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일지 41] 아이들과 함께 나눈 평화, 저 땅의 피흘림 (2004년 9월 18일)
잠이 깰 무렵
무슨 소리인가에 눈을 떴다. 수사님이 일어나는 소리. 잘 주무셨냐고 묻고 다시 돌아눕는데 창 밖으로 두둑두둑 무언가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수사님, 비와요?”, “어, 비가 오네.”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하다가 또 돌아누웠다. 수사님이 얼굴이 좋지 않아 보여서 몸이 안 좋으신지 물으니 자는데 허리가 배겨서 그렇다 하신다. 전에도 종종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자동차를 오래 타거나 깔고 눕는 이불이 얇을 때. 몸이 마르게 되니 오래 앉거나 눕는 일로도 뼈가 배겨 힘이 든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잠에 들었는데 잠결에 아는 분 목소리가 들린다. 수사님은 아마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일기를 쓰고 계셨는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어, 어떻게 여기를 왔어?” 하는데 그 대답을 들으니까 함양의 이주미 선생님 목소리이다. 차를 타가지고 왔다고 한 잔씩 들라면서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이주미 선생님 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니까 내가 누운 쪽으로도 이주미 선생님이 가까이 오셨고, 차 드시겠느냐고 물었다. 아직 눈도 제대로 못뜨고 있는 터라 차를 마실 정신은 아니었지만 일부러 타오신 것이고 하니 네, 먹을 게요 하고 옆에 놓아 달라 했다. 그리고는 또 이런저런 안부 몇 마디가 오간 뒤 이주미 선생님은 손에 든 봉지에서 베개를 꺼내 보이며 선물이라 했다. 손수 쑥을 말려 그것을 베갯속으로 해서 만든 베개였다. 수사님 것 하나, 내 것 하나. 보통 베개와 달리 목에 댈 수 있을 만큼 원통 모양의 가는 베개인데 수사님도 나도 그걸 보면서 “우와 진작 있었으면 차타고 다닐 때 좋았을 건데.” 하고 그런 아쉬움을 섞어 좋아했다. 그러면서 농담으로 이거 단식 더 오래 하라는 얘기라고, 이 좋은 베개를 만들어 주지를 않나, 효소를 자꾸만 더 가져다주지를 않나, 아무래도 더 단식하라는 건가 보다 하면서 웃었다. 그렇게 웃는 통에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선생님이 머리맡에 놓았던 찻잔을 들고 입에 댔다. 그러면서 수사님이 이건 무슨 차냐고 물으니까 이주미 선생님은 웃으면서 그냥 묻지 말고 마시라 한다. 무슨 차이길래, 저렇게 장난을 하시나 하는데 수사님은 그러면 나는 안 먹는다 하시고, 이주미 선생님은 먹으면 얘기해준다 하시고 서로 장난처럼 주고받았다. 그래서 나는 뭐길래 그러나 하고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살짝, 살짝 두 모금 입으로 넘겼다. “선생님, 저는 마셨으니까 이제 말해주세요.”, “아아, 그거 쌀 씻은 물이에요?”, “뭐라고요?” 정신이 번쩍 깨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말로 하자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걸어온 길이, 내가 지켜온 것이, 내 마음이, 내 바람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나, 쌀 씻은 물을 먹어버리다니, 나는 이렇게 단식이 풀렸다.
