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산과 인간 사이에 적대감이 있는 듯이 말하지만,
영국의 위대한 산악인 윌프리드 노이스(Wilfrid Noyce)는
그의 저서 <Mountains and Men(산과 인간)>에서
“신을 갈망하던 자들은 산에서 신을 찾았고,
산은 굶주린 인간들에게 사랑을 베풀었고,
산은 탄압받던 자들에게 자유의 땅이었다”고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번개 치고 천둥소리 울리는 올림포스 산을
제우스를 비롯한 제신(諸神)들의 거처로 숭배했듯이,
네팔과 티베트인들은 지금도 히말라야 산정(山頂)을 여신들의 거처로 믿고 있다.
원시시대의 수렵기부터 인간들은 산에서 각종 식물의 잎과 열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사냥감으로 굶주린 배를 채웠으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적 또는 종교적으로 탄압받던 자들과 세상을 등진 은둔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산악지역을 도피처로 이용했다.
산이 산악인들의 활동무대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히말라야 산의 갠지스강의 발원지와 난다데비 분지 등지로,
그리고 티베트의 불교 신도들은 카일라스산으로 순례여행을 계속했다.
또한 중국의 도교 신봉자들은 사천성 아미산을 비롯한 여러 산 속의 동굴 속에서 신선이 되려고 수양생활을 했다.
또한 초기 기독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산 속의 동굴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지속했고,
로마 가톨릭교가 공인된 후에는 프랑스에서 가톨릭 신앙을 거부하던 이교도들이 산속의 동굴에 숨어 지내기도 있다.
사람들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부르짖던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도 한때 산 속의 숲에 은거했고,
산마루로 솟아오르는 무심(無心)한 구름과, 하늘을 날다가 지치면 돌아올 줄 아는 새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은둔생활의 정당성을 논하던 중국의 도연명 선생은 동양의 대표적인 은둔자였고,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누군가가 청산에 왜 사느냐고 물으면 웃음으로밖에 대답할 수 없지만 마음은 한가롭다”고
노래했던 당나라 시인 이백과,
산악지대에서 귀양살이하면서
“강 위로 불어오는 맑은 바람 소리는 귀로 들으면 노래가 되고,
산간에 떠오르는 밝은 달은 눈으로 바라보면 풍광이 된다”며
임자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라고 권유했던
송나라의 소동파 선생도 타의에 의해 은둔 생활을 했다.
또한 조선 단종의 폐위에 상심(傷心)해 학자의 길을 단념하고,
승려가 되어 전국을 떠돌면서 산 속의 암벽에 의지해서
솔가지로 엮은 오두막 속에서 낙엽을 그러모아 이불로 삼고 살았던
우리나라 생육신 김시습 선생은 정치적 이유로 산 속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과거에 동양에서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신앙의 대상이었고 또한 관조(觀照)의 대상이었다.
인간들이 악령의 거처로 외면했던 서양의 알프스에서 빙하를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등반을 시작해,
심신수양을 하던 법률가, 의사, 문인(文人), 산정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현시(顯示)를 목격하려던 목사와 신부,
산악미를 추구하던 미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등반활동을 이어가면서
알프스는 ‘유럽의 운동장’이 되었다.
초기의 산악인들은 고산의 난코스를 곰 사육장에 세워둔 비누칠한 장대처럼 오르기 힘든 신비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산은 서양인들에게 정복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은 산의 난코스를 돌파하기 위해 알프스 현지 주민들,
즉 수정 채취자, 산양 사냥꾼, 장작 패는 도끼로 빙벽에 스텝(발판이나 손잡이)을 깎으며
국경선의 험한 산마루를 넘나들던 밀수꾼들을 가이드로 고용했다.
가이드 야곱과 멜히오르 형제가 얼음 칼날능선을 말 탄 자세로 돌파하고,
가파른 빙벽에 사다리처럼 스텝을 깎은 덕분에 몽블랑의 브렌바 리지가 등정되었고,
가이드 베네츠가 그레퐁 암벽의 난코스를 돌파했기 때문에 영국 산악인 머메리의 초등이 이룩되었으며,
피켈의 날도 박히지 않을 만큼 좁은 난코스 크랙을 가이드 크누벨이 피톤도 사용하지 않고 돌파했기 때문에
제프리 윈스롭 영의 그레퐁 메르데글라스 벽의 직등이 이룩되었다.
이와 같이 알프스의 황금시대와 은의 시대에 이룩된 대부분의 위대한 등반은
뛰어난 등반 기량을 지닌 가이드들의 수훈(殊勳)으로 이룩되었지만,
역사는 강자들의 기록이기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중국인)이 번다”는 속담처럼,
이 등반의 명성은 등반을 기획한 영국 산악인들이 차지했다.
가이드들이 빙벽에 스텝을 깎을 때 사용했던 집 도끼는 피켈로 발전했고,
스텝을 깎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크램폰(아이젠)이 발명되었다.
