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65일간 바다를 걸은 남자 그랬다. 동반자에게 소중한 것은 서로 일치해야 한다는 열망이 아니라 서로를 견뎌야 하는 그 거리를 끝끝내 바라보는 것이라고.
그는 또 황안나의 탄력과 홍은택의 몸매, 김남희의 기운과 김훈의 눈길을 갖고 싶은 욕구가 있다 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아내가 갖고 싶다고 해야 하나.
옆지기는 장인 어른의 병상을 떠날 줄 모른다. 정성이 닿은 까닭인지 혼자의 거동도 가능할만치 웬만하게 호전된 지금도 아침 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장모님의 빈자리를 꼭꼭 채워낸다.
그렇다면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노마드는 아니어도 현대의 10억 노마드의 일인 쯤엔 속하거나 속하고 싶은 자로 차이를 인정 받기 전,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입원 2주 째, 사위라는 허울로도 먼 길 떠날 수는 없다. 옆지기와 같이 병원에 들러 문안인사 하고 잠시 뭉그적거리다 드디어의 바람 쐬고 오라는 말에 못이기는 척 할 뿐.
최소의 명분은 있어야 하니 병원을 에두른 천마산과 장군산, 진정산 산모롱이 걷기가 편하다. 비 갠 봄의 날씨에 마음도 가뿐할 것.
■ 일시 : 2010년 1월 30일 ■ 코스 : 천마산 - 장군산 - 진정산 - 두도전망대 - 암남공원 - 송도해변
천마산(324m) 전망대의 북동쪽 조망.
산은 높이가 낮은 지역의 산이라 하나 부산의 여느 산과 같이 사방 해안의 조망이 눈부시고 편안한 걷기에 맞춤인 산이다.
새벽에 봄을 재촉하는 비가 아주 조금 내린 터에 하늘은 흐려 시야가 좋지 않다. 하지만 무슨 대수일까.
우측의 민주공원과 가운데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좌측의 영도다리 저 너머의 황령산과 장산, 오륙도까지 내 마음엔 다 그려지는 것을.
동쪽으로는 앞서의 공동어시장과 너머 영도 봉래산과 서구를 잇는 남항대교가 분주한데
청춘의 피어나는 기운은 아니어도 성숙한 장년의 저력은 여전하다.
서로는 감천항과 저 멀리 아미산과 몰운대.
남쪽엔 파란색 지붕의 남부민동과 우측의 하얀 건물인 장인어른 입원한 고신대복음병원,
송도 앞바다 그리고 우측의 오늘 내 걸어갈 장군산(114m), 진정산(156m)과 앞의 두도.
그리고 북서의 감천동과 뒷산인 옥녀봉(252m), 너머의 시약산(515m)과 구덕산(565m).
파란 지붕이 산의 고갯마루까지 물들이고 층층의 밭이 산의 턱 앞까지 일구어졌다.
화전과 다랭이논은 벽촌의 유물인줄만 알았더니 이곳에선 엄연한 살아있는 역사.
파란 지붕은 방수회사의 탁월한 선택이라 할까. 알록달록 조경은 더 슬펐으리라.
사람들은 그저 쉽게 달동네라 했다. 옛사람 시흥의 농월은 간곳 없고 모진 목숨의 절규만 다닥다닥 붙었다.
저 산, 옥녀는 기름기 빠진 허세로 말라간다. 지문 지워진 채 찰 진 속살을 그리워하며.
저 아래 옆지기와 장인어른 도란도란 대화가 들린다. 소녀와 아빠의 대화.
이곳서 꼭 닮은 강원도 사투리의 형제를 만났다. 초행에게 길도 일러주고 사진도 찍어 주었다.
그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서울 있는 동생이 그리웠다.
마루금을 이어온 산은 더 갈 곳 없는 길에서 도로 허리춤으로 길 내어
저 위 천자정과 그 아래 조각공원을 휘감아 아래의 해광사로 길 이을 것이다.
천마산 조각공원 광장. 서슬 샛노란 깃발이 아우성이다.
자연에 문화를 더한 광장이라면 아고라의 생동은 아니어도 좀 젊잖으면 싶다.
예술적 표어는 아니어도 자연과 예술에 그럭 어울리는 강조였으면.
산의 고개에 이리 저리 둘러 길을 내고 곳곳에 조각 작품을 식목하듯 하였다.
작품은 장기철 작가의 '자연으로의 회귀' 나무의 몸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형상화 하였는데 쉽게 와닿았다.