쌀뜨물 두 모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세면대에 가 찬물에 낯을 씻고 나왔다. 그저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나는 단식이 풀렸구나, 나는 단식이 끝났구나, 나는 이제 단식이 아니구나 하는 것뿐이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해야 하지? 몸도, 마음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면서 마당가에 나갔다 들어왔다. 그리고는 짐을 쌌다. 옆에 계신 수사님께 “수사님, 죄송해요. 저는 이제 집에 갈게요. 단식이 풀렸어요.” 하고 말씀을 드리고 짐 가방을 하나하나 1층 문 앞으로 내다 놓았다. 그건 단식 풀린 거 아니야 하고 수사님이 말씀을 하시기도 한 것 같고, 그건 괜찮은 거다 하고 말씀을 한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가지 말라 하시다가 잠깐 있어보라며 신부님을 모셔 오셨다. 신부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아마 그 물을 가져다 준 이는 그게 어떤 건지 몰라서 그랬을 거고, 그걸 먹은 사람 역시 자기 의지대로 먹은 것도 아니고 모르고 먹은 거니까 그걸 가지고 그렇게 엄격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교도소 같은 데에서는 억지로 호스에다가 미음을 집어넣기도 하고 그러는데 모르고서 넘긴 미음 두 모금에 단식이 풀렸다고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말아라…… 하는 그런 말씀들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내 머릿속에는 내가 무언가를 먹었다는 생각에 괴로울 뿐이었다. 그리고 말 맞다나 내가 원치 않은 그것을 그런 식으로 넘기게 되었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분하고, 화가 날 뿐이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처럼 내 모든 것을 온전히 다 던져본 일이 어디에 있나? 정말 목숨을 걸고서 하고 있는 이 일이 이런 식으로 중간에 꺾이고, 끊길 수가 있나?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어떤 변명을 건다 하더라도 나는 무언가를 먹었고 그로써 단식은 풀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 앞으로 내가 다니는 곳에 가서 저는 오늘로 단식이 사십 며칠 째라고, 사십 며칠 째 굶고 있다고 말을 할 수 있겠는지, 그런 건 모두 거짓말을 하는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이미 나는 단식순례자의 자격을 잃었다는, 그런 생각만이 괴로웠다. 신부님이 자리를 뜨고 나서 다시 한 번 수사님께 말씀드렸다. “수사님, 죄송해요. 그런데 어쨌든 저는 단식자가 아닌 게 되었잖아요. 수사님도 아시듯이 단식을 한다는 건 가장 순정을 다하는, 가장 맑은 싸움인 건데 저는 지금 그런 마음이기가 어려워졌어요. 아무리 아니다, 아니다 해도 내 스스로 그렇게 여기기가 어려워요. 솔직히 말해서 여기에서 멈추게 되는 거 죽기보다 싫은 게 저예요.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나흘을 더 채워 청와대 앞까지 가는 것도 집착이겠다 싶어요. 수사님의 단식이, 수사님의 싸움이 있는 그대로 맑게 지켜지기 위해서라도 저는 제가 여기에서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수사님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같이 가자고, 네가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여기에서 이렇게 끝내는 건 죽기보다 싫어요. 저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어요.
쌀뜨물 두 모금을 넘긴 41일째 단식
단원들이 함께 마루에 모였다. 단원들 앞에서 오늘 아침 있었던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내 마음을 밝혔다. 무거운, 숨이 막히는 분위기. 어떤 말이 더 오갔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이렇게 떠나가 버린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느닷없이 뺨을 맞는 것처럼 황당하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데 정말로 그럴 거라는 마음, 처지가 이해가 되었다. 어지러웠다.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 내가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우리 단식평화순례단을 중심에 두어야 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부터 나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목숨을 걸고 한 일이, 내 모든 걸 바치며 하는 일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막히게 되다니 하는 절망감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단식을 내 의지로 그만 두더라도 나는 단식을 그만 둔 순례단원으로라도 이 순례를 함께 완성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억지로 단식 중에 미음 두 모금을 먹게 된 일을 스스로 문제 삼는다면 그 조차도 있는 그대로 문제를 인정하고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옳다. 나를 속일 것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속일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말이다. 그게 지금껏 함께 순례를 해온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제야 비로소 마음을 추수렸다. 모든 상황,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말이다.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고 느껴진다면 있는 그대로 나는 쌀뜨물 두 모금을 넘긴 일이 있습니다 하고 먼저 말을 하면 된다.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 괴로울 것 같거나 겁난다면 달아나는 것으로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 먼저 솔직하게 고백을 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 일로 해서 단식이 풀렸다 하면서 절망스럽게 단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지금껏 해온 것처럼 계속 굶으며 청와대 앞까지 간다. 다만 사십 일일 째 되는 날 아침에 쌀뜨물 두 모금 넘긴 일이 있다는 것 또한 그대로 드러내며 말이다.
