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보시고 가라사대 - 원문은 '여블려사스 아우토...에이펜'이다. 여기에서 '엠블려사스'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라는 뜻의 헬라어 '엠블레포'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비록 단시간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여기에서 '시몬'과 '게바'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요한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상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몬'은 '시므온'이라고도 불리었다. 그렇다면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과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 장차 '게바'로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즉 '베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된 사실을 상기케한다.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 갈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인게바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번역하면 - 헬라어 '헤르메뉴에타이'는 '헤르메뉴오'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자세한 것은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요 1:4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이튿날-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이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가 극심한 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따라서 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갈릴리로 채택하셨다(단,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유대 사역에 관한 언급이 많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 하겠으며, 하나님의 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륜을 엿보게 한다. 빌립을 만나 - '만나'의 헬라어 '휴리스케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와 빌립의 만남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만남이 생생한 필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난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나를 좇으라 - 빌립을 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부르심이다. '좇으라'의 헬라어'아콜루데이'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만나'와 '이르시되'라는 두 현재형 동사와 부합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부르심은 '바로 지금'의 현재적 시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요 1: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은...벱새다 사람이라 - 사도 요한이 빌립의 출신지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표현한 것은 누가가 기록한 '벱새다 줄리어스'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데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미 성도들에게 알려졌다는 전제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본서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생략한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벱새다라는 지명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이다. 벱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이는 벱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벱새다임을 암시한다.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 벱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따라서 요한은 '갈릴리의 벱새다'라고 명명한다.
벱새다에서의 예수의 사역은(1) 오병이어의 이적의 베푸심, (2) 사천 명을 먹이심, (3) 소경을 치유하심 등이다. 이로 보건대 벱새다를 비롯한 갈릴리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보고 예수를 추종하였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영안을 뜬 것은 아니었다.신앙보다는 육체적 욕구를 추종한 벱새다를 위시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저주는 주목할 만하다..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나다나엘'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그의 이름은 오직 본서에만 나온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집은 갈릴리 가나였으며 예수를 만날 때에는 아마도 벱새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본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바돌로매'란 명칭이 바-톨마이이므로 이는 고유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라고 불리운 것과 동일한다. 혹자는 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마태란 명칭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므로,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 가지 학설은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단지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모세가 율법에...기록한 그이름 - 빌립은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율법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 이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 드러낸다. 본문은 빌립이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빌립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빌립이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있게 전도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우리가 만났으니 - 이것의 헬라어 '휴레카멘'은 '휴리스코'의 1인칭 복수 완료 직설법 능동태로서 메시야를 만난 빌립의 감격과 확신을 나타낸다.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 빌립이 만난 메시야의 인간적인 신분이 제시된다.
원래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자칭, 타칭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리었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법적 차원에서 볼 때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신적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사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로 결국 나다나엘의 반론을 야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