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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속으로 내리는 비 /정수경
진동으로 부르르 떠는
전화기 속에 갇힌 참새
날개를 파닥거린다
날개에 부딪히는 액정
부리가 콕콕 쪼을 때마다
투명한 어둠에 금이 간다
금간 틈으로 말소리 새어나온다
말소리에 몇 점 구름이 묻어있다
구름 속에서 빗방울들 두 눈 꼭 감고
몸을 숨기고 있다가, 허공으로
뛰어내린다 비의
가랑이 나뭇가지에 걸린다
걸터앉은 엉덩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푸른 이파리들
이파리들 진저리 치자
빗방울은 번지점프를 한다
별이 와르르 쏟아진다 울리는 벨소리에
폴더가 열리고 말들 날아오른다
날갯짓 사이로 떨어지는
자음 모음들 보랏빛
제비꽃으로 톡톡 피어난다
월간 <우리詩> 6월호
창 밖에 목련이 진다 /정수경
전화 벨소리에 허공이 출렁거린다
머릿속에서 문득
5번 기타 줄이 끊어진다
긴장 다음의 정적은
더 큰 공명
머뭇거리는 사이에
핸드폰 메시지가 뜬다
어릴 적 친구 용수, 대학병원장례식장
발인 수요일 09시
뇌수막염이 삼킨
여섯 살 용수의 척추 뼈는
마당 귀퉁이 휘어진 목련나무처럼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캄캄한 그의 날들은
엄마의 가슴에 하얀 뼈들을 심곤 했다
책보다 어두운 세상을 지켜보던 용수는
10년 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던
화려한 법전을 덮고
모차르트 레퀴엠에 실려 사라져갔다
봄이면, 파리한 손으로 창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 뒷모습
훔쳐보던 그에게
초록빛 커튼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목련꽃은 하르르 떨어지고
연초록 새순에
햇살이 조그맣게 별을 달아준다
월간 <우리詩> 6월호
골절/정수경
깃발이 내려진다
뒷다리의 힘줄이 결승선을 끌어당긴다
안장과 박차가 살을 찢어도
달리기 위해 태어난 생
나에게는 오직 정면의 꿈만이 허락된다
내일도 깃발은 내려질 것이다
은하 쏟아지는 대평원에서
날개 달린 백마가 되고 싶었다
브리스틀 콘 소나무 지나온 바람이 갈기 쓰다듬을 때
안드로메다를 향해 질주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절벽 끝 허공 딛고서라도 꿈을 찾아가는 길
부러진 뒷다리에 주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꽂힌다
다친 힘줄처럼 스크린이 오그라든다
내 눈물은
천산산맥 어디쯤 녹아 흐르는가
카랑카랑한 물소리가 그리운
한때는 양떼들을 거느린 별, 페가수스……
바람을 잡고 일어서는 갈기
간신히 마지막 균형을 잡는다
먼 서쪽 하늘 성단(星團)의 별 하나가
내 눈 속에 날아와 박힌다
서로의 꿈을 읽어내지 못한 채
말을 실은
트럭이가속페달을 밟는다
숨죽이고 있던 말발굽 소리가 지워지고 있다
계간<문학선> 2009년 겨울호 발표
십일월 /정수경
법률사무소 앞 벤치에
십일월 햇살이 주춤거린다
파산선고 받은 은행잎들
벚나무 둥치 돌아 골목 뒤지는 바람에
스산하게 밟히고
저녁이 지상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빌딩 그림자 깊숙이 눌러쓰고
벤치를 지고 있는 사내
세상으로 나가는 모든 페이지가 봉인되었다
주저앉을 듯 구겨진 정강이,
구두 볼에 묻은 막걸리의 흔적
허물어진 계단을 저 혼자 오르고 있다
단풍 드는 벚나무
떨어지는 나뭇잎 자근자근 밟으며 웃는 아이야
함부로 밟지 마라,
깨진 유리창의 칼금으로
비명을 도려내고 있으니
