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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한 인생
본문/행전7:54-60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모든 인간을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추구하는 다른 것으로 참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항상 세상것을 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에게는 세가지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영입니다. 사람은 몸을 갖고 잇지만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영적인 부분을 모른채 육신의 정욕을 따라가게 됩니다.
둘째로, 혼입니다. 혼은 지식과 이성을 담당합니다. 이 혼은 생각하고, 정보를 집어넣는 지적인것입니다.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 중에 이런 혼적인 인간 즉 이성주의자, 학문에 집중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이성주의자는 초 이성적 사건을 믿지 않습니다. 이땅에 인간의 이성으로 해석할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이성을 이해않되는 것은 수용을 안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도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예수님께서 몇 번이나 특별히 베드로에게 하신 것 같이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16:21절)
라고 제자들에게 누차 말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예언대로 삼일 만에 죽음에서 주활하셨습니다. 은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성경 롬8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부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내가 믿어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라고 요한3:5절에 말씀하신 것 같이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온윺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난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즉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도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무덤에 내려갔다고 잠시 천국에 우리의 영혼이 머물지만 예수께서 이땅에 하늘의 나팔소리과 함께 재림하실 때 죽은 우리의 몸도 천국에 있는 영혼과 함께 만나 부활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마와 같이 그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직접 예수님의 손바닥에 난 상처와 옆구리에 창자욱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그런 이성주의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눈이 다시 떠야 구원을 얻게됩니다.
그런 살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자 도마는 그제서야 믿습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우리는 도마와 같이 그런 이성적인 신앙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세 번째로 사람은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신은 먹어야 되고, 쉬어야 되고, 육신은 편해야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육신적인 존재는 동물과 같습니다. 성경은 항상 육신을 영과 함께 충돌의 대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4-9절)
입니다. 또한 갈라디아서에도 있습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갈5:16-20절)
믿는 자들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영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영의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가 없이는 영적인 삶이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의 임금은 사단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는한 육신의 소욕에서 초월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앞에 서는 그 날까지 계속해서 이 육신을 쳐서 살아가야 합니다. 육신을 따라가지 않고 영의 소욕을 따라가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행복은 그 영의 소욕을 따라가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시각과 마음을 가질 때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도 여러 가지 종류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억지로 하거나 아니면 의무감으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런 일들로 통해서 감사와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의무감을 뛰어넘어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깊은 그 사랑으로 인하여 마음으로 다하고 나를 구원하신 그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며 영의 뜻을 추구한다면 그게 진정한 영적인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 중에서도 교인들 중에서, 이런 행복함을 느끼는 자는 별로 없습니다. 얼굴을 보면 행복한 얼굴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별반 따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얼굴로는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키에르 케고르라는 덴마크의 철학자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행복을 느끼느냐에 따라서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말초신경적으로 행복해 하는 이는 미적 실존의 사람이요, 도덕적 완전으로 행복을 누리는 자는 윤리적 실존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데 행복을 행복을 누리는 이를 종교적 실존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교회 나온다고 다 종교적 실존의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 하는 이는 이방인의 행복관이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는 곳에서 행복을 느끼는 이는 하나님의 행복관에 젖어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했던 사람들의 중기찬 기록부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성경에 직접적으로 행복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명기 33:29절의 말씀입니다.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는 행복한 자다 라고 선언 하십니다. 이땅에 가장 행복한 민족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같이 받은 민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고도 그들은 광야에서 얼마나 많이 배반하고 모세에게 불평하고, 드디어 우상숭배까지 자행하는 죄악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대로 하나님은 광야에서 불뱀에서 전염병으로, 이런저런 모습으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거의 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습니다. 그 사실을 고전10장 한 장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오늘 우리에게 경고 합니다.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1절에 이런 이스라엘의 심판의 사건이 본보기가 되어...라고 합니다. 과거 개역성경에는 “거울”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거울입니다. 그것을 쳐다보고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구원 받았어도, 이스라엘과 같이 행동하면 구원이 잃어버리게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했던 사람들의 줄기찬 기록부입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면 사자 굴속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도 영의 행복을 더 귀중하게 여겨 기도 하기를 즉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체적 아픔, 정신적 공포보다는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한 영적인 만족을 더 소중하게 여겼던 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했던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인 예수를 죽였노라고 맹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의 아픈 곳을 찔렀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스데반의 설교가 얼마나 귀에 거슬리는지 ⓵이를 갈았다고 합니다.
