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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수상행식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오는 해석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래 불교에서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이와 같이 평등한 불이(不二)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교리를 전개시켰다. 따라서,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색과 공을 차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대립과 차별을 넘어선 일의(一義)로 관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가유(假有)의 존재인 색 속에서 실상을 발견하는 원리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색과 공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색이 변괴(變壞)되어서 공을 이루는 현상적인 고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당체(當體)를 직관하여 곧 공임을 볼 때,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신라시대 고승 원측의 해석
"변계소집(遍計所執)은 본래 없는 것이므로 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 까닭에 공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생겨나지 않는 것이므로 마치 공화(空華)와 같고 그 자체가 또한 공한 것이다.
색과 공이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를 밝히면서, 만약 하나라고 하면 일집(一執)에 빠지게 되고 다르다고 하면 이집(異執)에 빠지게 되며, 하나이면서 다른 것이라고 하면 서로 위배되는 것이 되고,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하면 희론(戲論)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명구의 가르침은 색이나 공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 곧바로 그 실체를 꿰뚫어보라는 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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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가중의 일심삼관, 불이론, 유식삼성의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
대승불교의 이론들이 마구 쏱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으드드...
갑자기 뇌회로에 혼란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는 공한 것이라고,
본질은 공한데 의지해서 일어난 것(依他起性)이라고. 실체가 없는 가짜 세계(假有)라고,
그런데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다고,
그러므로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지만 실체가 없음을 꿰뚫어보아야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그리고 있다 없다는 둘이 아니므로(불이) 분별을 떠나야 한다고,
뭐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이걸 또 물리학에 대입해서 물질을 분해하면 분자가 나오고, 분자를 분해하면 원자가 나오고, 원자를 분해하면 양자가 나오고, 양자를 분해하면 광자, 즉 빛으로 이루어져 있나고...
그래서 실체가 없다고...
뭐 이렇게 해서 2500년 전에 붓다께서 이미 물질 과학을 완전히 파헤친 사람이라나 뭐....
뇌회로에 혼란이 가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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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색수상행식, 즉 오온에 나오는 색(色)이라는 단어를 '물질'이라고 잘못 번역한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색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rupa인데 물질이라고 번역을 할 수도 있으나 사실 '형상 또는 색상'을 말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대상을 형태로 인지하느냐, 색깔로 인지하느냐를 두고 아비담마에서 말이 많습니다만, 하여튼 눈으로 접촉하는 대상이 색입니다.
色이라는 단어, 즉 빨리어 루빠라는 단어는 육처를 말할 때는 형태, 또는 형상, 또는 색상, 또는 이 둘을 합쳐서 형색이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色이라는 단어가 연기에서 名色 즉, 라마루빠를 말할 때는 물질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연기에서 말하는 물질도 우리의 인식체계, 지각구조, 정신구조 안에서의 물질입니다.
즉 오온이 어떻게 조건지어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연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色이라는 단어는 의식체계, 즉 오온을 떠나서 외부의 물질, 세상의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의 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올 때, 그 감각기관이 인지하는 대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을 識이 알아차리고, 그 대상을 受가 느기고, 그 대상을 想이 지각 또는 인식하고, 그 대상에 대해 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오온을 떠나서 이 세상을 물질(색)로 규정하고, 세상의 물질이 공하다느니 공하지만 의지해서 생성되어 있다느니, 그러므로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不異)라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관념놀이를 하면 안됩니다.
물질을 끝까지 분해해보니까 빛 또는 파동으로 이루어졌더라...그러므로 물질이 공이고 공이 물질이다...라는 웃기지도 않는 과학놀이는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런 이론은 원래 불교의 것이 아닙니다.
힌두 베단타에 나오는 마야이론, 불이일원론을 대승불교가 차용한 것입니다.
붓다는 이 세상을 18계로 규정하셨습니다.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이것이 이 세상입니다.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일체법이며, 세계입니다.
그런데 色을 내 몸을 떠나서 이 세상의 만물을 통칭하는 물질로 번역해야 되겠습니까?
아비담마에서는 눈에 보이는 대상만을 色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 혀로 느끼는 맛, 몸으로 느끼는 감촉도 물질로 분류합니다.
즉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대상이 물질입니다.
엄연히 말하면 소리, 냄새, 맛, 감촉을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色이라는 단어는 물질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형상만이 色이 아니고, 소리, 냄새, 맛, 감촉도 色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도 알아차리는 대상이 됩니다.
그 생각이라는 대상을 내부의 감각기관(마노)이 알아차리고, 느끼고 지각하고 마음작용을 일으킵니다.
여기서도 생각이 일어나고 그것에 반응하는 의식구조, 즉 오온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생각도 色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 속의 대상이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부와 외부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하는 모든 것이 色입니다.
그러므로 인식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색이므로 여기서는 대상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물질이라고 번역해 사용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물질이라는 단어를 그냥 사용하도록 합시다.
* * *
그럼 이제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에 대한 해석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붓다는 '나'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관습적인 '나'를 말합니다.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나'라고 설명할 때나 사용합니다.
나의 본질을 설명할 때는 '나'라는 단어 대신 오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이것이 나다.'라는 자아의식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나'를 설명할 때는 이것을 분해해서 색수상행식, 즉 오온으로 설명합니다.
오온으로 설명하면, 그 어디에 '나'라는 관념이 들어서지 않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아주 단순합니다.
