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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새해] ☆ 설백의 부용산을 오르다
2023년 1월 7일 토요일
♣ [프롤로그] — 새해, 그 순결한 시간의 백지 위에 희망을 그리며 …
☆… 2023년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시간(時間)의 시작(始作)’은 늘 우리를 설레게 한다. 앞으로 다가올 미지(未知)의 시간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해[年]’라는 글자는 ‘희다(白)’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다. ‘희다’는 것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백지(白紙)이고, ‘무언가 그리기의 바탕[素]’이 된다. 우리의 삶이란, 이 화선지의 빈 바탕에 ‘희망’이라는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이다. 어디 새해만이 그런가. 하루하루가 새날을 맞는 아침도 다르지 않다. 옛날 탕(湯) 임금은 아침마다 당신이 사용하는 세숫대야에 새겨놓은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즉 ‘진실로 날로 새롭게 하고, 날로 날로 새롭게 하라’는 글을 마음에 새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탕(湯) 임금은 만인이 흠모하는 성군(聖君)이 되었다. 그의 통치가 태평성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가 통치하는 나라는 ‘너와 나 그리고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살았다. 한마음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이룬 것이다. 이 글귀는 우리 옛 조상들도 수신(修身)의 좌우명으로 삼아왔고,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음에 새길 만하다.
☆…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극단적인 분열론 인해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 파행을 거듭하는 구태정치는 비루한 정쟁을 일삼고 있으며, 대내·외적으로 빨간 불이 켜진, 예측할 수 없는 경제 상황도 난맥이지만, 사회는 법질서와 기강이 무너지고 하루도 빠짐없이 패륜적이고 무도한 행태가 속출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공할 핵실험과 함께 미사일 발사를 감행하는 북한의 도발이 자행되고 있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도 국민적 분열상이 더욱 격렬하고 있으니 참담하기 그지없다. ― 그러나 우리는 이 난국을 슬기롭게 타개하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숙명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 20세기의 위대한 작가 미국의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그는 만년의 역작인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1952)에서 “어쨌든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다(Every day is a new day)”하며 포기하지 않는 불굴(不屈)의 의지(意志)를 희망(希望)으로 승화시켰다. 84일 동안이나 물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오늘만은 꼭 성공하리라’는 다짐을 마음에서 되뇌는 말이다. 그는 작품에서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야, 죽었으면 죽었지 패배란 있을 수 없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에는 물고기가 나에게 사색할 시간을 주었다고 여기면 된다.” 등의 어록을 남겼다. 소설 속 이야기는 잡은 고기를 지키지 못하는 안타깝고 슬픈 결말로 끝을 맺지만, 헤밍웨이는 이 작품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퓰리처상(1953년)과 노벨문학상(1954년)을 받는 영예를 안았던 것이다.
* [전날의 강설(降雪) 예보] — 작심한 삼우가 순백의 산을 오르기로!
하루 전날 —, 밤부터 중부지방에 많은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눈 소식을 듣고 평소 마음이 상통하는 세 사람이 전화를 통해 설경(雪景)의 풍미를 누리고자 산에 오르기로 마음을 모았다. 작심한 삼우(三友)는 고향 문경의 선·후배인 이기태와 이정식 그리고 필자이다. 1951년생 중원(中園) 이기태(李起泰, 73)는 필자의 고등학교 3년 후배로, 공직(총경)에서 은퇴한 후 두물머리에서 건강한 생애를 보내고 있고, 1962년생 이정식(李廷植, 61)은 말수가 적으나 속이 깊고 인정이 많은 후배이다. 아직도 현직(회사)의 전무로 근무하면서 지방으로 출장 가는 곳마다 혼자서 인근의 명산(名山)을 찾아 오르는 순정한 산 사나이이다. — 전날 밤, 양수리에 사는 중원이 제의했다. ‘양수리의 부용산이 우리 셋이서 눈 산행하기에는 아주 좋습니다.’ ― 우리는 한마음이 되었다.
