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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수카페]곧은터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凡草
저는 세 아이를 두었는데 79년생 큰 딸, 둘째는 81년생 아들, 막내는 83년생 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낳았다고 후회하는데 젊을 땐 세 아이가 좋을 것 같았습니다.
비록 팔불출이지만 여러분의 자녀나 조카, 이웃 자녀들의 교육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제 큰 딸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1. 삼일절에 낳은 아이 아내가 큰 딸을 낳은 날은 하필 3월1일이었다. 아내가 큰 딸을 임신한 뒤에 진찰을 받아 보니 골반 뼈가 작아서 정상 분만이 어렵겠다고 했다. 첫애를 갖자마자 그런 진단을 들으니 걱정이 되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삼일절 새벽에 아내한테 갑자기 통증이 와서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가니 국경일이라 담당 의사가 없고 당직 의사뿐이라 당직 의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정상 분만으로 애를 낳도록 했다. 아내가 긴 산통 끝에 간신히 애를 낳긴 했는데 아이 머리에 상처가 있어서 혹시나 뇌에 이상이 있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날 아내가 낳은 아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한 동안 큰 화제 거리가 되었다. 아내 이름이 ‘유간숙’이라 얼핏 들으면 ‘유관순’과 비슷해서 ‘삼일절에 유관순 여사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문이 병원 안에 쫙 퍼진 것이었다. 그 바람에 많은 간호사들과 입원 환자들이 아내와 아기를 보러 몰려오기까지 했다. 큰딸 정현이가 크는 동안에 나는 뇌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을까 봐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는데, 다행히 정현이는 별 이상 없이 잘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정현이는 나를 닮아 피부가 검은 편이어서 친구들이 ‘깜상’이라고 별명을 부른 것 말고는 학교 생활에 무난히 적응하였다. 그러나 정현이는 다른 또래 아이들에 비해 나이가 어린 탓인지 이해력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학교 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초등학교 교사라 큰딸이 공부를 좀 잘해주길 바랐는데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아쉬웠다. 큰 애 정현이 밑으로 동생이 두 명이나 더 생겨서 큰 애가 모범을 보여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자꾸만 야단을 치곤했다. 공부란 게 부모가 야단을 친다고 더 잘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서 기운을 다 빼고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우리 집 애들은 늘 뒷전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는 늘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남의 애들만 잘 가르쳐주지 말고 우리 애들도 좀 가르쳐줘요.” “공부는 스스로 해야지. 내가 꼭 가르쳐줘야 하나?” 나는 학교 일로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날이 많아서 우리 애들을 가르쳐 주기가 어려웠고, 아내는 세 아이를 기르느라 힘들다보니 서로 책임을 미루기만 하는 사이에 애들은 자꾸 학년이 올라갔다. 2. 시계추를 닮았네 정현이는 중학교 때는 반에서 석차가 5등에서 10등 사이를 유지하더니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성적이 점점 더 내려갔다. 정현이 성향으로 보면 어문 계열을 선택해야 했는데 남녀 공학 고등학교의 특수성 때문에 내신 성적을 잘 받으려고 자연 계열을 선택해서 애를 먹었다. 정현이는 고등학교 때 50명이 있는 반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성적이 좋을 때는 반에서 20등 정도였고 안 좋을 때는 30등까지 내려갔다. 그 이상 더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 이하로 더 떨어지지도 않아서 나는 이렇게 빈정거렸다. “야, 깜상! 성적이 늘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니 꼭 시계 붕알(추) 닮았다!” 아내는 애 기죽인다며 그런 농담을 하지마라고 했지만 정현이가 성적표를 들고 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정현이의 성적이 늘 중간에 머물러 있었지만 우리는 과외 지도를 시키거나 학원에 보내지는 않았다. 아내는 전업주부라 나 혼자 벌었기 때문에 빤한 교사 봉급으로는 과외를 시킬 만한 여유가 없었는데다 솔직히 학원에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문제를 놓고 아내와 종종 입씨름을 벌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면 학원 많이 보낸다고 공부 잘하는 거 아냐. 