그리고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바위 절벽에 나무 사다리가 등장했고,
바위 틈새에 쐐기로 박아 사용했던 돌멩이나 나무토막은 피톤으로 둔갑했으며,
피톤을 박을 크랙조차 없는 바위절벽에 드릴(Drill·착암기)로 구멍을 뚫고,
거기에 익스텐션 볼트(extension bolt)를 사다리처럼 박아 난공불락의 루트를 돌파할 수 있게 되자
이 세상의 산에 인간이 오를 수 없는 절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클라이머들은 세상사에서 얻기 힘든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암벽의 이 홀드에서 저 홀드로 리드미컬하게 등반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절벽에서 춤을 춘다’ 또는 ‘절벽에 온몸으로 시(詩)를 쓴다’고 표현한다.
자연보호의 차원에서 암벽에 볼트 사용이 억제되었고,
피톤 대신 너트나 프렌드(암벽 등반장비)가 발명되어 사용되었고,
알프스의 가이드 없는 등반이 히말라야의 셰르파 없는 고산 등반인 알파인 스타일 등반으로 이어지고,
무산소 고산등반, 프리클라이밍 등반법이 출현하며
마침내 산의 등정 업적 자체보다 정당한 등반 방식을 더 중시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과거에는 등정자들이 산의 정복자로 행세했으나,
인간이 어떤 산의 정상에 잠시 머물렀다고 해서
그 산을 정복했다는 생각은 과대망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미 여러 등정자들의 입을 통해 반복해서 주장되었다.
산악지대에서 성장한 사람들 중에 산악인이 된 사람이 허다하다.
산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라고,
봄철에 산 꽃나무 그늘에서 눈발처럼 날리는 꽃잎들과 거기 모여드는 나비들과 벌떼,
그리고 가을바람에 푸른 하늘에 참새떼처럼 휘날리는 낙엽들,
겨울철에 전나무 가지에 매달린 고드름이 햇빛에 다이아몬드 빛깔을 띠는 모습
그리고 안개의 장막이 걷히면 병풍처럼 둘러선 아름다운 청산(靑山)의 풍광을 바라보며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평생 산을 떠날 수 없다.
윌프리드 노이스도 영국 북부 웨일스의 산악지대에서 성장해 유명한 산악인이 되었다.
그는 여덟 살 때부터 주변의 산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재학 시절 에베레스트 등반대장을 역임한 브루스 장군을 만나 크게 영향을 받았고,
또한 스노돈에서 암벽등반 중에 영국의 위대한 산악인 제프리 윈스롭 영을 만나
위대한 산악인이 되려고 결심했다.
그는 스노돈의 크로기 암장에서 암벽 등반 기술을 익히고
벤네비스봉에서 빙벽 등반기술을 익힌 후,
알프스로 건너가 동료 브래들리와 바이스호른의 남벽, 마터호른 츠무트 능선, 융프라우 북동릉 등을 등정한 후
샤모니에서 당대의 위대한 산악 가이드 아르망 샤를레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는 제프리 윈스롭 영과 가이드 크누벨의 발자취를 따라
가이드 샤를레와 그레퐁의 메르 드 글라스 벽을 직등했으며,
에규 베르테와 몽블랑 브렌바 벽의 ‘붉은 상티넬’ 루트를 등정했다.
그는 군 입대 후 인도로 파견되어,
거기서 가르왈히말라야와 시킴 지역의 여러 봉우리들을 답사했다.
그는 1953년 영국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참가해
셰르파 아눌루와 단 둘이 로체 빙하의 좌측 빙벽에 지그재그로 스텝을 깎고 오르다가
스노 브리지도 없는 크레바스를 과감하게 건너뛰고
90m 위쪽에 나타난 마지막 크레바스를 돌파한 후 로체 빙하 상부에 도달했다.
그들은 기나긴 설사면을 대각선으로 트래버스하고
제네바 스퍼 상부를 거쳐 강풍이 몰아치는 사우스 콜의 캠프 예정지에 짐을 운반해 에베레스트 초등에 크게 기여했다.
1957년 노이스는 안나푸르나 산군의 정확한 지도 제작 임무를 띤 등반대에 참가해,
여신의 거처로 입산허가를 받을 수 없던 마차푸차레를 등반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들은 여러 난코스를 돌파하고 정상에서 가까운 지점에 도달했을 때 폭설을 만나 퇴각했다.
1962년 노이스는 러시아의 파미르에서 거행된 영국-러시아 친선 합동등반에 참가했다.
그는 코뮤니즘봉(7,495m) 등반을 앞두고 훈련등반 차 가르모피크(6,595m)를 등정하고 하산 중에
로빈 스미스 대원과 함께 눈사태에 휩쓸려 1,200m를 추락하여 사망했다.
그의 저서로는 <마차푸차레 등반기>, <Climbing the Fish's Tail>, <사우스 콜(South Col)>이 있다.
국판 160쪽. 1947년 영국 하젤, 왓츤 앤 비니 출판사 간행.
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