⓶그리고 안들리게 귀을 막았습니다.
⓷더 안들리게 귀를 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⓸아예 안들리게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리의 근원을 차단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율법에 정리되고, 권력에 희생되며, 재판이라는 공정한 절차도 없이 분노의 독기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독사의 자식들이 시커멓게 뿜어대는 광란속에서도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같이 얼굴이 빛났습니다.(6:15절) 스데반이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할수 있는 비결이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겠습니다.
1.진정한 행복은 성령 충만한데 있습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할수 있는 비결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성령이 충만했다는 이유롷 집사가 된 분이기 때문에 성령이 능 충만했다는 것은 의심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6장에 7집사를 선택하는데 그 자격을 뭐라고 합니까?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6:2-8절)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찌라도 영의 사람 즉 영의 인도는 받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영의 행복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행복한 것을 맛보지 않는 사람들은 육신으로 행복을 누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소욕와 영의 소욕이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성령충만히 받지 않으면 영의 소욕을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받은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어렵습니다.
바울이 성령 충만히 받기 전에는 히브리인으로 자랑 했고 바리새인 임을 만족해하였으며,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것에 만족을 누렸던 인물입니다. 가브리엘 문하생 즉 세상의 학문에 만족을 누리는 그런 자였습니다. 그러나 성령받고 난뒤 바울의 변화는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그렇게 추구했던 육신의 것들과 혼적인 것들을 예수를 만나니 전혀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아이에게 손에 과자를 들고 있어도 더 좋은 것을 주면 그것을 버리고 더 좋은 것을 쥐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성령의 사람들은 육신의 것들과 혼적인 것들을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중에 누가 제일로 행복한 교회입니까? 큰교회 짓고 편안하게 예배드릴수 있는 아늑한 공간을 가진 서울의 대형교회이겠습니까? 아니면 전주 안디옥 교회는 교회 재정의 60%이상을 해외선교 국내선교를 위해 보내어 교회짓는 것 포기하고 깡통처럼 생긴 그런 교회안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다른 것들로는 돈이 아까워 지금은 어떻는지 모르겟지만 과거에는 나무로 연료를 해서 교회안에 나무 타는 냄새로 자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교회 처음 방문한 교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교회 안에 따스한 히터가 아니라. 나무 땔감 냄새로 가득한 그 교회가 참으로 인상 깊었다는 소감을 남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그 체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직분을 받은자라고 하지만 아직도 그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한참으로 멀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제일로 좋아하는 말씀 중에 롬14:17절의 말씀입니다.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어떤 자에게 의와 평강과 희락이 충만하겠습니까?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반드시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그런 수준의 성령이 아니라, 행전2장에 오순절 날을 체험하고 성령세례를 받은 자만이 가능한 현상입니다. 사도행전이라는 말의 뜻은 사도들이 성령 받고 변화 받은 뒤에 어떻게 전 세계에 나아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는 성령행전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역사해서 나타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도하는 12제자를 변화시켰고, 그리고 7집사를 변화시켰고, 그들이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사도행전 전체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해답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입니다. 그분으로 충만하면 인생의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유기성 목사님이 한때 이런 배너를 만들어 한국교회에 가르쳤던 것이 바로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입니다. 예수 안 만나면 만족이 없습니다. 예수 안 만나면 육신의 소욕을 컨트롤 할 수가 없습니다. 에수 만나는 사건이 곧 성령 충만한 성령세례의 사건입니다.
