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 못 버린 등산복 하나가
산행으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구가했던 나만의 20년의 세월을 포기한 지가 5년이 지나도록 떨어 버리지 못한 마음만의 흔적을 무자비하게 버려야 한다는 처절한 생각에 엊그제 들어서야 인정없이 처분해 버렸다.
따로 나만의 옷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절 따라 가즈런히 담아둘 만한 옷궤짝도 없다. 20여 년 전에도 그랬듯이 소식 있으면 득달같이 걸쳐 들고나갈 등산복에 별나게 담아 둘 만한 물건도 없는 36L짜리 배낭이 언제나 변함없이 베란다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무심코 내 방 창문 밖의 매실나무 그늘을 바라보며 매실나무 심어 10년을 생각하다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등산복을 바라 보았다.
시절도 잊고 제 몫을 할 때를 잊은 먼지 앉은 20 년 넘은 미국에서 사 온 겨울용 "LA Gear 등산용 자켓" 하나~, 모 마트에서 산 KOL~라는 봄 재킷에 겨울용 청색 EID~, 해년마다 대학 동창회에서 공짜로 얻은 NO~~ FACE 점퍼 3~4 벌 등등 아직도 10년을 입어도 탈 없는 등산복이 아직도 못 버릴 멀쩡한 이것저것이 마음에 걸린다.
80대에 들어 내 아파트 뒷산 오솔길 말고는 한번도 해 보지 못한 서울을 감싼 산과 별난 봉우리와의 대화~ 이제는 불러 보고 기다려도 회답 없는 그 시절의 산인들은 간 곳을 모르고 허망한 메아리만 맴도는 참 하릴없는 무상의 환영뿐인데 나는 지금도 베란다에 걸린 바짝 말린 등산복을 말리고 있다.
1958년 3월~ 도봉산이 열리고 북한산 등반이 허용된 때가 분명치는 않지만 휴전되고 1950년 말이 가까운 시기였든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학도병특수부대출신인 서울문리대를 나온 K선배의 배려로 검정 찦차를 얻어 타고 군위수지구 (軍衛戍地域 ; 군통치지역)이었던 도봉산을 오르는 기막힌 순간을 갖게 되었다.
검정 찦차를 얻어 타고 민간인 신분으로 군위수지역(軍衛戍地域)인 도봉산에 간다는 것은 언감생심 생각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아침 성당에 갔다가 선배의 제안으로 산에 간다는 예정도 없이 대학 졸업 직전 처음으로 얻어 입은 감색 모직 정장에 넥타이 매고 검정 단화 신은 말꿈 한 신사 몰골로 검정 지프차 뒷칸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날의 등산을 알선해 준 선배는 앞 조수석에 앉고 미국으로 유학 떠나기 예정인 대학동기 C 군과 대학 1년 후배인 두 여학생 그리고 나는 좁은 찦차 뒷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고개도 편히 들지도 못하고 생전 처음 가보는 도봉산 주변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는 천정 낮은 어설픈 차 안이었지만6 25 동란있은 이래 처음인 도봉산 등산이라는 기막힌 Event에 가슴이 벅찰 뿐 불편함도 몰랐다. 청량리 시장에서 산 캔맥주 몇 개와 몇 가지 먹거리를 봉지에 담고 지금도 가늠도 안 되는 도봉산자락 산아래에 차에서 내려 월정사로 향했다.
고르지 못한 재갈길에 굽높은 단화가 거치적거린다. 생전 처음 올라 본다는 두 여학생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상기된 얼굴만은 싫은 표정이 아니다. 3월 중순의 날씨가 추운 듯하면서도 등짝에 돋는 땀이 배어날 듯 부담스럽지만 대수롭지 않다.
월정사 계곡에 자리 잡았다. 등산복 차림도 아닌 평상복차림에 등산이라는 신비함에 고단함도 모른다. 아침 나들이 할 때 문질러 준 단화 콧백이가 흙먼지에 누더기가 되었고 구두 뒤축하나가 떨어질 듯 틀어져 자칫하면 빠져버릴 듯하다. 한 여학생의 단화하나가 입을 뻥긋하니 곧 터질듯하다. 등산복차림도 않고 등산에 따라 나선 주제에 무비유환(無備有患)을 탓할 수도 없는 것~
그때가 지금으로 부터 65년 전, 북한산과 도봉산의 입산금지가 해제직전의 전인미답(前人未踏) 같은 시절의 어설픈 등산을 감행했던 시절의 에피소드였다.
그때 이후로 50년을 지나는 동안 등산을 몰랐다. 관심을 두지 않기보다는 동가숙 서가식의 바쁜 역정 속에 등산(산행)이라는 낱말조차도 사치일 정도로 내 생활 속에는 없었다. 60을 넘기고 경제 활동에서 완전히 소외되기 전 70이라는 고령자급에 들기 전까지도 그랬다.
늦깎이로 70에 들어서야 산행에 끼어 들었다. 농구화에 남방 티 걸치고 컵라면 사들고 보온병 허리에 차고 직장 새마을운동 책임자 쩍 연두색 새마을 운동모 눌러쓰고 50~60대 산행팀에 끼어들었다. 50~60대의 산행동료들의 고급스러운 등산복 모습에 기죽어 있었지만 경제 활동에서 소외된 주제에 감히 2~30만 원의 재킷이 내게 어울리기나 하겠는가?
용돈 생길 때마다 모았다가 장만한 유명 부렌드의 등산복 그리고 가죽 등산화가 지금 내 눈앞을 어지럽힌다. 걸쳐보고 신어 본 등산화와 등산 재킷.... 5년도 지나간 아지랑이 같은 희망은 어제까지 없었고 이제는 더더욱 없다.
창밖의 매실나무는 내일 백두산이 터질지라도 그 짙은 모습을 못 버리겠지만 후줄근히 걸려 있는 등산복은 내일을 모른다.
200 L 쓰레기 봉투에 미련 없이 구겨 넣었다. 노랑 티, 분홍 티, 검정티 그리고 회색 티 와 함께 내 몸속에 숨은 마음의 앙금과 더불어 깡그리 쑤셔 넣었다. 있을 것 같은 가는 희망과 미련을 먼지 털어버리듯 정신없이 쑤셔 넣었다.
휩쓸어 간 쓰나미의 광란에 내 몸도 허허로움 속에 가벼운 듯 하지만~
이를 어쩌나? 휩쓸려 간 것 같던 내 평생 처음 산 20만원짜리 미제 'LA GEAR 재킷' 하나가 댕그런히 베란다 한쪽에 시체처럼 누워 있구나.!
모질지 못한 내 마음 속 미련을 바로 저 20년 전 재킷이 아는 것 같아 텅 빈 베란다 가장자리에 소중하게 걸어 두었다. 적어도 내 땟국 밴 저 재킷 하나쯤은 나와 함께 함도 옳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 글 / 쏠 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