잠든 가방을 추슬러 그가 일어선다
홀쭉한 가방이 바짝 옆구리를 파고든다
긴 그림자를 접어 사라진 골목 어귀
잎 지는 자리마다
꽃눈의 새 눈이 겹쳐진다
계간<문학선>2009년 겨울호 발표
시클라멘/정수경
월요일이면 아파트 입구가 왁자하지요
야채가게 이불가게 젓갈가게
가게 이름 대신 얼굴이 간판으로 걸리고요
뻥튀기가게 맞은편
말수보다 꽃이 많은 난달꽃집,
시클라멘 통통하게 살 오른 꽃망울로
눈을 맞췄지요
장미허브 향기 밀치며 시클라멘 손을 잡고
겨울 햇살 한 삽은 덤이었어요
난달꽃집에서 이사 온 시클라멘
제발 꽃잎에는 물주지 말아주세요 라고
표찰 달고 있는데
어른들은 그런 날 보고 사춘기라고 했어요
사방 문 하나 없는 캄캄한 집이었어요
지나친 관심이 때로는
꽃잎을 떨 굴 수도 있다니까요
빈 그네 흔들며 놀이터가 부르자
눈치 챈 엄마 목소리, 내 어깨를 구겨서
학원버스 속으로 집어넣었어요
표찰 보고도 물주고 싶어 안달이 난 거지요
베란다 창가에 며칠째 혼자였어요
가끔 발소리가 들렸는데요
내가 나의 꽃잎을 세는 밤
눈 위에 떨어진 빨간 꽃 두 송이
난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걸요
세상 문 한 겹 열고 꽃나비 날아올랐지요
<우리시> 2010년 3월호
사춘기 /정수경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아린(芽麟)에 싸여서도
놓치지 않았던 물관의 흐름
꽃을 꿈꾸는 겨울눈
단단한 비늘조각 하나씩 벗을 때마다
씨방이 자란다
찬바람 살갗에 묻는 삼월
꽃대 솟아 오르는 열두 살 딸아이
찰칵, 문 잠그는 소리
산수유 산형꽃차례* 이마가 노랗다
구멍을 내고 들여다볼수록
더 캄캄해지는 방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눈부시다고 했던가
불어터진 오후를 은박지에 싸 내던지고 싶은
솟구치며 꿈틀거리는 꽃눈
아직은 어설픈 봄바람에 물올라
팽팽한 몽우리 툭툭 꽃 터진 자리마다
여물어 가는 수두 붉은 흔적
*산형꽃차례 : 꽃대의 끝에서 많은 꽃이 방사형으로 나와서 끝마디에 하나씩 피는 것.
<우리詩> 2010년 3월호
덴드로비움의 개화 /정수경
그 꽃은 지문을 인식한다
빗장 지른 해거리가 시작되었다
구석으로 밀려난 그 날부터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의 손,
몸뚱어리 스쳐갈 때마다 안으로
안으로 움츠린 물관
갈증의 깊이만큼
더 단단해 지는 꽃대
관심 밖에서 무시로 자라난
슬픔, 꽃이 된다는 것 잠시
잊었을 뿐
바닥에 귀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베란다 유리창 너머 기별 없이 다가와
불 지피는 겨울 햇살,
캄캄하게 닫혔던 그녀
살가운 햇살의 지문 찍히는 곳에서
물살이 인다 출렁인다
가만가만 눈꺼풀 들어올린다
젖은 비명 토하며
분절음이 읽어 내리는 선명한 지문
저리도 붉은 기척
ㅡ 《열린시학》2010년 봄호
*현대시 펼쳐보기 50선 재수록 ㅡ <시향> 2010년 여름호
당신을 위한 코디네이터 /정수경
당신,
프랑수아 1세 목욕하는 걸 훔쳐본 적 있지요
벽화로 그려진 여신의 나체와
은밀한 눈빛 주고받는 그를 보고
전율하는 당신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만 올렸지요
긴 머리 늘어뜨리고 두 손 포갠 채
오백년 넘도록 의자에만 앉아있는 당신
포즈가 지루해요
너무 진부한 어깨 숄
드레스도 무겁고 치렁치렁하고요
모나리자,
당신 내면의 감정은 모래처럼 버석거려요
야누스컷과 오렌지색 머리 염색을 해요
도도한 스모키 눈화장
입술엔 크리스찬디올 34호를 바르자고요
꽃뱀무늬 네일아트
블라우스 단추는 두 개쯤 풀어헤쳐요
12인치 가죽스커트 아래엔 킬힐을 신어보세요
한 번도 돌아보지 못한 배경은