2.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할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살벌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주목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 주목해야 하나닙의 행복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사람을 주목하는 신앙생활은 언제나 실패합니다. 목사도 주목의 대상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누구도 주목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란 완전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구원받은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곳이 교회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완전한 사람들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란 완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완전해 지려고 힘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절)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의 목표는 온전하신 주님의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온전한 것 같의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땅에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바로 주님의 완전함을 쫓아 가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육신을 갖고 있는 한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만 고정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시대의 모세처럼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한 것처럼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33:11)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8-19절)
그렇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나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 이상 좋은 신앙이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가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얼굴을 주목한 것처럼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얼굴을 주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잠8:17절에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무엇으로 허기집니까? 육신의 허기는 잠시만의 육신의 불만족을 채울 수 있지만 영적인 허기는 바로 예수님으로 체워야 합니다. 인생의 만족을 위하여 고기잡이 하는 베드로가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곧바로 배와 그물과 가족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하나님의 얼굴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시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다윗이 갈망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얼굴입니다. 그분을 뵙기를 원하였습니다. 얼마나 원했던지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이런 소원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에서는 실패한자로 분류될지 모르나 이 세상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성공한 행복한 자입니다. 우리는 이당에 다른 목적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스데반은 예수님게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을 것을 보고서야 하나님의 행복을 행복하였습니다. 예수님게서 서 계시다고 하는 곳은 성경에서 이곳 뿐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는 것은 예수님 예수님이었기에 예수님는 앉아 계실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위해 고통당하는 자의 편입니다. 교회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뽕나무로 지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스데반이 돌로 맞은 그 돌로 지어져야 합니다. 진정한 교회는 그런것들이 재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우리 개개인의 삶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여러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한주간 무엇을 위해 살았나, 이제부터 시작되는 또 한주간을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 론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주목하며 사는 자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냥 예수님을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막연히 예수님을 위한 종교생활이 아니라. 진짜 그분이 나를 알고 나도 그분을 아는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창자 그분과 얼굴과 얼굴로 대하며 볼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도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고, 적어서 마25장의 슬기로운 5쳐녀의 자리에 앉자야 하며, 달란트를 땅에 뭍어 두지 않고 직분과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 하며,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을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구원의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24장에서 이제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와 신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와 신자들이 명목상의 교회와 신자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이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세상의 지탄의 대상으로 전략 되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은 영적 핍박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1세기때에 그리스도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기독교를 이단으로 매도해서 핍박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더욱 그런 현상이 태풍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 행복의 근거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추구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했던 스데ㅐ반의 천사의 얼굴을 보고 사울은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의 회심을 다메섹도상에서 획기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얼굴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서야 변화지 않을 사람이 이땅에 어디 있겠습니까?
스데반의 하나님을 주목하며 변화된 천사와 같은 그 얼굴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때 현장에서는 살인자들이었지만 얼마 못가서는 사울은 바울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여러분이 행복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얼굴에 그것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수 많은 부정적으로, 때로는 사람의 피곤에 쩔어, 낙심에 빠져 잇는 자들에게 한가닥 희망으로 다가설수가 있을 것입니다.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34:29절)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모세도 그 얼굴에 광채가 빛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만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항상 그분에게 집중하고,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 생활하셔야 합니다. 환경과 장소는 달라도, 그곳이 부엌일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장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목욕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그곳이 바울과 실라 같이 옥중이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한다면 그곳은 천국이 되고 우리는 이땅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한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요일에 가까운 은퇘한 동문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적은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인생길에 좋은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며 축복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행복과 행운은 하나님을 만난 자입니다. 단순이 신자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행복한 인생입니다.
기도제목/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찬양을 드리기위하여(사43:21) 지음 받았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스데반처럼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어찌보면 구원도, 그리고 행복한 인생도 불가능하기에 이시간 기도할때에 먼저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보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시는 그분의 모습으로 내가 변화되기를 다함께 기도합니다.
둘째로, 스데반처럼 성령충만함뿐입니다. 우리들도 그냥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사도들과 신자들처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기름부으소서. 간절하게 성령님이 임하시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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