그 모든 가르침이 '이것이 나다.'라는 관념을 깨뜨리는데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물질이 일어납니다.
물질이 일어난다는 말은 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수상행식이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마음의 움직은 아주 빨라서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을 찰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온은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대상이 들어오면 정신(나머지 수상행식)이 그것을 붙잡고 즐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물질은 실체를 갖기 시작합니다.
물질이 실체를 갖기 시작하면 갈애와 집착이 일어나고 번뇌가 생겨납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물질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인식의 일어남이고 , 무엇이 마음작용의 일어남이고, 무엇이 식의 일어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이 사람은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다. 그러면 무엇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는가?
그는 물질을 즐기고 환영하고 거기에 묶여 있다. 물질을 즐기고 환영하고 거기에 묶여있는 자에게 즐김이 일어난다. 물질을 즐기는 것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노병사우비고뇌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오온)가 발생한다.
그는 느낌.... 인식.... 마음작용....식....을 즐기고 환영하고 거기에 묶여있다. ............
(여기서 ....으로 되어 있는 부분은 위의 문장의 물질이라는 단어에 느낌, 인식, 마음작용, 식을 차례로 대입해서 읽으라는 뜻이다. 그 ....이 한문으로는 수상행식 역부여시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마음작용의 일어남이고, 이것이 식의 일어남이다.
<S22.5>
고집멸도의 고성제를 설명할 때, 오온이 괴로움이라고 경전에서 설명합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그냥 놔두면 괴로울리가 없죠.
오온이 일어남을 가지고 붙잡고 즐기기 시작함으로 인해서(의지해서, 조건발생) 괴로움이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의지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물질이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 또는 무지 때문에 마음이 물질을 붙잡고 즐기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단순한 사실을 가지고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니 뭐니 하는 무지 어려운 말을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질의 일어남에 대해서 지구과학이나 우주과학 또는 분자 원자 광자를 들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은 마야(환영)로 이루어졌다느니, 그 마야 뒤에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존재한다느니, 그 환영과 힘이 둘이 아니라느니 하는 말도 되지 않는 불이론의 힌두 베단타 교리를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물질이 왜 공한가? 왜 색즉시공 공즉시색인가?
물질이라는 대상이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들어올 때, 마음이 그것을 붙잡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소멸합니다.
바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소멸하는 것을 가지고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물질이 실체가 없다는 말은 그 물질, 즉 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서, 연기에 의해서 스스로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대상을 마음이 붙잡고 의미를 부여하고 즐기지 않으면 말입니다.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인싟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마음작용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연기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지, 그것을 일으키는 능동적인 주체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입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물질의 사라짐이고, 느낌의 사라짐, 인식의 사라짐, 마음작용의 사라짐, 식의 사라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이 사람은 물질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는다. 물질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는 자에게 즐김이 소멸한다. 즐기는 것이 소멸하므로 취착이 소멸한다. 취착이 소멸하므로 존재가 소멸한다. 존재가 소멸하므로 생노별사우비고뇌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오온)이 소멸한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비구들이여,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 느낌의 사라짐, 인식의 사라짐, 마음작용의 사라짐, 식의 사라짐이다.
<S22.6>
붓다께서 '나'라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분해하지 않고, 다섯 가지(오온)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이것이 나다'라는 관념을 깨뜨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 관념에서 온갖 괴로움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장자여, 여기 범부는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다. 물질은 내것이다.'라는 견해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이처럼 '나는 물질이다. 물질은 내 것이다.'라는 견해에 사로잡힌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그에게 우비고뇌가 일어납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S22.1>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물질, 즉 대상을 가지고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것이다'라고 하는 견해를 갖게 됨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고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그 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정신(느낌, 인식, 마음작용, 식)을 가지고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것이다.'라고 하는 관념을 가지면 온갖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물질과 정신은 변하는 것이고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입니다.
장자여, 여기 잘 배운 자는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다.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는 견해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물질이다.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는 견해에 자로잡히지 않는 자의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에게는 우비고뇌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S22.1>
붓다는 '나는 오직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붓다는 결코 우주과학자이나 지구과학자이나 물리학자가 아닙니다.
물질의 존재 원리 같은 과학적 문제는 붓다에게는 아무 쓸데 없는 희론, 사량분별, 분별망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붓다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붓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눈밝은 제자라면, 힌두교 교리를 차용해서 세상이 환영이니, 물질이 원래 공하다느니, 환영과 실체는 둘이 아니라느니 하면서 희론을 일삼는 대승의 학자는 되어서는 안됩니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부처님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부처님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수상행식 역부여시....)
비구들이여, 그것이 어떤 물질이든지 '이것이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S22.82>
위빠사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오온을 가지고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것이다.'라고 하는 견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 느낌, 인식, 마음작용, 식이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연기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그 과정에 '나 또는 '나의 것'이 없는것,
이것이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입니다.
쌍윳따 니까야 무더기 상응(S22) 전체가 오직 이것,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번 정독해보시면 모든 것을 확연히 이해하리라 생각됩니다.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_()()()_
스님 법문 감사합니다 _()_
바르게 이혜(오온)하게해주셔서감사합니다
의미적으로 확실히 이해가 됩니다.
이제는 수행으로 나아가야 겠습니다.
오온으로인한 고통이 줄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물질(인지되는 대상)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인지되는 대상)이 자아 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인지되는대상)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물질" 대신 "인지되는 대상" 이라고 읽으니까 이해가 잘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