쓰러진 일
오늘 아침 이 일이 있게 된 까닭에는 사실 요 며칠 사이에 내 몸이 눈에 띄게 약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 사람에게만 말하고 있던 일이 있는데 그게 38일째가 되던 날, 어머니댁에 가서 하루를 자고 나온 날이었다. 공주에서 몇 시간 자동차를 타고 올라오자마자 차에서 내려 어머니댁에 가서 몸을 눕힌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 방에 누워 있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나오던 길이었나? 순간 사진관 플래쉬가 터지는 것처럼 눈앞이 새하얘지더니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한 몇 초가 지나 눈두덩이에 큰 충격이 한 번 있었고, 구르는 것처럼 머리에 충격, 그리고 어깨까지 무언가 굉장한 것에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그 충격에도 눈이 떠지지 않았고, 아니 눈은 떴으니 앞이 보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몸이 둥실둥실, 혹은 빙글빙글 돌고 있는 느낌,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서 한 몇 분(아마 실제로는 1~2분 정도였겠지) 그대로 있으니까 조금 눈앞이 밝아왔다. 나는 마루에 쓰러져 겨우 몸을 일으켜 엎드려 있는 거다. 억지로 일어나 비틀비틀 방으로 들어왔고 그대로 누웠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당분간 다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어머니는 대문 밖에 나가 계시느라 아무 것도 모르고 계셨고 나는 단지 그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누워 있었다. 누워 생각하니 자동차를 오래 탔다가 내릴 때 느끼던 어지럼증, 누워 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킬 때 느끼던 어지럼증 그것과 닮은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한층 더 심한데다가 내가 조심 없이 몸을 일으킨 탓이었을 거다. 그때까지 쌓인 피로에, 공주부터 서울까지 올라오는 먼 자동차길, 그리고 긴장을 놓은 채 조심 없이 움직인 것. 한잠을 자고 났다. 몸을 일으킬 때는 조심조심, 움직일 때는 조심조심. 그 때부터 정말 조심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 어깨에는 그 때 넘어진 상처가 아직도 깊다. 장판이 두꺼운 마루바닥에 넘어진 건데, 그것도 바로 입은 충격도 아니고 세 번째 충격인데도 그렇게 심하니 만약에 내가 방바닥이 아니라 시멘트 콘크리트 길이나 계단 어디에서 쓰러졌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음 날 춘천으로 옮겨 단원들과 만났을 때 이 일은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정말 조심하면 되는 건데 말을 해봐야 걱정만 심하게 끼칠 거라 생각했다. (나중에 수사님께 들으니 그 일은 거의 쇼크사로 이어질만한 일이었다 한다.) 어떤 때에는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도 모든 행동이나 몸가짐을 불편하게 하기도 하고 해서 그냥 말을 안 했다. 그러다가 수사님께만 말씀을 드리게 되었는데 그게 말을 건너, 건너가게 되어 단원들 대부분이 알게 되었다. 게다가 어제 그제 나 뿐 아니라 수사님마저도 체력이 떨어졌다는 게 확연히 드러났으니 더욱 걱정을 한 모양이었고, 오늘 아침 밥을 먹으면서 어떻게 하느냐고, 쌀뜨물이라도 먹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주미 선생님도 그 이야기를 듣다가 그저 걱정스러운 마음 하나로 쌀뜨물을 데워가지고 단식자들 방으로 가지고 온 거였다. 단원들의, 이주미 선생님이 어떤 마음으로 그 물을 주려 하셨는지는 안다.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 하지만 내가 아무 의심 없이 그 물을 두 모금 넘기고 난 뒤 그게 뭔지 알았을 때는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는지 숨이 막히고, 머리에 벼락이 쳤다. 걱정스러운 마음, 그 마음 하나로 멀리 함양에서부터 일부러 올라와 그렇게 물을 데워주신 이주미 선생님, 선생님은 또 내가 감정을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아마 크게 자책을 하며 마음에 상처를 입으셨을 거다.