천마바위에서 바라본 조각공원과 정상의 성석봉수대. 정상서 좌측의 철탑 방향으로 쭈욱 걸어 휘돌아 이곳에 닿았다.
바위의 노인.
바다를 바라보는 시선이 하염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한 점 배와 같이 부유(浮遊)했던 한 생애를 회상하는 걸까. 버둥거리며 살아낸 하루하루가 여태 억울한 걸까.
하여가의 자조일지언정 억울하다 할것인가. 용케 살아내었구나, 아등바등 부질없다 할것인가.
아니다. 성성한 백발의 곧은 등은 자긍. 이만하면 되었다, 달래는 오유지족.
장군산은 들머리부터 날머리까지 내내 예비군교장이다. 지나가도 되나 싶게 어색하게 길이 나있다.
정상인 헬기장에서 뒤돌아 서서 내 걸은 천마산을 마음에 담고 허위허위 이어 걷는다.
송도해변 뒤편의 천마산을 휘두르고 좌측의 장군산을 이어 걸었다. 장군산은 마루금을 잇지 못하고 내내 산허리를 걸어야 했기로 아쉬웠다.
다져지고 다져진 길. 얼마나 많은 이들의 걸음이 보태졌을까.
인적 없는 산모롱이엔 봄을 기약하는 숲의 설렘이 가득.
기다림. 그리움.
진정산의 해안길을 걷는다. 층리(bedding)가 선명하여 아름다움이 더한다.
무겁게 짊어지고 해안에 닿아 세월 낚는 강태공의 심사가 오롯이 부럽다.
두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두도. 이제 땅끝이다. 더 갈곳이 없다.
암남공원의 해안길은 5km 남짓인데 수려하기로 이를 데 없다.
한참을 넋 놓는데 마침, 배 한 척 물결이며 지나니 고려 시인 강일용의 한줄 시가 흥을 더한다.
푸른 산 허리를 베며 날으네 (飛割碧山腰)
암남공원 주차장의 부자. 아들에게 아버지는 세상 최고의 낚시꾼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어이 꿈을 낚아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기어이 꿈이 되어줄 것이다.
해안의 노인.
말없이 부지런한 손길 위로 흡사 접힐 듯 굽은 허리춤이 섧다.
그랬나 보다. 아마도 할배가 바라본 것은 할매였나 보다.
허리 들어 잠시 쉬어가면 할배의 눈짓이 닿으련만 연신의 손길에 허리펼 참은 난망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문득 그리움이 아닌 처절한 그리움.
할배와 할매는 이미 아는 것이다. 서로를 견뎌야 하는 그 거리를.
저만치 일상이 어엿하다. 나와 옆지기, 유목민과 정착민의 간격 또한 어엿하다.
말 없는 할배의 사랑법을 배워야 한다. 서로를 견뎌야 하는 그 거리를 이해해야 한다.
문득 철없는 동백이 붉다. 사려깊고 배려깊은 옆지기에게 저 꽃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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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익청(香遠益淸)의 연꽃과 같은 이. 멀리서도 그 향기가 맑게 느껴지는 따뜻한 이.
옆지기가 그렇다. 천성의 유목민을 사랑하는 옆지기.
다산은 수종사를 거닐어 지은 <유수종사기>에서 세가지 즐거움을 이렇게 말했다.
유년 시절 노닐던 곳을 장년이 되어 이르게 되면 이는 한 즐거움이라. 곤궁한 시절에 지나던 곳을 뜻을 이루어 이르게 되면 이는 한 즐거움이라. 외롭게 홀로 오가던 곳을 아름다운 손들과 좋은 벗들을 이끌고 이르게 되면 이는 한 즐거움이라.
그 말이 과연 와닿으니 그에 비유하여 걷기의 즐거움에 옆지기 사랑하는 마음 담은들 선생에 누될까.
걷다 문득 고운 꽃을 보아 아내 얼굴 떠올리면 이는 한 즐거움이라. 걷다 문득 파란 하늘 만나 아내 얼굴 그려보면 이는 한 즐거움이라. 걷다 문득 손잡고 다정한 노부부 만나 우리 부부 생각하면 이는 한 즐거움이라.
첫댓글 장인어른 병구완에 애초 예정된 설악 소승폭 등반 접고 병원 근처 홀로 나들이 했습니다. 고생하는 옆지기 생각이 문득 문득 동행한 걸음에 봄이 지척인 듯 하였네요~~~ 2월 오캠 회원님들 모두 힘찬 출발하세요!