공부는 제가 알아서 해야지. 누가 시킨다고 잘하나?” “그런 말 하지 말고 우리 애들도 학원 보내요.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고 아무래도 학원에 더 보낸 애가 잘하겠지요. 혼자 공부하는데 무슨 능률이 오르겠어요?” “이봐. 애를 강제로 때려서 성적이 오른다면 야구 감독집 애가 제일 잘하겠지. 야구 방망이로 막 팰 테니까. 그리고 학원 많이 보내서 공부 잘한다면 학원 원장집 애가 1등을 해야 할 거야. 그러나 공부는 자기 자신이 해야 한다구.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것처럼 공부도 스스로 하지 않으면 개인 과외 선생을 붙인들 무슨 큰 도움이 되겠냐구?” 아내는 내가 벽창호 샌님 같다며 화를 낼 때가 많았다. 우리 부부가 다른 일로는 싸울 일이 없는데 애들 교육 문제에 부딪치면 서로 의견이 달라서 종종 다투었다. “당신은 학교 안에만 있으니 우물 안의 개구리예요. 요즘 남들이 자녀를 얼마나 열심히 가르치는지 알기나 해요? 반상회에 가봐요. 다들 전쟁이라구요. 우리만 고지식하게 학교 공부만 시키지 다른 집 애들은 차에 태워 독선생도 찾아다니고 학원도 빡빡하게 보낸다구요. 하여간 애들이 잘못되면 모 두 당신 탓인 줄 알아요?” “잘못되긴 왜 잘못돼? 착하게 크면 됐지. 꼭 공부 잘 해야 사람 구실을 하는 건가?” 나는 아내가 정현이를 감시할 시간마저 주지 않았다. 등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주말마다 아내를 끌고 산으로 갔다. 정현이가 고3일 때도 우리 부부는 휴일마다 부산 경남북의 여러 산을 누볐다. 심지어는 수능이 코앞에 다가온 휴일에도 애만 달랑 남겨 놓고 산으로 갔다. 남들은 고3이 되면 큰 전쟁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온 집안 식구들이 홍역을 치르는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현이가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돌아오면 일찍 자라고 말한 뒤에 부모가 먼저 자기가 일쑤였고, 휴일에는 산으로 훌쩍 떠나 버리니 공부는 정말 큰딸이 혼자 알아서 해야 했다. 다만, 우리 부부가 한 가지 믿은 구석이 있다면, 정현이가 성적은 비록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한 눈 팔지 않고 꾸준히 공부하는 스타일이라서 답답해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기 딴에는 착실히 공부하는데도 성적이 오르지 않으니 본인도 애가 탈 텐데 뭐라고 더 야단을 칠 수 있겠는가? 태어날 때 뇌를 다쳐 이상이 생겼거나 어릴 때 열 경기를 심하게 한 적이 있는데, 그 후유증 탓이라면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가서 정현이가 수능을 보는 날이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성적이 안 좋은데, 정현이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수능 같은 큰 시험을 치르게 되니 그만 바짝 얼어서 시험 날 몸살이 나고 말았다. “시험지를 받았는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아무 것도 안 보였어요.” 정현이는 시험을 치고 돌아와서 펑펑 울었다. 나는 괜찮다며 애를 다독거려주었지만 가슴이 답답해졌다. 우리가 그 동안에 애를 혼자 너무 방치해 놓은 건 아닐까? 아내라도 집에 남겨두어서 애를 돌봐주어야 했을까……. 뒤늦게 이런 저런 상념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3. 오라는 데가 없어 예상한 대로 수능 성적은 최악으로 나왔다. 학교에서 몇 번 본 모의고사 성적보다도 훨씬 못한 점수였다. 그 점수로는 갈만한 4년제 대학이 없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세 군데 대학에 지원을 했는데 결과는 모두 불합격이었다. 그 어느 대학에서도 우리 애를 받아주지 않아서 참 서글펐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재수를 시키느냐 아니면 전문대학에 보내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정현이는 재수를 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전문대를 권했다. 그 악몽과도 같은 고3 생활을 일 년 더 연장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정현이는 전문대학 중에서도 자기 적성에 맞는 ‘임상병리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그 학과는 워낙 인기가 좋아서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다시 지원할 정도였다. 그러니 정현이 점수로는 어림도 없어서 거기는 아예 넣지도 못하고 지금은 가톨릭대학으로 바뀐 ‘지산 전문대학’의 ‘의무행정학과’에 지원서를 넣었다. 나는 그런 이름의 학과가 있는 줄조차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를 보니 정현이는 합격은커녕 후보 중에서도 저 아래 쪽에 있어서 도저히 합격할 가능성이 없었다. 우리는 낙담을 하고 할 수 없이 재수 시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후보자 명단의 앞쪽에 있던 그 많은 지원자들이 어디론가 다 빠져 나갔는지 2월 26일 밤늦게 집으로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날 밤 전화 내용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여보세요? 거기 김정현 학생 집이죠? 여긴 지산전문대학입니다. 김정현 학생이 의무행정학과에 합격이 되었으니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등록을 하시려면 내일 오전 중으로 등록 절차를 밟아주세요!” 그 전화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에게 천당으로 오라고 말하는 구원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우리 부부는 딸에게 전문대학조차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날 아침 일찍 학교로 달려가서 입학 수속 절차를 밟았다.
