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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여기는 부산이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기간 동안 영화제 참석자들이 매일 읽을 수 있는 ‘데일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아무리 일을 위해 찾아왔다지만 영화제가 개막되니 다른 영화팬들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콩콩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10월 4일 개막한 부산국제영화제는 벌써 17회를 맞는다. 열일곱이라는 풋풋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부산영화제는 성인(?)이 된 지 오래다. 아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으면서도 화려한 영화제로 자리매김했고 세계 영화계에서도 중요한 행사 중 하나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워낙 짧은 기간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다 보니 부산영화제에 대한 온갖 수사(修辭)는 한국 특유의 ‘자뻑문화’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부산영화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약간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싸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스스로도 약간은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게 되는데, 부산영화제에 관해 말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된다고 할까.
그렇다고 굳이 이 자리에서까지 그런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세계 영화계가 부산영화제를 통해 아시아 영화시장에 접근하려 한다거나 해외 게스트들이 부산을 찾는 관객들의 뜨거운 열기에 놀라 감동받는다거나 시작된 지 몇년도 되지 않은 아시아필름마켓이 영화 비즈니스맨들의 중요한 회동 자리로 떠올랐다는 등등의 이야기 말이다.
그 보다는 부산영화제가 17년이라는 세월동안 발전해오면서 이렇게 저렇게 사라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라진 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이란 게 ‘미래 지향적’일 리는 없지만, 이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어떤 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라진 것들은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런 후줄근한 기억마저도 엄연히 존재했던 게 사실이므로 함께 되새기는 편이 올바를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부산영화제가 메인 행사장을 번듯한 해운대로 옮기기 전의 이야기다. 날파리 같은 인터넷 매체들이 오인혜의 가슴 패인 드레스 사진을 수백장씩 업로드하기 전의 얘기이며 대기업 계열 영화사들이 유명 가수를 모셔다 뻑적지근한 파티를 열기 전의 이야기다.
검열의 씁쓸한 추억
처음 부산영화제가 열리던 그 때, 나는 일간지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을 하기 위해 부산영화제를 찾은 건 아니었다. 몇몇 아는 사람들이 부산영화제 일을 했고 함께 영화를 스터디했던 후배들이 부추긴 탓에 휴가를 내고 찾아온 것이었다. 학생인 후배들을 데리고 폼을 잡으려다가 낭패를 겪기도 했다.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무려 22만원을 내고 하룻밤을 잤던 일이며 한 접시에 5만원도 넘는 회를 먹었던 일이 그랬다. 괜한 객기 때문에 그 뒤 몇 달동안 신용카드를 마구 돌렸으니 약간의 사회 공부도 된 셈이다.
여하튼 그 해의 화두는 검열이었다. 여전히 영화 뿐 아니라 도서, 음악, 공연에 대한 사전 검열이 횡행하던 당시, 당국의 검열 본능은 영화제에서도 발휘됐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잃게 되면 영화제도 자리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영화제 조직위원회는 이에 완강히 저항했다. 정부 당국은 사전 검열 받지 않은 영화는 한 편도 상영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영화제는 사전 검열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한 것이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몇몇 영화가 상영이 취소될 위기에 놓였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크래쉬>도 그 중 하나였다. J.G. 발라드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자동차를 성적 대상으로 느끼는 여성이 등장해 화제를 모았던 영화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보고 싶었던 터라 애간장이 타들어갔다.
마침내 이 영화의 상영일이 되면서 영화관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경찰들이 출동한 가운데 이미 표를 발급받은 관객들은 흥분해 있었다. 상영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은 가운데 해괴한 타협안이 등장했다. 언론 관계자에게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결정이 어이없는 것이다 아니다를 떠나, 나는 안도했다. 영화제에 내려온 일간지 영화 담당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선배들을 찾아서 프레스 배지를 구했다. 당당하게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는 묘한 쾌감마저 느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영화는 꽤 충격적이었다. 아마도 여배우의 성기가 등장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포르노 영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지극히 포스트 모던한 영화였다. 영화제라는 행사는 이렇게 영화라는 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함께 공유하자는 것인데 단지 성기가 등장한다고, 섹스 장면이 너무 야하다고, 끔찍한 폭력 장면이 있다고 무작정 상영을 못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이 때의 일을 계기로 영화제에서의 검열에 관한 논의가 진행됐고, 사회 전반으로도 사전 검열에 대한 대법원의 위헌 판결이 나서 이제는 ‘그땐 그랬지’라고 지나칠 수 있는 일이 됐지만 이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 불과 16년 전에 벌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웃어넘기기만은 어렵다. 혹시 또 아는가. 온갖 긴급조치로 검열 공화국을 만들었던 대통령의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되면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갈지.
