들, 콜롬비아대학교를 비롯해 뉴욕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도 많이 초청되어 왔다. 이들은 후에 한국과 미국에서 교수가 된 사람도 많고, 신문사 기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맨하탄 원각사는 불교신자를 비롯하여 뉴욕.뉴저지 지역의 지식인들도 많이 방문하였다.
뉴욕 맨하탄은 뉴욕시 중심이었기 때문에 전철을 이용하여 퀸즈와 브롱스, 브르크린, 스테이트 아일랜드 등 뉴욕시와 뉴저지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왔다. 신도들이 많이 증가함에 따라 신도들의 주차 문제와 부처님 오신 날 등 행사 때는 원각사 법당이 적어 문제가 어려움이 많았다.
법안스님 불교대학과 한의과대학 건립하려고 교외로 이전했으나 병환으로 죄절.
맨하탄에서 포교활동은 주차문제, 장소의 협소함 이런 어려움도 있고, 법안스님은 동국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였고, 미국에서는 뉴욕대학교에서 종교학으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대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중에 법안스님은 맨하탄 건물을 팔아서 그 돈으로 현재 부지를 구입하였다. 그 부지는 미국인이 캠프를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곳에 캠프에 사용하던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오래 되어서 대부분사용할 수 없었다. 법당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 건물 중에 농구장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당시 신도의 아들인 한국인 하바드 대학교 건축학과 교수가 농구장을 살펴보고 수리하여 사용해도 10년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듣고 수리하여 법당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법회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불교대학을 설립 계획을 추진하였다. 법안스님과 더불어 이 계획을 같이하려고 한 사람은 김태신 화백이었다. 김태신 화백은 출가전인 김일엽 스님과 일본 황족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동경제국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원각사에서 법안스님 스승인 관응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일당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일본의 수상을 역임한 사람들 중에는 일당스님의 아버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불교대학 건립 비용은 일당스님이 일본 대기업에서 모금을 할 계획을 하였고, 일당스님과 일당 스님 지인들이 원각사에 자주 방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1988년 법안스님의 병환으로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법안스님의 갑작스런 병환으로 원각사는 동요가 있었지만 후임 주지로 혜관스님을 중심으로 신도들이 힘을 합해 운영되었다. 1991년에는 휘광스님(현뉴욕불광선원 회주)이 원각사에 와서 1천 일 기도를 하면서 원각사 유지에 힘을 보태었다. 그 외에 벽와, 지원, 대법 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원각사에 와서 대중생활을 하였다.
1996년 혜관 스님 입적 후 부터 한동안 어려움도 많았다. 법회 출석 신도가 매우 적었고, 법안스님과 일부 신도들 간에 갈등도 있었지만 법안스님이 후임자로 정우스님을 정하고, 정우스님이 원각사에 본격적으로 운영되면서 봉합되었다. 로스 엔젤레스의 관음사는 도안스님이 후임자를 정하지 못해서 결국은 큰 문제가 되었지만 원각사는 법안스님 생전에 정우스님이 성공적으로 인수를 받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법안스님은 정우스님이 원각사 주지로 취임하고 원각사가 정상화되고 정우스님에 의해 원각사 대작 불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2007년 3월 입적하였다.
혜관 스님 입적 후 2004년 정우스님이 원각사 5대 주지로 취임 이후 원각사 불사는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한국 도심 포교의 대명사로 정우스님은 강남의 구룡사와 일산 여래사를 비롯해서 한국에 건립한 포교당이 20여 곳에 달한다.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였고, 조계종단의 총무부장, 군종특별교구장을 역임하면서 조계종 종단 일도 많이 하였다. 해외불교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다. 아리조나 감로사, 포틀랜드 보광사, 카나다 대각사 등 미주의 여러 사찰들이 운영에 어려움이 있으면 정우스님에게 찾아갔다. 미주뿐만 아니라 인도 보드가야 고려사, 호주 정법사 등도 정우스님이 건립하거나 운영하고 있는 사찰들이다.
정우스님 취임 후 미주한국불교 최대 대작불사 진행 중
2004년 11월 정우스님은 원각사 5대 주지로 취임한 후에 한 일은 먼저 원각사 도량 정비였다. 당시 원각사는 30만평 대지 곳곳에 쓰레기도 많았다. 또 캠프로 사용하던 낡은 건물들과 버린 차도 여기저기에 있었다. 쓰레기와 폐차를 치우고, 낡은 건물들을 철거하거나 보수를 하여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그리고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 행사를 하면서 신자들을 원각사로 다시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진신사리 친견 행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진신사리 탑과 청동대불을 조성하였다. 이어서 한국전통 양식으로 대웅전, 무량수전(납골당), 두 개의 선방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한 채도 건립하기 어려운데 4채를 동시에 건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60년 미주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대규모 불사이다. 코로나 기간 중에 불사가 잠시 중단되었지만 2022년부터는 공사가 다시 재개되었다.