제목에 "실은 옆지기"에서 "실은" 은 무슨 뜻인가요 팬다님..
숨길 수 없는 아내를 사랑하시는 맘이 동백꽃처럼 짙게 묻어나네요 ~~ 요즘 팬다님 후기로 자주 추억에 빠져봅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선조 때 학자 송한필의 우음(偶吟)이 생각납니다. '간 밤 비에 피어서 아침 바람에 지누나...' 당장은 동백꽃의 붉음인데 돌아서면 잊어 버리고 맙니다ㅠ.ㅠ
팬다님! 학창시절 영도에서 동백꽃에 얽힌 사연이 애달픈 부부애라고 기억합니다. ㅎㅎ 같은 꽃이라도 긍정과 부정이 존재하는군요 ?
조도의 러브스토리가 단연 궁금합니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주시는 팬다님도 잘 몸 추스리시고 더 빠른 차도 있기를 기원합니다.
덕분에 많이 좋아지셨어요^^ 금주말경엔 퇴원도 하실 듯!!!
변산 내소사지나 직소폭포를 건너다 서해바다를 본적이있습니다.
사진의 송도부근인가요? 참 좋은곳같네요
예~ 부산 송도해변과 그 주위입니다^^
아..착하고 이뿌게 살아야지..^^ 고운노래가 꼭 팬다님 맘 같아요..
그래야 하는것인데요^^ 마음 뿐 늘 실천 부족입니더 ㅠ.ㅠ
팬다님 글보면..잊고 지내는 소중한 것들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맘을 갖게 해주셔서..감사해요..겸손하시긴..ㅎㅎ
저에게도 암남공원의 고등어낚시 추억이 있습니다. 욕구는 욕구일뿐 오해하지 말아야겠죠? ^^ 정말 완벽한 비유라서 저 또한 그런사람 되고 싶은 욕구가 생기네요.
재미삼아 비유입니다^^ 좋게 보아주시어 고맙습니다~
요즘 팬다님 덕분에 부산 구경... 지대로 합니다...^^ 부산 살면서 금정산 오른게 다였는데... 바다를 따라 호젓하니 걸을 곳이 많군요... 장인어른의 빠른 회복을 다시한번 기원합니다. 시간 나면 집사람하고 부산의 바닷길을 걸어보고 싶네요^^
저도 흔치 않은데 자인어른 병구완이 핑계가 되네요 ㅠ.ㅠ
팬다님의 아름답기까지 한 글을 읽다보면 참으로'가족사랑'이 느껴지네요.....^^
마음 뿐, 취미가 서로 달라 아쉽네요 ㅠ.ㅠ 이해를 서로 해야하는 부분인데 옆지기는 그럭절 이해 하지만 저는 아쉬워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장단점이 있겠지요^^ 저도 이 노래가 듣고 싶었어요~~~~~~
아~ 팬다님의 어깨에 힘겨움이 느껴집니다^^;; 세상 사는게 다 그렇지요 별반 다르지 않지요~ 그래두 님에게는 사랑스런 가족과... 산이 있잔아요 ㅎㅎ 더 행복해질거라 믿어집니다~
옆지기 저랑 같이 아주 간혹이라도 산길, 들길 동행해주면 하는데 욕심입니더^^
기다림 그리고 그리움 ~~~ 저를 영원한 팬다님의 팬으로 만들어주시네요 ㅎㅎ 언제나 이쁜단어와 모습들에 힘을얻고 살아가네요 고맙습니다
채식주의님~ 맑고 밝은 모습에서 기운 얻습니다^^
아 천마산 제가 천마산 아래 감천이란 곳에서 초등학교를 나왔죠. 어린시절 그 가파른 길을 걸어서 천마산에 오르곤 했습니다. 그 때의 기억이 팬다님의 후기를 보니 새록 새록 나오네요. 참 많이 바뀌었네요. 팬다님의 후기로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 올립니다^^
그 시절의 천마산은지금과는 많이도 다르겠지요? 감천고개 감정초등학교가 들머리더군요^^
음악 가사가 좋고.. 옆지기님에 대한 팬다님.. 마음이 좋아보입니다.
실천이 그만큼 따라야 하는데 ㅠ.ㅠ 고맙습니더^^
옆지기란 표현 좋으네요 노래두 이뿌고...천마산이 부산에도 있군요
부산살며 저도 처음 찾은산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