전날 약속한 대로, 오늘 1월 7일 오전 10시, 우리는 양수역에서 만났다. 양수리에 사는 이기태를 비롯하여, 용인 수지에 살고 있는 이정식은 차를 몰아 달려오고, 필자는 긴 시간 전철을 타고 왔다. 아침에 출발할 때는 내가 사는 집 근처에는 간밤에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린 것 같았다. 그런데 전철을 타고 망우역을 지나고 나서 차창 밖을 바라보니, 풍경은 온통 하얀 눈 세상이었다. 서울의 동쪽인 이곳은 간밤 눈이 꽤 많이 내린 듯했다. 오늘 잘하면 눈부신 설경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 [부용산 산행 코스] *
양수역→ 남한강 바이크로드→ 용담리 부용샘→ 잣나무·낙엽송 수림→ 능선→ 산봉쉼터→ 하계봉 (전망대)→ 능선길→ 부용산 (전망대)→ 정상 (들마루 점심)→ (하산길) 샘골고개→ 신원리 샘골마을→ 되는턱고개→ 신원리 묘골 몽양 여운형 생가 / 기념관→ 신원역(승차)→ 양수역→ 두물머리 〈카페약국·천수〉의 성찬
* [오늘의 산행지] — 양수리와 신원리 사이에 위치한 부용산(芙蓉山)
부용산(芙蓉山)은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와 신원리 사이에 걸쳐져 있는 토산이다. 부용산은 한반도의 허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한강기맥(漢江氣脈)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오대산에서 서쪽으로 연면히 뻗어온 산줄기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앞에서 그 맥을 다한다. 남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부용산의 산세는 서쪽에 하계봉, 동쪽으로는 형제봉-청계산이 자리 하고 있다.
부용산(芙蓉山)은 수목이 울창하고 주변의 강물이 맑아 마치 연당(蓮塘)에서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서남쪽 신원리 묘골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고 산의 북쪽 부용리에는 조선시대의 명신 이준경과 정창손의 묘가 있으며 선조 때의 명신 한음 이덕형의 신도비와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근래 ‘포니신화’를 이루어 현대자동차를 오늘날의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키운 정세영 회장의 묘소도 있다.
* [한강기맥(漢江氣脈)] — 북한강과 남한강의 수계(水系)를 가름하는 산줄기
한강기맥(漢江氣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오대산 두로봉(1,422m)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북한강과 남한강의 분수계(分水界)를 이루며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산맥이다. 도상거리 162.6Km이다. 그 한강기맥은 남한 제6위 고봉인 평창 계방산(1,577m)을 지나 운두령-청량봉-삼계봉-횡성의 덕고산-운무산 등 큰 산을 두루두루 이어오면서 오음산-금물산-양평의 시루봉-용문산(1,157m)-유명산-소구니산-청계산-형제봉을 거쳐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부용산에서 그 맥을 다한다. — 한강기맥의 북쪽은 홍천군과 가평군이고 남쪽은 평창군, 횡성군, 양평군이 자리하고 있다.
웅장한 산세와 명산들이 즐비한 한강기맥은 오대산 아래에서 남으로 분기하는 주왕지맥과 청량산에서 북으로 분기하는 '춘천지맥', 삼계봉에서 남으로 분기하는 '영월지맥'과 '백덕지맥', 금물산에서 남으로 분기하는 '성지지맥'이 수려한 마루금을 이루고 있다.
한강기맥(漢江氣脈)은 남한강과 북한강을 가름하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이다. 그 남쪽으로 남한강 수계를 이루어 평창군 상원사 오대천이 정선의 동강(東江)으로 흘러가고, 보래봉에서 발원한 평창강에 주천강이 합류하여 서강(西江)이 이루는데, 정선의 동강과 평창의 서강이 영월에서 남한강에 유입된다. 그리고 횡성의 발교산(786m)에서 발원한 섬강(蟾江)이 횡성을 경유하여 원주의 부론면에서 남한강에 유입되고, 양평군 서쪽 금물산(775m)-성지봉(787m)에서 발원한 흑천(黑川)에 (중원산)중원천, (용문산)용문천, (백운산)연수천이 합류하여 양평군 개군면에서 남한강에 유입된다. 한강기맥 오대산 북쪽에서는 홍천의 내린천이 발원하여 인제에서 ‘소양강’ 본류에 합류하고, 운무산 북쪽에서 발원한 ‘홍천강’이 가평군 설악에서 북한강 청평호에 유입된다. 소양강과 홍천강은 모두 북한강 수계이다.