월미평화축제
그렇게 커다란 한바탕 소동, 아니 소동이라기에는 너무 무겁고, 엄숙하고, 눈물 섞인 일을 겪고 나니 바로 움직일 시간이 되었다. 오늘 우리가 가장 먼저 갈 곳이 월미산에서 여는 월미 평화축제에 가서 함께 하는 것인데 두 시까지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인천민예총이 준비하는 이 축제는 해마다 하는 것인데 올 해에도 나흘 동안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담아 여는 행사이다. 그 가운데 우리가 가는 토요일 마당은 청소년을 위한 시간들이라 했다.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여는 행사인데 우리는 행사가 시작하는 두 시에 바로 시작해서 세 시까지 함께 하다가 그곳에서 나와 기차길옆 작은학교로 움직일 예정이었다. 월미산, 월미도야 몇 차례 가 보았지만 월미산은 처음이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차가 들어갈 없게끔 사람이 지키고 있는데 단식자를 태운 자동차는 김중미 선생님이 따로 부탁을 해 놓기도 했고 해서 행사장이 있는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게 했다. 자동차를 타고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올해 이 축제의 제목인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라는 걸개가 곳곳에 걸려 있는데 이 커다란 쇠붙이 안에 타서 산을 오르려니 걸어 오르는 사람들이며 길가에 있는 나무, 풀, 새들이 모두 우리만 쏘아보는 것처럼 마음이 따가웠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나도, 수사님도 이 길을 걸어 오르기는 정말 무리다. 지금으로서는 이층 건물 한 번 오르내리는 것만 해도 큰일이니 말이다. 산 위 행사장에 도착을 했는데 아직 사람들이 거의 없다. 무대 준비도 이제 겨우 시작하고 있었다. 아마 오전 내내 비가 와서 준비를 하지 못하다가 이제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행사를 시작하는 시간이 두어 시간은 뒤로 늦어질 텐데 우리 일정을 챙기는 단원들은 이걸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면서 걱정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은 찾지 못하고 그저 한쪽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인천, 반가운 분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사이 저 멀리로 반가운 얼굴들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머나 하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조용명 선생님, 김명길 선생님, 홍경남 선생님. 선생님들은 역시 손부터 꼭 잡아 주셨다. 홍경남 선생님은 정말로 손이 차네, 정말로 손이 차 하면서 손을 잡고 또 잡아주셨다. 그리고는 물기에 젖은 눈으로 너를 어떻게 하면 좋으니, 좋으니 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선생님들과 함께 올라온 한 떼의 식구들. 이 웬수야 하면서 김중미 선생님이 친누이처럼 곁에 와서 구박을 했다. 그 뒤로 기차길옆 작은 학교의 이모 삼촌들이 계속 이어 올라왔다. 그냥 얼굴만 보아도 너무너무 반갑고 좋다. 조금 뒤에는 원종찬 선생님과 강승숙 선생님, 이영희 선생님, 숙경이도 올라왔고, 멀리서 보니 한참을 못보고 지내던 혜란이도 올라와 있었다. 다들 이곳 인천 혹은 강화에 사는 분들이다. 인천에 좋은 식구들이 이리나 많구나. 어쩌다 보니 선생님들하고 둘러 앉아 먹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물텀벙, 물텀벙 하는데 다른 고장에서는 아구라 하는 것을 인천에서는 그렇게 부른단다. 옛날에 하도 고기가 많이 잡혀서 아구 같은 물고기는 그물에서 건지면 바로 텀벙텀벙하고 바다로 버렸기 때문에 그 이름이 물텀벙이 되었다고. 그 때는 아구뿐 아니라 뭐라고 하셨더라? 요즘에는 횟집에서도 값비싸게 파는 그런 물고기도 잡아서는 그냥 내다 버리는 물고기였다면서 옛날 물고기가 흔하던 시절 얘기를 했다. 그래서 인천의 가장 가난하다는 동네 화수동, 만석동에서도 게가 많이 잡히는 철에는 저녁바다 한 바가지씩 삶아서 게밥을 해서 먹곤 했다고 말이다. 대신 육지 고기는 정말로 명절에나 한 번 먹을까 싶을 정도로 구경이 어려웠다는 얘기까지. 옛날 얘기들은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못살던 때(써 놓고 보니 우습다, 지금은 이게 잘 살게 된 때이란 말인가?) 얘기들은 더욱 재미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얼굴에, 말투에 생활이 힘겹더라도 마음이 훈훈할 수 있던 그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 있다.