4. 꼴찌로 입학했지만 우리에게 이름조차 생소했던 ‘의무행정학과’는 알고 보니 병원 원무과에 근무할 인력을 양성하는 학과였다. 정현이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러 떠나기 하루 전에 등록을 했으니 그 학과에서 꼴찌로 입학한 셈이었다. 전문대학조차 가까스로 들어간 정현이는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4년제 대학에 들어갔는데 자기 혼자만 외로운 섬에 뚝 떨어지듯이 전문대학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나는 큰딸이 실의에 빠지지 말고 새로운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가도록 도와달라고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정현이가 대학 생활을 시작한 뒤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른 학생들은 지옥 같은 입시 공부에서 벗어났다고 미팅을 하거나 동아리 모임에 나가는 등 놀기에 바빴는데, 정현이는 마치 고3 수험생처럼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런 행동은 아마 추락할 대로 추락한 자신의 자존심을 대학에서라도 만회하기 위한 보상심리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겠다. “얘,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니? 좀 쉬어가면서 하거라. 넌 미팅도 안 하니?” 내가 적당히 하라고 말렸지만, 정현이는 새로 접한 대학 공부가 재미있는지 눈만 뜨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어려운 공부도 자꾸 하다 보면 슬슬 재미가 붙나보다. 정현이는 단순히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공부하더니 나중에는 공부 그 자체에 재미를 느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 정현이는 2학기에 장학생으로 뽑혀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기에 이르렀다. “깜상! 정말 장하다! 네가 장학생이 되다니? 꿈만 같구나!” 나는 정현이가 장학생으로 결정되었다는 통지서를 받던 날, 정현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가족 파티를 열었다. 정현이가 학교에 들어간 뒤로 공부를 잘했다고 칭찬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게다. 정현이도 그 날만은 가족들이 깜상이라고 불러도 그리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늘 평범한 아이로 살아온 정현이가 대학교에서 장학생이 되고 가족들에게 칭찬 받으니 점점 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한 마디로 정현이의 인생을 확 바꾸어준 계기는 4년제 대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전문대학에 보낸 것이었다. 우리 속담에 ‘소꼬리보다는 닭 머리가 낫다.’는 말이 있는데 정현이의 경우에는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한 번 장학생으로 뽑혀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뒤부터는 공부에 재미를 붙여 계속 열심히 공부했다. 우리는 이제 정현이에게 공부만 하지 말고 놀기도 좀 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한 번 붙기가 어렵지 활활 타오른 향학열은 쉽게 꺼지지 않아서 전문대학 2년을 내리 장학생으로 다녔다. 정현이는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병원 원무과에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자리가 나지 않으니 집에서 놀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당장 한 푼이라도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는데 정현이의 긴 인생으로 보면 오히려 그게 더 잘 된 일이었다. 정현이는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1년 반을 놀다가 공부를 더 계속하고 싶어서 경성대학 생물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그 대학은 정현이가 수능을 보고 지원했다가 떨어진 곳이었다. 그랬는데도 뒤늦게 편입한 정현이가 이미 다니고 있던 학생들을 제치고 거기서도 장학생이 되었다. 나는 정현이가 전문대학에서나 조금 인정을 받은 줄 알았는데 4년제 대학에 가서도 장학생이 되는 걸 보고 비로소 공부하는 법을 제대로 알았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다.