* [산행의 실제] — 양수역 출발 * 산행 기점 용담리 부용샘
오전 10시 30분, 양수역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하늘은 흐리지만 날씨는 그리 매섭지 않았다. 두물머리 주위의 풍경은 온통 눈부신 백설의 세상이다. 지금 눈은 그쳤지만 적설량은 10cm가 넘었다. 양수역에서 남한강 바이크로드—가정천 다리를 건너 산으로 향했다. 양수역을 통과하는 중앙선 철도는 청량리역에서 안동과 강릉-동해로 이어지는 KTX를 개통하면서 새로운 직선의 철로를 건설했으므로 기존의 철로는 남한강 종주의 바이크로드로 조성되었다. 우리는 바이크로드 용담터널을 저만치 앞두고 오른쪽 산 아래 있는 부용샘을 찾았다. 부용샘은 오늘의 산행들머리이다. 작은 파이프에 생수가 콸콸 흘러나왔다. 샘물 한 바가지를 받아 마셨다. 물맛이 아주 시원했다. 눈길 산행을 위해 샘 주변의 벤치에서 아이젠을 장착했다.
오전 10시 45분,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날씨는 흐리지만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날이다. 대기도 그리 매섭지 않아 간밤에 내린 눈이 산야에 소복이 쌓여 있다. 새해에 축복처럼 내린 서설(瑞雪)이다. 영하의 날씨가 아니어서 눈은 습설(濕雪)이었다. 완만하게 산길을 오른다. 산록에는 장대한 높이로 자란 낙엽송과 잣나무가 울창하다.
한참 동안 산등성이를 올라가 능선 길에 접어들었다. 길은 서서히 고도를 높이기도 하고 때로는 평탄하게 이어졌다. 참나무 등과 같은 낙엽수는 앙상한 가지 위에 잔설을 이고 있다. 한참동안 고도를 높여서 올라가다 보니 나목 사이에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소나무가 멋진 풍모를 드러낸다. 군계일학과 같은 설송(雪松)의 품격이 고고하다. 고도를 높여 갈수록 여기저기 우아한 자태를 지닌 설송들이 눈길을 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설경이다. 걸음을 멈추고 겨울산의 풍미를 느끼면서 눈 덮인 소나무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포즈를 잡기도 했다. 간밤에 눈이 내려, 참 절묘하게 때를 맞추어 설백의 산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능선길 산봉의 쉼터] — 따뜻한 차와 상주곶감의 차진 단맛
한참동안 가파른 산길을 올라, 처음으로 능선의 산봉에 올랐다. 들마루와 벤치가 있다. 잠시 배낭을 풀고 쉬기로 했다. 이정식 대원이 보온병에서 따라준 따뜻한 커피를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중원이 곶감을 내놓았다. 상주(尙州)에서 고향친구가 보내온 것이라고 했다. 하얀 분(粉)이 발린 곶감은 씹을수록 그 속이 부드럽고 달았다. 눈밭에서 맛보는 상주곶감은 그 특유의 향기와 자연산 단 맛이 일품이었다.
경상북도 상주(尙州)는 예로부터 ‘삼백(三白)의 고장’이다. 삼백(三白)이란 ‘백미’와 ‘명주’와 ‘곶감’을 말한다. 백미(白米)는 상주 낙동강 수계의 이안 들[평야]에서 생산되는 명품 쌀이고, 명주(明紬)는 상주 함창을 중심으로 누에치기로 생산되는 귀한 옷감이다. 명주실을 뽑아내는 누에고치가 순백(純白)이다. 그리고 곶감은 가을철이면 상주의 단감을 깎아 맑은 햇빛에 말리면 하얀 분(粉)이 생기기 때문에 삼백에 든다. 상주의 이 특산품은 모두 임금께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 [하계봉 정상, 전망대] — 두물머리가 내려다 보이는 …
다시 산행이 이어졌다. 한참동안 아래로 쏟아지다가 다시 가파른 산길에 접어들었다. 크고 작은 산등성이를 오르고 내리면서 눈밭 산행이 이어졌다. 그리고 가파른 산길을 치고 올라 오늘의 제1포인트인 하계산(下界山)에 올랐다. 까만 오석(烏石)에 단정한 정상석이 있고, 그 앞에는 두물머리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너르고 반듯한 테크 전망대를 시설해 놓았다. 양수리 주민인 중원이 하계산(下界山)을 설명했다. 여기에 오르면 신선(神仙)이 되어 저 두물머리 마을[인간세상]이 발아래 내려다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오늘 같이 인적이 드문 날, 순백의 설경 속에서 이곳에 올라보니 운무 속에서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과연 선경이다. 높은 곳에 오른 사나이의 호기이지만, 기분은 신선이 된 느낌이다.