행사장 진행이 뭔가 원활하지 않아보였다. 행사 집행위에서는 순례단을 초대해서 프로그램에 넣었는데 실무 진행을 보는 이들은 그걸 모르고 있고, 그러다 보니 저쪽 무대는 아직 다 올리기도 전에 학생들과 함께 백일장을 시작했다. 우리가 알기로는 백일장을 하기 전에 우리 순서가 있고, 그 뒤에 백일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벌써 학생들에게는 시제를 주고 백일장을 시작했다. 급하게 행사팀과 만나 이야기를 하고 다시 확인을 하고, 어떻게 할지 의논을 하고 나서야 뭔가 어색하게 순례단의 순서를 넣게 되었다. 신부님의 말씀과 단식자 두 사람의 인사, 그리고 예기 플라타너스의 공연. 앞에서 신부님이 나가 말씀을 해도 학생들 가운데 반 이상은 머리를 숙이고 쓰던 글을 계속 쓰고 있는 풍경이었다. 그건 물론 수사님과 내가 나가 인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글쓰는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기나 하나보다 하는 마음이 들어 앞에 나가 인사를 한다는 게 영 어색했다. 그래서 이름이랑만 잠깐 말하고 허리만 한 번 숙여 인사를 하고 들어올까 하다가도 학생들 뒤에 서 계신, 일부러 찾아오신 선생님들 얼굴을 보니 또 그게 아닌 것 같고 해서 그대로 어정쩡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바로 예기의 공연이 이어졌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수사님과 나는 먼저 기차길옆 작은학교로 가 있으라 하신다. 갑자기 또 급하게 움직이게 되었다. 일부러 찾아와 산에 올라온 선생님들, 몇 분하고는 아직 인사나 겨우 나누었는데 바로 이렇게 가게 되니 아쉽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따로 와주십사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겨우 이렇게나 잠깐 보려고 오게 했나 싶어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고맙고 따스한 마음을 한 가득 가슴에 채워 내려오고 있었다. 아침에 그 불안한, 진정되지 못하던 마음은 어느 새 잊고 있었다.
기차길옆 작은학교 아이들
기차길옆 작은학교. 나는 이곳에 단 며칠도 살아본 일이 없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곳에 오면 언제나 내가 살던 마을에 온 것 같고, 익숙하고 편안한 어떤 느낌이다. 집 앞에 내리자 마자 일층 창으로 안에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벌써 가득 모여 있었고, 먼저 나를 알아본 아이들부터 삼촌이다, 삼촌! 박기범 삼촌이다! 하며 반겼다. 지난 봄, 바그다드로 들어가 미군의 종전 선언 때까지 그 안에 있을 때 아이들은 저희끼리 마음을 내어서 날마다 학교에 다녀오면 종이꽃을 하나씩 접어 벽에 붙이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라크에 전쟁이 끝나게 해주세요, 이라크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박기범 삼촌이 살아서 오게 해 주세요……. 그 때 그 감동, 그리고 지난겨울 대학로 앞에서 단식농성을 할 때에도 아이들은 자기 얼굴을 사진으로 붙이고 그 곁에 전쟁반대, 파병반대 소망을 적은 커다란 소망나무를 만들어 와서 내 마음을 울린 일이 있다. 그리고 이번 단식을 시작한 뒤에도 아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지 않았을 때, 아이들은 함께 모여 전지만한 그림엽서를 만들어 죽변까지 보내주었다. 고마운, 너무너무 고마운 아이들.
평화지킴이 상
월미산에 올랐던 단원들도 모두 내려오고 작은학교 1층에서 작은 행사가 열렸다. 벽 둘레에는 김재복 수사님, 문정현 신부님, 박기범 삼촌을 환영한다는 그림이 커다란 웃음처럼 붙어 있었다. 그리고 전쟁반대를 말하는 아이들의 그림판들. 누구나 방에 들어오면 그 그림들부터 보고 그 그림을 따라 커다랗게 웃으며 좋아했다. 아이들 셋이 앞에 나가 사회를 보았고, 첫 순서는 아이들이 마련한 상장 시상식. 아이들이 만든 상 이름은 평화지킴이 상. 맨 처음은 김재복 수사님이 받았다. 평화를 지키는 일,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드리는 상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사탕을 엮어 만든 목걸이도 수사님 목에 걸어주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수사님.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환한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문정현 신부님. 신부님은 깜짝 놀라며 나가 상장을 받고, 목걸이 사탕을 받았다. 그리고는 수사님이 기념촬영 포즈를 추했듯이 상장을 가슴에 들고 꼭 초등학생 아이처럼 가지런히 섰다. 산타클로스처럼 뭉개 수염이 나 있는 할아버지가 말이다. 다시 학교 안은 한바탕 웃음바다. 그 다음에는 나도 상을 받았고, 또 평화바람도 상을 받았다. 나로서는 두 번째 받는 상. 지난 해 6월 이라크에서 돌아왔을 때 이 똑같은 상, 평화지킴이 상을 아이들에게 받았다. 그 때도 그랬듯 아이들에게 받은 이 상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받은 가장 크고 값진 상이다. 이 아이들은 언제나 나에게 감동을 준다. 상을 받을 건 사실 앞에 나온 우리가 아니라 상을 주고 있는 이 아이들이다.
