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는 아라한의 깃발
평온한 일상이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모든 모임이 중단되었다. 집과 일터만을 왕래하며 보내는 나날이다. 그러나 온라인상으로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매일 글쓰기하는 것도 일상이다. 하루 한 개씩 의무적으로 쓰는 것이다. 그것도 의미와 형식을 갖춘 글쓰기이다. 나중에 책을 낼 것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이다. 벌써 14년째이다.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일거리가 끊길 것을 염려했으나 다행스럽게 귀인이 나타나 일거리를 주었다. 중작도 있어서 한달 버틸 수 있는 일거리는 된다. 일을 하면서 글쓰기를 하고, 글쓰기 하면서 일을 한다. 동시에 틈만 나면 앉아 있으려고 노력한다. 평좌하고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하다. 이런 것이 있기에 자주 앉고자 하는 것이다.
가사는 아라한의 깃발
어제 글을 하나 썼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설 수 없다’라는 타이틀을 가진 글이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린 글이다. 페이스북에서 댓글을 하나 받았다. K선생이 올려준 글이다.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맞아요. 출가자라는 인물에 3배나 반배를 하는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출가자의 가사에 불, 법, 승 3보에 예를 올립니다.가사는 아라한이 되는 깃발이거든요. 그래서 테라와다 스님들은 3배를 혹은 합장반배를해도 같이한다거나 하지않습니다. 스님은 그져 먼산만 바라볼 뿐... 경배가 내모습이 아니라 가사이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아라한이 되는 깃발이 꽂힌 당간지주이지요. 경배에 맞절을 하거나 알은 채를 하는 것은 한국 스님들의 모습입니다.”(K선생)
K선생은 나이가 여든 가까이 되는 노법사이다. 작년 1월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서 함께 있었다. 더 이전에는 노법사로부터 3개월가량 위빠사나 수행지도도 받았다. 늘 격려해 주고 후원해 주시는 스승이시다.
K선생에 따르면 재가자가 출가자에게 예경하는 것은 출가자자의 가사에 예경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출가자에게 절한다고 하여 출가자 그 사람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가사를 입은 모습에 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사에 대하여 아라한의 깃발과도 같다고 했다.
전장에서 빛나는 갑옷처럼
아라한의 깃발과도 같은 가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청정도론 두타행을 보면 가사와 관련된 것이 있다. 열 세가지 두타행 중에서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와 ‘세벌 옷을 지니는 수행고리’에 대한 것이다.
분소의는 천조각을 이어서 만든 옷을 말한다. 시체버리는 곳에 있는 천조작이나 가게 앞에 버려진 천조각, 길거리에 놓인 천조각 등을 바느질해서 만든 옷이다. 이러한 분소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분소의를 입는 수행고리’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악마의 군대를 쳐부수기 위해
분소의를 입는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빛난다.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처럼.
세상의 스승께서도
까씨의 옷 등의 값비싼 옷을 버리고
분소의를 입었거늘
누가 그것을 입지 못하랴!
그러므로 수행승이라면,
자신의 서원을 기억하면서
수행자에게 알맞은 분소의에 기뻐해야 한다.”(Vism.2.22)
청정도론에 따르면 분소의를 입는 것에 대하여 마치 장군이 갑옷을 입은 것과 같다고 했다. 장군은 갑옷을 입고 적군을 무찌르지만, 수행승은 분소의라는 갑옷을 입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마의 군대를 쳐부순다는 것이다.
악마의 군대는 어떤 것일까?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Sn.3.2)에 따르면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 불리고, 그대의 세 번째 군대는 기갈, 네 번째 군대는 갈애라 불린다. 그대의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라 불리고, 그대의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위선과 고집이라 불린다.”(Stn.436-437)라고 했다.
부처님은 악마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다. 승리하기 위해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Stn.440)라고 했다.
분소의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입은 갑옷과도 같다. 마음의 오염원과 싸우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까씨국에서 나오는 비단 옷을 버리고 기꺼이 분소의를 입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분소의는 청정한 삶의 상징과도 같다.
분소의는 쓰레기에서 얻은 옷이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만족의 경에서는 “옷 중에는 넝마 옷이 하잘 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고”라고 했다. 얼기설기 기워만든 분소의는 넝마 옷처럼 하잘 것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소의를 걸친 그 자체만으로 빛난다고 한다.
가르침의 상속자 담마다야다(dhammadāyāda)
분소의는 장군의 갑옷보다도, 왕족의 비단옷 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네 가지 하잘 것 없는 필수품에 대하여 “하잘 것 없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삶의 고리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A4.27)라고 했다.