5. 코 큰 남자를 따라 그런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정현이가 학과 공부 못지않게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해왔다는 사실이다. 내가 어쩌다 정현이 방을 들여다보면 책상 위에는 늘 카세트 녹음기와 영어 테이프가 놓여져 있었다. 난 그걸 보고서도 대학 공부를 하려면 영어 공부가 필수적인가 보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언젠가 한 번은 정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빠, 나 이 다음에 미국으로 유학갈래요!” 나는 정현이가 뜬금없이 ‘유학’이라는 말을 꺼내자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다. “뭐, 네가 유학을 가겠다고? 아유, 우리 형편에 말이나 되는 소리냐? 허황된 생각 하지 말고 대학 졸업하거든 적당한 일자리나 찾아봐라. 그리고 괜찮은 신랑감 만나 잘 살면 행복이지 그 먼 미국까지 가서 뭘 하겠다는 거냐?” 우리 부부가 유학이라는 말조차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하자, 그 뒤부터 정현이는 그 꿈을 마음속에서만 조용히 키워 나갔다. 원래 말 수가 적은 아이라 평소에 부모하고도 별로 대화가 없는 편이었다. 내가 대화를 해보려고 말을 건네도 무뚝뚝하게 한 두 마디 겨우 대답만 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나는 정현이가 유학가려는 꿈을 완전히 버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정현이는 혼자 테이프를 들으며 영어를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런 한 편, 영어 공부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외국인과 펜팔을 하기도 했고 직접 외국인을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인터넷 동호회에 가입하여 모임에 나가기도 했다. 나는 정현이가 가끔 외국인을 만나러 간다고 해도 단순히 영어 회화를 하러 가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정현이가 영어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는 미국 남자를 집으로 데려와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제야 정현이가 그 남자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너, 그 남자와 사귀고 있니?” “그냥 친구예요.” “사실대로 말해. 어느 정도 깊게 사귀냐구?” “아직은 친구 이상은 아니에요.” 딸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태까지 아무나 척척 사귀는 타입이 아니었다. 일단 미국 남자를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허락했다. 집으로 놀러 온 미국 남자를 보니 여느 미국인과는 달리 착하게 보였고 어딘지 모르게 호감이 갔다. 찢어진 청바지에 허름한 점퍼를 입고 온 거 말고는 인상이 괜찮았다. 그 뒤로도 미국인 ‘기빈스 쏠’은 몇 번 더 우리 집에 놀러왔다. 나는 딸에게 결혼을 전제로 사귀지 말고 뒤에 가서 후회하지 않도록 처신을 잘하라고 당부했다. 정현이와 쏠이 만난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쏠이 한국에서의 영어 강사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쏠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에 와서 영어 학원 강사 노릇을 했는데, 계약 기간이 끝나 미국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쏠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정현이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어렵게 내비쳤다. 딸도 어느 정도는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딸이 국제결혼을 하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와 여러 날을 두고 이 문제를 의논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인터넷과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1일 생활권의 지구촌이 된 마당에 외국인과의 결혼을 무작정 반대할 수는 없지만, 쏠이 정현이보다 6살이나 많다는 점과 쏠의 부모님이 이혼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쏠과 결혼을 하면 소중하게 키운 딸 하나를 잃는 셈이 되는데……. 