평화지킴이 상
박기범 삼촌
위 삼촌은 전쟁을 반대하고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드립니다. 박기범 삼촌은 고통받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 작은 용기를 심어줍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힘이 약하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평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상장을 주어 칭찬합니다. 지금 박기범 삼촌은 파병 때문에 죽고 있는 이라크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살기 위해 단식을 합니다. 박기범 삼촌은 전쟁보다는 평화가 세다고 믿고 의지하여 위 상장을 드립니다.
2004년 9월 18일
기차길옆 작은학교 드림
아이들 마음
시상식에 이어진 순서는 아이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 오늘도 보리 님과 이주미 선생님이 앞에 나가 <사람이나 새나>를 불렀다. 한 소절, 한 소절 부르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다 같이 돌림 노래로 불렀다.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너무 무겁지 않은 어떤 것이 가라앉는다. ‘죽으면’이라는 말이 이 노래에서처럼 실감있게, 나직하게 다가오는 때가 없는 것 같다. 죽으면, 죽으면……. 그리고 바로 아이들 순서가 이어졌는데 이번에는 5학년 아이들이 나가 자기가 쓴 시를 읽었다. 재길이, 진우, 한솔이, 슬기, 연주, 한재. 아이들이 쓴 시들은 하나 같이 모두 감동이었다. 아, 어쩌면, 어쩌면 저렇게.
모르겠다.
초 5 유슬기
우리가 촛불시위할때는 ‘전쟁이 아니고 평화가 오게 해 주세요 소원(아니면 꿈)이에요.’ 라고 하지만 학교에 가면 평화가 오는게 꿈이에요 라고 말을 안하고 나 역시도 못하겠다. 만약 그렇게 말하면 나만 다르고 창피하니까. 나도 그게 창피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꿈을 쓰라고 하면 가수, 간호사, 탤런트, 만화가 라고 얘기를 하고 쓰게 된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걸 쓰게 된다. 그리고 어쩔때는 연수가 부러울 때도 있다. 아니 부럽다. 당당하고 자기 요구를 잘 말하고 하는 연수가 부럽다. 난 아마 장래희망을 쓰라고 해도 전쟁이 난데 가서 다친사람 치료해주는 거요. 아니면 다른 거 평화에 대한 건 말못하겠다. 그럴 때면 난 내가 진짜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난 어떻게 하면 연수처럼 당당해질까? 난 계속 이런 식일거다. 연습을 해도 이럴거다. 난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될거다. 저번에도 쓰려고 노력했다가 결국에는 가수를 쓰고 말았으니까.... 난 어쩔때는 꿈 속으로 빨려들고 싶다. 거기에서는 공부방 생활도 재미있게 지내고 철거도 안되고 아무도 이사 안가고 항상 웃었으니까..... 그러니까 현실보다 꿈속으로 가고 싶다. 언제든지 갈 수 있으면 깨어나지 않을거다. 내가 현실에는 없어도 꿈속에서는 행복하니까. 하지만 어쩔때는 현실이 좋을때도 있어서 자지 않고 싶을때도 있다. 그리고 난 죽으면 꼭 공부방에서 잘 놀고 아무도 이사 안가고 노는 꿈만 꿨으면 좋겠다. 그리고 공부방이 안 사라지고 아무도 이사 안가면 평생동안 살고 싶다. 그리고 전쟁이 사라지면......