환상적인 디지털 백그라운드를 설정할게요
그동안 웃음 참느라 힘들었죠
배꼽 잡고 얼굴 붉어지도록 웃어봐요
땀나도록 섹시댄스를 추고
장미 꽃빛 와인 한 잔은 어때요
점점 눈빛이 뜨거워지고 있군요
쉿, 발소리가 들리네요 서둘러요
옷을 갈아입고 얼른 검은 가발을 써요
순간이동 스위치를 눌러요
저런, 액자유리 틈에 치맛자락이 끼였어요
프랑수아 1세와 눈이 마주쳐도
시치미 떼고 표정을 지워요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만
입꼬리만 올리세요, 모나리자
격월간 <정신과표현> 2010년 1~2월호
스파이더맨/정수경
9층에서 누군가 거미줄을 내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채 뽑지 못한 내 거미줄은
바지 주머니에 구겨넣는다 사방,
여자들 눈이 중심에 선 호랑거미에게 쏠려있다
3층,
문만 열렸다 닫힌다
절단기의 벼려진 날에서
거두어들이지 못한 다섯 손가락,
문틈에 낀 생각들이 움찔한다
거미줄에 걸려 있던 손가락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7층 보험회사,
아침 조회시간 끊어진 거미줄을 팽팽하게 다시 잇는다
고객의 집에 먹이를 위해 쳐둔
거미줄이 오늘도 한가하다
늘 짧거나 길어서 허공을 치는 거미줄
가방 안에 미끼와 엉켜 모로 누워 있다
눈만 뜨면 거미줄을 치고
잠결에도 거미줄의 거리를 잰다
첨탑을 매수한 호랑거미의 검은 거미줄에 걸려
내 거미줄이 녹아내리기도 했다
벌거벗긴 꿈을 수선해
투명한 거미줄로 첨탑에 내다 걸었다
주택가 연립 담장의 거미줄 확인하는 스파이더맨,
주머니 속 끊어졌던 거미줄에서 신호가 온다
핸드폰 벨이 점점 크게 울린다
<시로 여는 세상> 2010 봄호
고추잠자리 /정수경
안경을 들어올렸다
굴곡의 마디를 새겨 넣은 이마
발설을 숨긴 입술
타협할 줄 모르는 낯선 얼굴이 확 다가온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바이닝족 가면을 빌려 쓰고 꿈꾸는 당신
벽과 벽, 벼랑 끝에서 줄을 탄다
오금저린 허공을 연결하는
숨가쁜 공중제비
등이 갈라지도록 파득파득
날갯짓에 피가 돌 때쯤
베란다 구석에 피우다 만 담배꽁초 수북하다
바람이 앞서 한 모금 빨고 간다
담배 연기와 함께 도막난 꿈들,
베란다로 향하는 당신 어깨가 기울어져 있다
기우뚱 가라앉은 무게가
저리 무겁다니
오래된 습관처럼
오른쪽 다리에 하얀실이 묶여있다
출구 없는 꿈을 찾아
허술한 날개 펴보지만 기울어지는
중심
저 붉어지는 곡예가 맵다
한차례 햇볕에 익은 바람이 지나간다
<시로 여는 세상>2010년 봄호
혼선/정수경
헛바퀴 도는 타이머
꼭 한 눈금씩 비켜간다
말을 송출하지 못하는 사내아이
파장이 입술을 기억하려 하지만
귀먹은 문장들은
서식지를 잃어버린 철새처럼 날아갔다
시스템 오류 발생
데이터 충돌이 일어났다
주파수를 벗어난 음이 나동그라지며
스피커를 찢고, 배고파서 지르는
하울링에 끌려간 국수대접은 동댕이쳐진다
한 번도 말이 되지 못한 소리
65데시벨 고주파로 터져나온다
삼키지 못한 국수 몇 가닥 더듬더듬
마룻바닥을 핥고
몸으로 난타를 치는 아홉 살
빠르게 빠르게 좀더 빠르게
엄마가 잡고 있던 손을 놓친다
가까스로 잡힌 주파수,
혀 밑에서 굴리다 꺼낸
수화기 저 너머 벼랑을 오르는 음성
안.넝..하...세....어
벌어진 이음새를 메트로놈으로 맞혀간다
안단티노 안단테 아다지오
입술의 판독이 숨을 고른다
그 동안 아이에겐 이름 없던 꽃들이 호명된다
칸나 봉숭아 맨드라미
이름을 얻은 꽃,
꽃들이 붉게 붉게 안테나를 잡고 일어선다
계간 <통>2010년 봄호
당신의 올랭피아/정수경
그림이란 범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속임수와 악의와 비행을 저질러야 하는 일이다.