정현이는 처음부터 쏠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2년간 사귀면서 쏠의 무던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또 자기를 끔찍이 위해주는 자상함에 마음이 끌렸다고도 했다. 그리고 쏠과 결혼을 하게 되면 미국 유학의 길이 저절로 열리게 된다는 점도 마음을 굳히게 된 계기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쏠을 불러서 형사가 취조하듯이 여러 가지 것을 물어보았다. 물론 통역은 딸이 맡았고. -우리 딸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겠나?- -미국 사람들은 이혼을 밥 먹듯이 한다던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 나는 정현이가 통역하기 곤란한 질문까지 서슴없이 던졌다. 그 결과 우리는 쏠이 비록 가난한 것이 흠이긴 해도 사람 하나는 믿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딸과의 결혼을 허락했다. 마침내 정현이는 2004년 4월 24일 부산 범일동 크라운 호텔에서 결혼식을 했고, 그 해 7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 번 더 결혼식을 치렀다.
6. 먼 이국 땅으로 건너 가서 원래 사위의 고향은 시카고 부근인 유타주였지만 정현이가 추위를 싫어해서 따뜻한 캘리포니아주로 거처를 잡았다. 딸을 먼 이국 땅으로 보내긴 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으로 화상 채팅을 하며 서로의 안부를 전할 수 있으니 큰 아쉬움은 없었다. 쏠은 LA에서 중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딸은 어학 코스를 밟은 뒤에 대학원에 원서를 내었지만 첫 해에는 낙방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딸은 실망하지 않고 값싼 평생 교육 센터에 다니며 어학 공부를 계속 했고, 대학원 진학에 대비하여 생물학 관련 공부도 했다. 정현이가 미국으로 간 지 1년이 지난 2005년 8월에 우리 부부는 미국 LA로 건너가서 딸과 재회를 하였고, 사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디즈니랜드, 샌디에고 해양공원 등을 둘러보며 꿈같은 보름을 보내고 돌아왔다. 내가 미국에 가서 딸이 사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집도 좁고 아직 많이 옹색하긴 했지만 사위와 알콩달콩 잘 살고 있어서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나는 자녀가 셋이라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 큰딸은 미국으로 수출했습니다.” 하고 말하며 웃는다. 2005년 12월, 큰딸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 California State University, Dominguez Hills ) 임상병리학과 석사과정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한국에서는 자기가 다니고 싶어 하던 학과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미국에 가서 비로소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이다. 정현이는 캘리포니아 대학 병원에 인턴으로 뽑혀 1년간 실습을 하였다. 80여 명의 학생중 4등 안에 들어 대학병원에 실습을 나갔는데, 2009년 7월에 실습을 무사히 마치고 2009년 8월 초순에 드디어 '임상병리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여 자격증을 땄다. 영어 회화도 어려운데 영어 원서로 된 의학 서적을 읽고 공부하여 따낸 자격증이라 딸이 정말 자랑스럽다. 정현이가 클 때 영어 학원에도 별로 안 가보고 거의 독학으로 공부한 결과라 더욱 기쁨이 크다. 요즘 영어 열풍이 한창인데 내 딸을 보면 조기 교육을 하지 않아도 별로 큰 지장이 없다는 걸 느낀다. 자녀를 잘 키우려는 것이 부모 마음이지만, 자녀를 믿고 지켜보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큰딸 정현이가 강한 집념으로 이루어낸 결과를 보고, 별로 뒷바라지도 못한 아빠라 미안한 마음도 들고 앞으로 또 어려운 고비가 있으면 잘 넘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나간 일을 더듬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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