(2004년 9월 15일 수요일 날씨 흐림)
아이들이 읽어주는 시를 들으며 감동에 빠져 있다가 곧 이어서는 사회를 보는 아이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둘씩 짝을 지어 게임을 했다. 아리랑 게임. 즐거웠다. 이제 바깥으로 나가는 시간, 아이들이 접은 꽃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마을을 돌면서 만나는 분들에게 나누어 주는 거라 한다. 평화꽃. 지난 봄 아이들이 기도할 때 접은 꽃도 바로 이런 꽃들이었다. 꽃 모양도 저마다 다 달랐다. 아이들이 접은 종이꽃에 평화사랑의 리본, 파병반대의 리본을 달고 바깥으로들 나갔다. 이모 삼촌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무지개떡도 한 덩이씩 손에 들었다. 길재 삼촌이 쇠를 잡고 앞서고 기차길옆 풍물패가 그 뒤를 이어 길놀이를 해서 아이들과 이모삼촌, 그리고 순레단원과 다른 곳에서 온 손님들까지 길게 줄을 이어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집 앞에 나와 쪼그려 앉아 굴을 까는 할머니들, 마늘을 물에 불려 놓고 마늘을 까는 할머니들, 할머니들께 꽃과 떡을 드렸다. 평화꽃이에요. 할머니들은 꽃보다 더 예쁘게 웃으며 좋아했다.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이곳 만석동에서 줄어들고 있다. 해마다 힘들다, 힘들다 했지만 이번에 와서 이모에게 듣는 마을 사정은 정말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골목 안으로는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마을을 떠났다. 집장사들의 장난에 버티지 못하고 엄청난 빚을 내어 빌라로 떠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났다. 큰 이모가 곁에서 걸으며 들려준 마을 사정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정말로 우리가 마을 한 바퀴를 돌면서 만나게 되는 분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재작년 봄 내가 큰이모에 대한 글을 써야 할 것이 있어서 이 마을을 찾았을 때, 그 때도 이렇게 아이들과 마을을 돈 일이 있다. 그 날은 마침 부활절이어서 그 때는 삶은 달걀을 예쁘게 꾸민 것을 한 가득 들고 만나는 이웃 분들에게 나누어 드리면서 마을 한 바퀴를 돈 거였는데 그 때는 마을 사람들이 이보다 훨씬 많아서 달걀을 나누는 아이들도, 받는 분들도 흥이 한층 더했다. 만석동은 어떻게 될까, 기차길옆 작은학교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고맙다, 얘들아.
작은학교가 있는, 아직도 가난한 마을과 건너편 아파트 숲의 가운데 섬처럼 있는 공간. 그 공간에서 작은 놀이마당을 열었다. 꽃마차를 세우고, 기차길 아이들의 풍물에, 노래에, 신부님의 재미난 강연에, 유랑단의 노래에, 그리고 전범 민중재판 운동을 준비하러 온 사회진보연대 모임 사람들까지 노래에 마임을, 바끼통의 시치프스와 saba까지 노래를. 처음에는 아이들가 우리뿐이던 자리에 둘레 이웃에서 구경온 사람들이 많아졌다. 파출소에서 나온 경찰차도 몇 대가 되었다. 우리가 노래로, 춤으로, 풍물로 하는 평화의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이들이 그렇게 많아진 거였다. 나는 그저 바랄 뿐이다. 이 아이들을 지키는 일, 평화는 거기에서 온다. 이 아이들에게 바라는 건 언제나 지금처럼 서로 아끼며 기대어 살아주는 것뿐. 세상의 어른들이 이 아이들처럼만 산다면, 세상의 사람들이 이 아이들이 사는 모습을 조금만 배운다면 거기에서 평화는 되찾아질 것이다. 고마워, 고맙다 얘들아.
저녁은 작은학교 1층에서 비빔밥을 해 먹었다. 이모들이 집에서 반찬 하나씩 해 와서 비벼먹는 공부방표 비빔밥. 침이 꿀떡꿀떡 넘어가는 걸 억지로 참고 2층에 올라가 아이들과 그림책을 보며 놀았다. 밥을 다 먹고 난 뒤 아래층에서는 전범 민중재판 운동에 대한 간담회로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방에 반짇고리가 보였다. 어, 나 바지 튿어진 거 꿰매야 하는데 하고 바늘을 뽑아드니까 동훈 삼촌이 바느질 잘 해요? 하면서 이리 달라한다. 삼촌은 잘한다며 말이다. 삼촌이 튿어진 내 바지 가랑이를 꿰메 주었다. 따뜻한, 아주 따뜻한 저녁이었다. 그리고는 오늘 하루 보지 못하던 신문을 뒤적거리는데 어제 하루 바그다드에서만 예순 둘이 죽었다고 한다. 저땅은 여전히 피흘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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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월미평화백일장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니.. 죄송합니다. 거기 있던 학생들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대신 사과할 건 없어요. 그냥 준비가 서로 잘 안 되어서 그랬을 뿐이에요. 뜨레 님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