다시 산행이 계속되었다. 우리가 나아가는 이 길은 ‘한강기맥의 부용산 구간’이다. 하계봉에서 오늘의 최고점인 부용산까지는 아직 3km 이상을 더 걸어야 한다. 급전직하의 내리막길이다.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 위에 눈이 쌓였다. 눈은 습설이어서 낙엽과 눈이 뒤엉겨, 자주 아이젠에 달라붙어 덩어리를 이루었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아주 미끄럽고 불편했다. 산길 한쪼 가장자리에는 원목을 박아서 안전 자일을 설치해 놓았다.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와서 능선 길에 접어들었다. 안부의 평탄한 길을 지난 능선은 다시 가파를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한강기맥을 가로질러 넘어가는 싸한 바람이 불어왔다. 오르고 내리는 것이 좀 힘들기는 하지만 곳곳에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설송(雪松)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 [한강기맥 능선 길] — 부용산으로 가는 길
아름다운 눈 풍경에 매료되어 겨울 산행의 풍미를 만끽하며 발길을 옮겨 놓는다. 이름 없는 산봉에 올랐다가 다시 각진 바윗돌이 널린 길을 내려 왔다. 안부에서 앞을 바라보니 아득하게 높은 산봉이 시야에 들어왔다. 부용산이다! 길은 가파른 산록을 그대로 치지 않고 산허리를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벤치가 있는 능선에 올라섰다. 여기서 부용산은 850m, 정상의 막바지는 지그재그로 시설된 가파른 테크 계단이다. 계단은 경사가 급하고 그 거리가 높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 ‘천국의 계단’처럼 느껴졌다.
* [부용산 전망대와 정상] — 순백의 장엄한 산세 그리고 정상석
오후 1시, 부용산 전망대에 올랐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고 운무가 짙어 남한강과 두물머리 풍경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온 하계봉을 비롯한 산봉들이 장엄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의 모든 풍경은 백설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한참 동안을 머물며 아름다운 설경을 가슴에 담았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산우들의 모습이 멋지다. 전망대에서 눈 덮인 묘지의 옆길을 지나 정상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나지막한 정상석이 장대한 설송을 배경으로 조용히 자라잡고 있다. 정상석에서 조금 내려온 평지 들마루에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했다.
* [부용산 하산길] — 정상에서 신원리로 내려가는 길
중원 이기태가 내놓은 커피를 나누어 마시며 환담했다. 강화에서 떠온 알칼리성 샘물로 끓인 커피는 짭짤했다. 하산지점은 ‘신원역’으로 잡았다. 길은 한강기맥 형제봉으로 가는 능선을 따라 가는 길이다. 아래로 쏟아지는 지그재그 산길은 경사가 아주 급했다. 낙엽과 눈[濕雪]이 뒤엉켜 아이젠 바닥에 눈덩이가 척척 달라붙었다. 한 순간이라도 발을 자칫 잘못 내려놓으면 미끄러지고 몸의 균형을 잃을 수도 있다. 스틱을 길게 하여 내리 찍고 몸의 균형을 잡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렇게 한참을 고전하며 내려왔다. 안부로 쏟아지는 길이므로 계속 내리막이었다.
오후 2시, 드디어 능선의 안부, 샘골고개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계속 직진하면 형제봉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북쪽]으로 가면 한음 이덕형 선생의 신도비로 갈 수 있는 목왕리-부용동으로 내려간다. 우측[남쪽]은 신원리 방향,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여기서 신원역까지는 2km이다. 이 샘골고개는 예부터 신원리에서 목왕리로 넘어가는 주민들의 통행로이다.