- 에드가 드가
마네, 정중히 양해를 구한다
이제 당신의 올랭피아를 지우려 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당신 눈빛은
예술을 가장한 욕망 아니었는가
당신이 팔레트에 물감을 갤 때
그녀는 발목 부츠 끈을 풀었다
붓을 듬뿍 적신 물감이
수줍은 여성을 조심스럽게 포장해
검은 리본으로 묶고
당신 이름으로 전시되기를 기다렸다
사랑스런 코르티잔 올랭피아,
꽃다발에서 별이 떨어졌다
마네, 당신에게 새로운 전시회 초대장을 보내리라
검은 고양이가 숨긴 발톱으로
밤의 갈기를 젖히고
당신 붉은 눈동자를 그려 넣으리라
당신은 초라한 남성을 하얀 침대 위에 진열하고
붉은 장미를 입에 문
늙은 코르티잔 방문을 기대하시라
새로운 비법을 찾아 나선다는 당신 핑계는
색의 치명적 유혹이었다는 변명을
비평가들로부터 빌려 왔을 뿐,
캔버스에 칠한 검정의 속임수에
스스로 속았다는 것을 아는가
검은 마술은 경건하지도 근엄하지도 않은 주술
내 독설을 새로운 비법으로 삼으라
올랭피아 슬픔이 진초록 커튼으로 흔들리고
부유한 미망인들 은밀한 미소가 건너오는 밤
기다려라, 어떤 색채로도 지울 수 없는
행복한 양식의 검정색 주문을
당신 목에 방울로 달아주리라
<시인시각> 2010년 여름호
고추 모종 시들다/정수경
딱딱한 군용침대 더러운 수건 한 장
열리지 않은 꽃잎 헤집고
벌레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마리아 군도 위안소,
흑백사진으로 일어서다 비틀거린다
더듬이 닿는 곳마다
담장 아래 봉숭아꽃물보다 더
붉은 진물
피기도 전 꺾어진 꽃대는
어룽어룽 화선지에 번져간다
고추밭 고랑 마지막 물기까지 핥고
부실한 지줏대에 기댄 채
마른 입술 터져 피가 흐르는 고추 모종
열네 살 조선의 계집아이
소리 없는 피울음이 까맣게 달려 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위안부 할머니 얘기 듣는 유월.
<시선> 2010년 여름호
달의 파일/정수경
붉은 바늘이 혀에 돋았다
간혹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질식한 말
머리카락은 뿌리를 내려 상처의 변방을 키운다
나무 아래 의자에서 엉킨 생각을 한 올 한 올 푼다
풀려나온 상처들, 경쟁하듯 생각을 뜯어먹는다
의자는 손을 뻗어 나무를 기어오른다
생각의 깊이만큼 의자는 초록을 입는다
어제 떨어진 빗방울은 기억의 모서리에서 빛난다
초록을 빠져나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든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이 빗어 넘긴다
손가락 사이 뿌리 뽑힌 상처의 시간들 줄줄이 딸려 나온다
상처의 시간이 한 장 한 장 나뭇잎을 넘긴다
벌레 먹은 나뭇잎에 가려진
열사흘 감상적인 달이 상처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가지 끝 위태롭게 매달린 수컷 붉은등거미는
종족을 위한 살덩이의 질감에 몰두하다
잠시 후 달의 몸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질문, 꽃 피는 세상 바깥쪽으로 던지는 질문이 점점 붉어진다
질식한 대화 속 나는, 나를 벗어 의자에 앉힌다
혓바늘 돋은 달이 부풀고 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년 7-8월호
부케를 던질 때 /정수경
허공을 바라보는 흑백 프로필
마우스가 불러낸다
과녁 빗나간 화살에 피 흘리며
평생 목이 말랐을 그녀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물주며
목을 축였으리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거세지는 빗방울 소리 들으며