현재 미주한국불교계는 코로나 이후에는 새로운 불사를, 특히 돈이 많이 들어가는 불사는 하는 사찰은 거의 없다. 하지만 원각사는 시간이 다소 지연되기는 했지만 원래 계획대로 불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 불사가 가능한 것은 정우스님 뒤를 이어 2009년 12월 6대 주지로 취임한 지광스님과 정화섭 불사추진 위원장, 조순자 신도회장과 조일환 거사를 비롯한 원각사 이사진과 임원들과 신도들이 정우스님의 원력에 동의하여 일심동체로 함께 노력한 결과이다. 미국에서 한국전통건축 양식으
로 건물을 지으려면 서양 건축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허가를 받는 행정 절차가 느리기도 하지만 매우 까다롭다.
정우스님과 지광스님 그리고 정화섭 불사추진위원장을 비롯한 신도들은 건축에 사용할 나무를 구하는 것부터 가공, 선적, 운반 그리고 건축에 이르기까지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구하기 어려운 800년 이상 된 거대한 나무를 카나다에서 구해서 한국으로 옮겨서 가공하여 다시 미국 동
부인 뉴욕으로 옮겨오는 일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대목장과 함께 오는 여러 목수들과, 단청 조성자 등 수많은 사람들도 한국에서 뉴욕까지 와서 작업을 하였다. 한국에서 건립하는 것 보다 비용이 많이 들수 밖에 없는 불사였다. 정우스님 또한 매년 3-4 차례 방문하면서 한국에서
돈을 모아 불사를 지원하고 이런 과정을 원각사 신자들에 게 설명하면서 불사를 독려하였다. 이 결과 법당 안에 기둥이 없는 일<-> 자형 84평 대웅전은 기둥이 있는 108평 건물보다도 훨씬 넓어 보인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은 정우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2006년과는 전혀 다른 사찰이 되었다. 문화재 급한국전통 사찰 건물 4동이 우뚝 서 있는 원각사는 명실상부하게 미국 속의 대표적인 한국사찰이 될 것이다. 공사가 끝나고, 개방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원각사를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2011년 3월에 대웅전 시삽식을 시작한 이래 10년 넘게 진행된 불사는 이제 마무리 단계에 있다. 2024년 10월에는 조계종 성파 종정을 초청하여 낙성법회를 할 예정이다.
과제
원각사는 30만 평의 대지 속에 4동의 한국전통 건물과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진 큰 사찰이다. 이 건물들은 앞으로 한국의 전통건축을 보려는 사람들, 한국전통문화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을 것이고, 학생들도 단체로 방문할 것이다. 뉴욕. 뉴저지 한국인들이 모여서 하는 동포사회 행사도 할 수가 있다. 하드웨어는 준비가 되었다. 이정도 규모의 한국사찰이 미국에 건립된다는 것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잘 지어진 무량수전의 납골당에는 유골을 모시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큰 사찰이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현재 두 분 스님이 상주하고 있지만 더 많은 스님이 필요하다.
참고로 틱냑한 스님이 건립한 뉴욕, 켈리포니아, 미시시피 세 군데 수도원에는 대략 총 200명의 스님들이 상주한다. 중국 스님 선화선사가 세운 북가주 만불사에는 대략 100명의 스님들이 상주한다. 로스엔젤레스 근교의 서래사는 주변에 중국불교인들이 많이 사는 일종의 사하촌이다. 북가주 만불사가 자리한 곳은 일종의 작은 불교도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찰들처럼 원각사 주변의 몬로 시 등에 한국불교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된다면 좋을 것이다.
젊은 2세들과 미국 현지인들이 찾아올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인 2세와 3세, 미국인들이 원각사를 많이 찾으려면 2세 3세 한국인 출가자가 꼭 필요하다고 본다.
1974년 가을에 뉴욕 맨하탄 42가에서 개원. 초대 주지 구윤각 스님
1976년 8월 뉴욕 원각사 법안스님 주지로 취임.
1978년 9월 23~27일 법안스님 기금 모금 서예전을 한국 신문회관에서 하였다. 법안스님은 참석하지 못함.
1978년 원각사 잭슨하이츠로 건물 구입하여 이전.(33-64 74St. Jackson Hts, NY)
1979년 혜관스님(법안스님 사제스님) 원각사에서 포교활동 시작.
1981년과 82년 뉴욕에서 기금 모금 서예 전시회.
1982년 뉴욕 원각사 맨하탄으로 이전. 130W 17th St. NYC.10011
1986년 8월 29일 뉴욕원각사 맨하탄에서 업스테이트 뉴욕으로 옳김.
1988년 3월 8일 뉴욕원각사 법안스님 고혈압으로 쓰러짐.
1996년 5월 15일 뉴욕 원각사 혜관스님 입적
2004년 11월 28일 정우스님 뉴욕원각사 5대 주지 취임.
2005년 3월 통도사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 법회
2007년 3월 26일 오전 11시 뉴욕 원각사 회주 법안스님 뉴버그 St. Luke’s 병원에서 입적.
2009년 12월 20일 뉴욕 원각사 지광스님 6대 주지 취임.
2010년 9월 청동좌상 대불 점안 회향법회. 9월 12일
2011년 6월 대웅전 기공식.
2015년 10월 25일 대웅전 상량식
2018년 10월 선방 상량식.
2022년 10월 대웅전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삼존불과 문수, 보현, 관음, 대세지 4대 보살을 봉안하여 점안 및 봉불법회를 봉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