* [샘골고개에서의 하산] — 신원리 샘골마을로 내려오다
완만한 산길을 내려와 마을에 도착했다. 부용산과 형제봉 산줄기에 둘러싸인 신원리 샘골마을은 옛 마을의 흔적은 거의 없고 새롭게 지은 주택들이 산록의 적당한 위치에서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마을길은 포장도로, 아이젠을 풀었다. 이곳에서는 바로 신원역으로 내려갈 수 있지만, ‘몽양기념관’을 찾아보기 위해, 마을 앞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좌측으로 산 아래의 길을 잡았다. 그리고 ‘되는턱고개’를 넘었다.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눈덮인 반듯한 한옥과 담장 아래 너른 잔디마당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가 바로 신원리 묘골의 몽양 여운형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 [신원리 묘골] — 몽양 여운형 선생 생가와 몽양기념관 탐방
‘되는턱고개’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니, 좌측에 몽양 선생의 생가/기념관이 있고, 길 오른쪽에는 몽양교육·자료관이 건설 중이었다. 먼저 몽양기념관에 들어갔다. 기념관 관람은 유료이지만, 안내석에 신분증을 제시하여 경로우대로 입장할 수 있었다. 기념관 전시실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몽양의 가계와 성장과정, 그리고 선지자적 경륜과 철학, 특히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을 위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의 자료들을 산뜻하게 전시해 놓았다.
▶ 그런데 이곳 몽양기념관의 관장이 바로 평소 필자가 공경하는 김덕현 교수이다. 안동 출신의 김덕현 박사는 진주의 경상국립대학(지리학과)에서 봉직하다가 정년퇴임했다. 현재는 양평군 지평에서 자리를 잡고 살면서 연구와 답사를 계속하고 있는 분이다. 특히 해박한 지식과 경륜으로 우리나라 서원(書院) 연구와 구곡원림을 답사하고 있다. 지금은 몽양기념관 관장 겸 몽양평화대학 학장을 겸임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가 참여하는 국제퇴계학연구회에서 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퇴계학 관련 고전을 공부하고 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기념관에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드리고 인사와 함께 몽양기념관에 오게 된 연유를 이야기했다. 반갑게 전화를 받으면서, ‘기념관에서 직접 만나 따뜻한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 하며 아쉬워했다. 말씀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했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이곳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자는 회숙(會叔). 호가 몽양(夢陽)이다.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여운형(呂運亨)은 1886년 함양 여씨가 대대로 조상을 모시던 이곳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서 태어났다. 여씨(呂氏)가 이곳 묘골에 자리 잡은 것은 여운형의 8대조인 여필용(呂必容, 1965~1729)이 선친인 여규재(呂圭齋)의 묘를 모시고 관리하기 위해 1715년(숙종 41년) ‘영회암(永懷庵)’을 짓게 되면서부터였다. 여운형은 1886년 이곳 영회암에서 태어났다. (영회함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2011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여운형의 아버지 여규신(呂圭信)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東學)에 참여한 인물이었고 특히 그의 동생인 여규덕(呂圭德)은 최제우가 지은 노래 〈용담유사〉를 편찬한 동학의 중심인물이었다. 여운형은 14세까지 할아버지 아래에서 동학을 공부하였다. 동학의 ‘하늘이 곧 사람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이후 청년 여운형이 보여준 노비해방과 평등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1900년 여운형은 집안 족숙(族叔)인 여병현을 따라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당시 여병현은 배재학당의 영어교사였다. 배재학당을 중도에 그만둔 여운형은,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05년(고종 42년) 20세의 여운형은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달아 겪으면서 고향인 묘골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시기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소식을 접하고 거리로 나가 나라를 망친 조선왕조 집권자들에 대한 분노와 조선 민중의 자각을 주장하는 연설을 펼쳤다. 이후 지역에서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가 바로 대표적인 광동학교 출신이다.