그녀는 영안실로,
나는 결혼식장으로 갔다
페미니스트 깃발로 수의 지어 입은 그녀가
술 취한 조문객들 앞에서 시를 쓰고
뱀사골에서 쓴 편지를
읽어 내리는 동안,
웨딩드레스 입은 나는
장미꽃다발을 높이 던졌다
열두 해 앞서가는 그녀와
나는 쥐띠
정지한 그녀의 이력을
유월의 장미꽃다발이 두드려 깨운다
그날 찢어진 깃발
자판의 자음 모음이 촘촘히 꿰맨다
한 번도 마주 한 적 없는
그녀의 허공이 지워지고 있다
*고정희 시인의 시집 제목
<시선> 2010년 여름호
발아(發芽)를 위하여/정수경
설컹설컹한 잠을 뒤적거리다
동그랗게 어둠을 껴안았어
새벽 세시 아가리 벌린 어둠이 어둠을 삼키고
눈 감을수록 어둠이 환해지는 거였어
돌지 않던 젖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고
젖꼭지가 아기 입을 찾았으나
젖먹이는 없었어
탱탱하게 차오른 젖을 빨아 줄 아비를 찾았으나
아비의 성장기도 벌써 멈춘 뒤
세시 반을 지난 초침이 자꾸 미끄러지기만 하였어
창밖으로 눈물 흘려보내 교신을 청했어
되돌아온 교신 꼬리에는
젖을 빠는 소리
봄밤의 빗방울 듣는 소리가 기록되어 있었어
어둠 속에서
팽팽해진 허공은 젖가슴을 열고
대지는 입 벌려 젖꼭지를 물고 있었어
빗방울을 수유한 대지가
캄캄한 나무 움 밀어 올리며 옹알이를 하였어
더 동그랗게 몸을 말고
어둠의 자궁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지
깊이 들어갈수록 아비를 피워 올리겠는 거라
깨문 입술은 피범벅 꽃을 피우고
내 이파리는 점점 더 파래지고 있었어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년 7~8월호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춤 /정수경
천장에서 디에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
거미처럼 끈적거리는 눈길로
내 운명의 안팎을 드나드는 당신,
당신은 번개가 물어뜯는 심장
붓을 들어 당신을 지울 테야
쇠파이프가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어
수없이 날아오는 배반의 화살
메두사 같은 수천 개의 얼굴, 디에고 리베라,
당신 얼굴을 잘라버리겠어
발치에 떨어진 머리칼은 원숭이 장난감으로 던져주고
코요아칸 푸른 집으로 돌아갈 거야
마그놀리아 가지에 인디오의 노래를 걸어두고
노간주나무 회색 잎사귀 뒤엔 철제다리를 숨기겠어
태양신전 앞에서 집시 축제가 열리는 밤이면
데낄라를 마시며
지상에서 마지막 사랑의 춤을 추겠어
안데스산맥 넘어 온 바람이 빗방울을 털 때
날개 부러진 멧비둘기 울음소리
피곤한 부엉이 석상에 기대겠지
이제 테라코다 목걸이를 걸고
별과 낫, 망치가 그려진 붉은 기를 내 몸에 두를 테야
어둠이 짓밟고 지나간 꽃밭, 현관 아래
당신의 작별 인사가 꽃처럼 피어나기 전에
배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전에
<다층> 2009년 봄호
그리운 사막 /정수경
푸성귀 몇 줌 둘레에 진설하고
속눈썹 긴 꼽추가 아파트 입구에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발길들
낙타 같은 그녀를 힐끗거릴 때마다
종이박스 위에서 푸성귀들은 시들었다
늘 응달인 그녀의 자리를
아파트 불빛이 야금야금 삼키고
산기슭 재개발지구
슬레이트집을 포클레인이 허물고 난 뒤
공원 안 공중전화 부스는
그녀의 새로운 잠자리가 되었고
잠든 그녀의 혹에서 검은 슬픔이 바닥으로 흘렀다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웠을까
지난밤 내린 봄눈에 낙타는 제 혹을 안고
혼자만의 사막을 건너간 모양이었다
군용담요 밖으로 나온
오른손이 꼭 쥔 아라비아숫자
