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0. 추수감사절 주일예배설교
시편 136편 1~26절
감사 늘리기? 늘어날 수밖에 없는 감사!
■ 한국교회 안에는 감사에 관한 오래된 유머가 있습니다. 사실 매우 썰렁한 유머라 소개하기가 민망은 합니다. 그래도 이해를 구하며 소개하겠습니다. 의미는 있으니까요. ‘감사에는 감과 사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에 빠지지 않는 과일이 감과 사과입니다.☺ 이해를 구하기는 했지만, 역시...☺
오늘 본문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모두 몇 번 나오는지 세보시겠습니까? 26번입니다. 절마다 한 차례씩 나오니 26번입니다. 그래서 시편 136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왜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하라!”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 외에는 달리하실 말씀이 없으신 걸까요? 아닙니다. 어디 이 말씀만 있겠습니까? 하실 말씀이 많이 있지요. 예배하라, 기도하라, 찬양하라, 기뻐하라 등등... 하실 말씀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조건이 ‘감사’입니다.
감사 없는 예배, 감사 없는 기도, 감사 없는 찬양, 감사 없는 기쁨은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행위에는 ‘감사’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라!”가 신앙의 최고 권면이고, ‘감사’는 신앙의 최고봉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삶, 감사하는 사람은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감사’는 삶의 승리입니다.
이 사실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에 감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모든 절(節)에서 “감사하라!”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마다에서 발견하는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입니다. “인자”(仁慈)는, ‘어진 사랑’, ‘어머니가 베푸시는 어진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러 다른 성경번역본에서는 “인자”를 ‘사랑’ 또는 ‘한결같은 사랑’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어진 사랑을 영원히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1절을 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분명하죠?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감사가 인자하심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특별한 강조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원함”입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렇다면 이 강조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어진 사랑은 한 두 번이나, 일정 기간 동안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진 사랑은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것임을 말씀하심입니다.
이렇게 영원하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그 어떤 것들보다 다르시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1~4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무엇이 다르신지를 찾으셨지요? 1절에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선(善)들과도 다른 “선”이심을 말씀합니다. 2절에서는 그 어떤 신(神)들과도 견줄 수 없는 뛰어나신 “신”이심을 말씀합니다. 3절에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주인(主人)과도 견줄 수 없는 뛰어나신 “주님”이심을 말씀합니다. 4절에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참으로 1~4절 말씀의 핵심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이 베푸시는 어진 사랑은 그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사랑이자, 영원하신 사랑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감사드려야 마땅하겠지요? 아멘!
■ 시편 기자는 1~4절만 가지고도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이유를 충분히 이해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감사드려야 할 이유와 내용을 5절 이하에서 더욱 전개합니다. 불필요한 과한 일이다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불필요한 설명이 아니라 너무도 필요한 설명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자주 놓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설명이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그 과한 듯 너무도 필요한 5절 이하의 설명은 무엇인가요? ‘창조하심’, ‘구원하심’, ‘지켜주심’, 그리고 ‘공급하심’입니다.
1. 시편 기자는 5~9절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이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을 나열해 볼까요? 하늘, 땅, 물, 빛, 해, 달, 별... 등입니다. 그리고 이 기본적인 것에 사람을 포함해 동물과 식물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포함해 모든 동물과 식물들은 하늘, 땅, 물, 빛, 해, 달, 별들에 기대야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것들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편 기자가 “감사하라!”는 권면을 하지 않아도 당연히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자주 놓치고 사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에게 건네는 시편 기자의 권면은 잔소리가 아니라 거룩한 음성입니다. “감사하라!”
2. 다음으로, 시편 기자는 10~16절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면서 이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통해 우리의 구원의 역사를 되짚습니다. 10가지 재앙에서부터 홍해와 광야를 건너게 하신 그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게 한 후,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떻습니까? 기억나십니까? 그 드라마틱했던 나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시면, 더 이상 “감사하라!”는 권면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 고맙습니다!”를 연발하게 될 것입니다.
3. 이어서, 시편 기자는 17~24절을 통해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설명하면서 이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기자가 나열한 왕들은 가나안의 터줏대감 격인 왕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이들을 싹 정리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물론 정리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을 정리했고, 결국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약속하신 기업을 드디어 선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켜주심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늘 이렇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배신입니다. 그러므로 배신이 아닌 몇 배의 신앙을 더 해 감사하길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25절을 통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설명하면서 이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하심’, ‘구원하심’, ‘지켜주심’에 대해 감사할 것을 권면한 후, 이어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해 감사할 것을 권면합니다. 양식을 공급하심입니다. 이것은 입을 것과 잠 잘 곳도 포함된 공급하심입니다.
그런데 이 공급하심의 대상이 “모든 육체”입니다. 일단 사람이 떠오릅니다만, 사람만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모든 육체”입니다. 사람은 당연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동식물, 미생물까지 포함됩니다. 이렇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의식주를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만이 아니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 덕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음으로 양으로 인간인 우리의 도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돌보시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은 엄청 반색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 베리 베리 땡큐~”
■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하심’, ‘구원하심’, ‘지켜주심’, 그리고 ‘공급하심’에 대해 감사드릴 것을 권면한 시편 기자는, 그의 권면의 마무리를 정말 멋지게 합니다. 26절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어떤 수식어도 따라올 수 없는 가장 간결하지만 가장 큰 언어를 사용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보좌, 어느 것도 다다를 수 없는 자리, 바로 하늘, 그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지켜주시고,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감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감사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26절을 어느 영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Praise God in heaven!” “찬양하라!” 그렇습니다. 감사는 찬양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은 찬양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 오늘 우리의 감사가 노래의 날개를 달고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길게 길게 날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