여운형은 부친상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의 뜻을 지킨 후, 곧바로 집안의 노비(奴婢)를 풀어주었는데, 가슴속에 품고 있던 평등이라는 신념을 실천하였다. 23세 때의 일이다.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으며, 이 무렵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C. A)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기호학회에 참여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승동교회(勝洞敎會)를 출입하였다. 1911년 강원도 강릉에서 남궁억(南宮檍)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초당의숙(草堂義塾)의 교사가 되어 청년교육에 힘썼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에서 활동하다가 1917년 상하이[上海]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에 상해고려민친목회(上海高麗民親睦會)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조직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하고, 김규식(金奎植)을 상하이로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결정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힘썼으며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아동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일본을 방문하여 일제 고위관리들과 여러 차례 회담하면서 일제의 자치제 제안을 반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
1920년 사회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極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김구(金九)·손정도(孫貞道) 등과 함께 한인노병회(韓人勞兵會)를 조직하여 노농병 양성과 군비 조달에 힘썼다.
1923년 임시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였으며, 1925년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중국혁명운동이 실패한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2년 출옥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직에 취임하였으며,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직을 맡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2년 치안유지법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4년 8월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고 독립운동과 국가건설을 위하여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건국동맹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농민동맹(農民同盟)·부인동맹 등을 조직하였으며, 옌안(延安)의 독립동맹(獨立同盟)과 제휴하여 연합작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건국 준비를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해소되고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부주석(副主席)이 되었으며, 김구·이승만·안재홍·송진우 등과 만나 국가건설 방안 등을 협의하였다. 11월에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을 결성하여 당수직에 맡았으며, 미군정 장관의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曺晩植)과 김일성(金日成)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좌파 세력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에 기반을 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8월 조선인민당 당수직을 사임하였으며, 9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문제를 포함한 남한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다. 11월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과 합동을 제의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1947년 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 3월 신당 결성을 위한 준비 활동에 착수하여 5월에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김규식·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묘지는 서울 수유리에 있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몽양기념관] — 몽양의 생애와 관련된 모든 자료 전시
묘골의 몽양기념관에는 주자 유객문(留客文) 액자가 걸려 있다. …
人我人我不喜人我不人我不怒
我人人我不人我人我不人人我人我不人
欲知我人不人我人我不人人之人不人
일제 말 〈경성일보〉에 몽양(夢陽)이 썼다고 하는 ‘학병권유문(學兵勸誘文)’ 기사가 실렸다. 이에 대한 사실 여부를 따지기 위해 몽양을 찾아온 사람에게 몽양이 보여주었다는 〈주자유객문(朱子留客文)〉이다. 전시된 것은 2011년 구당(丘堂) 여원구(呂元九)가 쓴 액자이다. 몽양이 인용한 이 〈주자유객문〉은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누가 뭐래도 스스로 사람답게고 바르고 정당하면 된다는 몽양의 당당한 지론(소신)이 담겨 있다. 이는 일생 동안 지도자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민족에 대한 순수한 결의이기도 한 것이다.
원래 〈주자유객문〉은 주자(朱子)가 귀한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이 글을 보이면서 “이걸 풀이하면 그냥 가도 되지만, 만일 풀지 못하면 자고 가야 한다.”고 하여, 귀한 손님을 부득이 하룻밤을 묵게 하면서[留客] 밤새 유쾌하고 마음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학문의 길에 뜻이 맞는 좋은 친구가 오면 그냥 보내기가 아쉽다. 그를 하룻밤이라도 붙들어 놓고 학문과 풍류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아? (좋은 친구가 멀리서부터 찾아오니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그래서 주자는 그 특유의 문장 해석의 퀴즈를 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자유객문(朱子留客文)〉이다. 문장을 보면 사실 아주 쉬운 人, 我, 不 석 자로 이루어졌는데 선뜻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 [신원역] — 몽양의 친필을 새긴 각석[기념벽]
중앙선 신원역 출입문 앞에는 몽양의 친필 두 편을 새긴 ‘기념벽’이 조성되어 있다. 몽양 특유의 흘림체로 쓴 휘호인데, 하나는 ‘分則倒 合必立’(분열되면 망하고 합치면 반드시 일어선다)이요, 또 하나는 ‘血濃於水’(피는 물보다 진하다)이다. ― 앞서 다녀온 몽양기념관 로비 좌측에 몽양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좌상이 있는데, 그 뒤 하얀 벽면에 ‘나에게 독립운동은 평생의 사업이요, 통일된 조국은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라는 몽양의 말씀을 새겨 놓았다.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그 열정을 불태웠고 해방공간에서는 통일된 나라를 꿈꾸며 신명(身命)을 다했다. ― 신원역 기념벽의 몽양의 친필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쓴 것이었다.