수화기가 건들건들 읽다말다 하는 동안
구청직원이 작성하는
행려병자 처리 서류에 흘려 쓴 글씨가
그녀의 굳은 몸을 손수레에 거두어 싣는다
바람은 뒷짐 지고 딴전을 부린다
세상을 내려놓은 뼈 없는 몸이
흘러가 닿은 사막
여자의 몸에서 발굽 닳은 낙타들이 걸어 나온다
공원 나무들이 푸르르 몸을 털자
그녀가 걸어 나간 세상을
잔설이 낙타를 배웅하는 모래바람처럼 내려덮는다
<다층> 2009년 봄호
일곱 번째 난쟁이/정수경
오랜만에 숲속을 많이 걸었어요
지치고 배가 고프네요
오두막이 보이는군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어 다행입니다
허리를 굽혀 낮은 창문 안의 기척을 살폈어요
아, 식탁 위에 딱딱한 보리빵이 보여요
빵은 딱 두 조각
품위를 지키고 서 있는 붉은 와인 한 잔 천천히 마셔요
방심한 식사는 허리선을 훔칠지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해요
아침마다 거울이 내
브이라인 얼굴과 에스라인 몸매를 비춰주어요
질투가 마녀를 꼬드겨요
꾐에 빠진 욕심이 비만을 불러요
충고를 시작한 거울은 얼굴을 붉히고
코르셋 속으로 구겨 넣어도
욕심을 뿌리치지 못한 옆구리가 거울 밖으로 삐져나가요
화가 난 거울이 바닥으로 뛰어내렸어요
쉿, 바깥이 점점 소란스러워요
일곱 난쟁이 돌아오기 전
핫팬츠를 입고 엣지 있게 청소를 시작해야겠어요
댄스음악 볼륨을 높여주세요, 귀여운
일곱 번째 난쟁이는 시건방춤을 좋아해요
오래 전 동화책을 읽은 사람들은
내가 왕자님을 따라 떠났다고 지레 짐작하겠죠
짐작은 믿을 게 못 되지요
다음 페이지 빼곡한 문장의 숲을 걸어보세요
미혹의 사과를 삼킨 나는 백설공주,
일곱 번째 난쟁이 발그레한
뺨이 내 무릎 베고 잠 청하는 부분에서
가슴 뛰는 소리 콩콩 읽힐 거여요
<시인시각> 2010년여름호
슬픔의 각도 / 정수경
-까미유 끌로델의 초상
관목과 잡초로 둘러싸인 이즐레뜨 성
두렵고 말라붙은 시간들이 당신을 스케치 하고
먼지 쌓인 회전판 위에는
철사로 뼈대를 세워 거푸집을 짓는다
오귀스트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밤은 길었다
손끝으로 더듬어 체온을 느낀다
희미해지는 콧날을 세우고
입술과 귓불을 불러 당신의 흉상을 만든다
사랑은 나를 파괴하는 이글거리는 불꽃
격정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열아홉 살이었다
당신을 조금만 벗어나면
고장난 나침판처럼 흔들렸다
그 길은 때때로 망각의 늪으로 이어져갔고
늪의 끝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은
실핏줄로 흐르던 당신이라는 햇살과 어두움이었다
붓으로 석고액을 바르고 찰흙을 파낸다
돌가루처럼 떨어지는 한숨을
석고 틀 안쪽에 비눗물 대신 바른다
사랑보다 길었던 당신의 그림자가
오직 하나뿐인 나의 바다였을까
바다를 끌어안은 어둠의 깊이는
늘 그렇게 바닥이 없었다
끓는 청동 물로 빈 바다를 채운다
맨발로 오귀스트의 바다를 향해 걸어간
나는 까미유 끌로델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당신의 팔에 엉겨도
젖은 몸속에서는 다시
출렁이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몽드베르그 정신병원 창밖에는
서른세 번째 겨울이
15도쯤 기울어진 내 슬픔을 기다리고 있다
계간 『열린시학』 2010년 봄호 발표
정수경 : 1960년 경북 문경 출생. 2008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비유와 상징'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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