분소의는 두타행의 상징과도 같다. 두타제일이라고 불리우는 마하 깟싸빠 존자는 부처님에게 분소의를 물려 받았다. 부처님은 “깟싸빠여, 그대는 내가 입고 있는 삼베로 된 분소의를 입어라.”(S16.11)라고 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마하 깟싸빠 존자가 부처님의 전법제자임을 뜻한다. 가사와 발우를 물려주었다는 것은 부처님 열반 이후 승단을 이어갈 여법한 계승자였음을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벗이여, 만약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세존의 아들로 그분의 입에서 태어났고 가르침에서 태어났으며 가르침에 의해 형성되었고 가르침의 상속자이며 삼베로 된 분소의를 입었다.’ 고 말한다면, 그는 나에 대하여 ‘세존의 아들로 그 분 입에서 태어났고 가르침에서 태어났으며 가르침에 의해 형성되었고 가르침의 상속자이며 삼베로 된 분소의를 입었다.’ 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S16.11)
마하 깟싸빠 존자는‘가르침의 상속자’가 되었다. 부처님이 입고 있던 분소이를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르침의 상속자를 뜻하는 담마다야다(dhammadāyāda)를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아홉 가지 출세간법의 상속자라고 한다. 즉,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마하 깟싸빠 존자는 부처님으로부터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다. 이 모든 것은 존자가 후대에 모범이 될 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두타행이다.
마하 깟싸빠 존자는 두타행을 함으로 인하여 후대 수행승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는 깟싸빠 존자가 “나 자신의 현세에서의 행복한 삶을 보면서, 그리고 후세의 뭇삶들에 대한 자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세의 뭇삶들은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할 것입니다.”(S16.5)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마하 깟싸빠 존자가 분소의를 입는 등 두타행을 한 것은 자신의 청정한 삶을 실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후대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한 것이기도 하다. 부처님 당시 선배수행승이 “청정한 삶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과 같다.
후대 수행생은 선배수행승을 본받고자 할 것이다. 선배 수행승의 용맹정진을 본받으려 하는 것이다. 마하 깟싸빠 존자는 후대 수행승들에게 자비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두타행을 한 것이다.
부처님은 깟싸빠 존자의 두타행을 칭찬했다. 그래서 “깟싸빠여, 훌륭하다. 깟싸빠여, 훌륭하다. 그대는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참으로 이와 같이 실천해왔다. 그러므로 깟싸빠여, 베로 만든 그 분소의를 걸치고 걸식하러 다니며 숲속에서 살아라.”(S16.5)라고 말했다. 분소의는 가르침의 상속자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날개를 지닌 새처럼
두타행에서 가사에 대한 것으로 두번째는 세 벌 옷만 지니는 수행의 고리이다. 하의, 상의, 대의 이렇게 세 벌만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네 번째 옷을 수용했을 때 두타행은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 벌 옷만 수용한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여분의 옷에 대한 갈애를 버리고
현자로서 보관을 피하고
만족을 알고 안락의 맛을 아는
수행자는 세벌 옷만 수용한다.
날개를 지니고 가는 새처럼
그래서 최상의 수행자는 옷을 지니니,
안락을 원하는 자는
옷의 절제에 기뻐해야 한다.”(Vism.2.26)
게송을 보면 옷이 날개라고 했다. 마치 새가 날개 이외 다른 것을 지니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간소한 삶에 대한 것이고 만족한 삶에 대한 것이다. 이런 수행자에 대하여 테리가타에서는 “마을에서 떠날 때에 아무것도 살펴보지 않고, 미련없이 떠납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82)라고 말했다. 소녀 로히니가 아버지가 간소한 수행자의 삶에 대하여 찬탄한 것이다.
백만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4)라고 했다.
부처님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이는 “이러한 정진에서 나오는 바람은 흐르는 강물조차 마르게 할 것이다. 이처럼 용맹을 기울이는 나에게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Stn.433)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마침내 악마의 군대를 쳐부수어 깨달은 자가 되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승리자의 옷이 바로 가사이다. 그래서 “분소의를 입는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빛난다.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처럼.” (Vism.2.22)라고 했다. 수행승들의 가사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갑옷과 같은 것이다.
이 생에서 한번쯤 가사를
가사를 입은 모습은 아름답다. 누구나 이 생에서 한번쯤 입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얀마 선원에 가면 누구나 비구가 되어 검붉은 가사를 입을 수 있다. 작년 1월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서도 그랬다. 함께 간 동료 수행자 중에 다섯 명이 머리를 깍은 것이다.
재가불자들이 사미에게 절을 하는 것도 미래의 승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계행이 엉망인 스님에게도 반배하는 것도 스님이 참회하여 정진하면 승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사입은 수행자에게 예경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가사입은 수행승에게 예경하는 것은 수행승 그 자체에 예경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승리자의 상징으로서 가사에 예경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사는 아라한의 깃발과도 같다고 했다. 테라와다 빅쿠가 예경 받을 때 맞절을 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2020-04-03
담마다사 이병욱
첫댓글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