* [하산 뒤풀이] — 신원역에서 다시 양수역, 그리고 강신화의 카페약국
우리는 ‘신원역’에 전철을 타고 산행의 출발지인 ‘양수역’으로 돌아왔다. 오늘 중원(中園) 이기태(李起泰)의 부인이 산행을 한 우리를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한다고 했다. 중원은 공직에서 정년을 맞으면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물 좋고 공기 좋은 양수리에 물러나 자리를 잡았다. 팔당호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파트를 장만하면서 인근의 텃밭에 유기농으로 포도를 재배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서예]를 쓰고 있다. 그리고 수시로 산행도 하고 강연을 하기도 한다. 아울러 서울 도심에서 크게 약국을 경영하던 부인 강신화(姜信和) 님은 세미원 부근에 7층 건물을 구입하여 그 1층에 약국을 개설하였다. 약물보다는 자연치유의 방법으로 주민의 건강을 도모하고자 개업한 ‘천수약국’이다. 그런데 지난해 그 건물 7층을 리모델링하여 아름다운 카페를 개설하면서 약국까지 옮겨왔다. 이른바 ‘카페약국’이다. 이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약국이다. 약국의 고객은 물론 일반 시민들이 찾아와서 건강 상담도 하고 차를 마시면서 환담하는 공간이다. 말하자면 ‘약국 사랑방’인 셈이다.
오늘 그 아름다운 카페에서 부인이 상을 차린 것이다. ‘영양호박죽’을 위시하여 ‘불고기’, ‘잡채’, ‘야채·과일 샐러드’ 등 맛깔스럽고 푸짐한 요리에다가 떡만두국도 끓여내었다. 반주로 명품 막걸리도 나왔다. 우리는 부용산에서 간식으로 대충 요기를 하였으므로 푸짐하게 차려낸 음식은 참으로 맛이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중원은 드라마틱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
일찍이 궁벽한 산골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공부하고, 세상에 나오기까지 눈물겨운 역정이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야간 대학을 나와 사법시험을 공부하던 중, 우연히 간부경찰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경위로 임관된 이래 … 청와대 경호실에 발탁·근무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모신 이야기, 이후 총경이 되어 김포, 일산, 은평 등 경찰서장으로 재임하면서 정도필성(正道必成)의 정신으로, 자신의 진급이나 보신을 위해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대민 봉사를 위해 정성을 다한 이야기 등이었다. ― 두물머리 창밖에는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호반을 수놓은 색색의 불빛이 즐비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에필로그] — 부용산, 순백의 설경 속에서 누린 행복
오늘은 참으로 복(福)이 많은 날이다. 우선 간밤에 내린 서설(瑞雪) 덕분에, 오늘 설백의 부용산에서 산행을 함께한 삼인(三人)이 삼복(三福)을 누렸다. 삼복이란 ‘순결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안복’과 ‘그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느끼는 심복’과 ‘ 그 속에서 몸으로 건강을 도모하는 신복’을 말한다. 순백의 설경(雪景)이 펼쳐낸 겨울 산의 장엄함을 보면서 눈이 맑아진 것이 안복(眼福)이요, 그 순수한 자연(自然)의 품속에서 무도한 세상의 얼룩진 마음의 때를 씻어낸 것이 심복(心福)이요, 자강불식(自强不息), 산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묵은 땀을 흘려서 몸을 단련한 것이 바로 신복(身福)이다. 하늘에서 내린, 하얀 눈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하산 길, 월파(月坡) 김덕현 박사가 관장으로 있는, 신원리 묘골의 몽양기념관을 탐방하여 몽양 여운형 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대의의 철학을 알게 되고, 민족의 정치가로서 몽양의 활약상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참으로 귀한 발걸음이었다.
무엇보다도 두물머리 카페약국 【천수】에서 중원의 부인으로부터 융숭하게 대접 받은 만찬은 참으로 넉넉하고 따뜻했다. 특히 부인의 정갈하고 정성어린 상차림이 감동을 주었다. 이래저래 오늘은 참 복이 많은 날이다. 두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