남포동의 광기어린 추억
초창기 부산영화제의 중심지는 남포동이었다. 부산, 대영, 부영 등 전통있는 극장(부영극장은 철거된 지 오래다)들이 남포동 일대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영화의 거리’, ‘BIFF 광장’이 남포동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다가 해운대 신시가지 개발이 완성됨에 따라 2005년부터 영화제는 중심을 해운대로 옮기게 됐다.
사실, 남포동 일대는 영화제처럼 큰 행사를 열기에 적당한 공간이 아니다. 좁디 좁은 골목이 바글바글 얽혀있어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모이면 위험한 데다가 주변 숙박시설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인파 때문에 실제로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 그때는 부산극장과 대영시네마 사이의 자그마한 공간에 생방송을 위한 세트가 차려져 있었는데 스타가 무대에 오르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군중들이 쏟아져 몰려오곤 했다. 누군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형사고가 나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영화제 쪽에서 자원봉사자들을 배치했지만 서울에서 온 스타들을 보기 위한 군중(특히 10대들!)의 광기어린 돌진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영화 상영관 또한 문젯거리였다. 당시는 멀티플렉스가 거의 존재하지 않아 남포동의 극장들이 떵떵거리던 시절이다. 부산영화제는 세계의 여러 영화제들의 일정을 고려해 10월 초에 행사를 열기로 결정했는데, 이때는 극장가의 추석 대목과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극장들의 비협조적 태도 때문에 고생하곤 했다. 때문에 영화제 쪽은 극장이 내세우는 가혹한 조건을 감수하면서도 영화제 영화를 상영하는 수밖에 없었다.
센터를 해운대로 옮기면서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해결됐다. 극장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릴 이유가 없어졌고 숙박시설은 풍부해졌으며 해운대 신시가지와 센텀시티에 계속 생기는 멀티플렉스 덕분에 상영관 확보 또한 쉬워졌다. 게다가 지난해 부산영화제만을 위한 공간인 영화의 전당이 문을 열면서 상영관 문제는 깔끔하게 해소됐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해운대 시대가 시작되면서 관객과 시민들의 뜨거운 열기는 눈에 띄지 않게 됐다. 영화를 보러 온 관객과 부산의 전통적 중심가인 남포동을 찾은 젊은이들이 한데 뭉쳐 만들어냈던 거대한 인파가 해운대의 큼직하고 번듯한 분위기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부산영화제 초창기 남포동에서 느껴지던 ‘체감 열기’가 해외 게스트로 하여금 감동을 자아냈던 것을 생각하면 해운대의 이 썰렁함은 다소 아쉬운 게 사실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 남포동의 인파 대신 극장이 자리한 쇼핑몰의 고객들을 접해야 하는 관객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 영화제 쪽에서도 해운대의 분위기를 달궈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영화의 전당이 개관한 지난해부터는, 최소한 외양 면에서는 더 심심해진 게 사실이다. 올해부터는 남포동 상영관을 위한 특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고 하니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볼 수 있을지 모른다.
막걸리 파티의 추억
1996년 첫 해부터 부산영화제의 손님맞이는 독특했다. 나와 후배 일행이 실제로 겪은 일화 하나. 주말이던가, 영화를 보고 나오니 밤이 무르익었더랬다. 가볍게 요기나 할까 해서 남포동 골목을 지나칠 무렵, 길바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제는 심야가 되면 차량과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는 남포동 골목을 가로막은 뒤 돗자리와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서 막걸리 파티를 열고 있었다. 아 재밌네, 하면서 지나치려는 순간 영화제 관계자나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몇명이 “여기서 한 잔 하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워낙 생경한 분위기라 마음은 망설이고 있는데 몸은 그들의 팔짱을 낀 채 이미 돗자리 위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는 한국인과 외국인, 영화인과 나같은 일반인, 젊은이와 (약간) 늙은이가 있었다.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몸짓과 손짓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김동호 당시 집행위원장이 기획했다는 이 감동적인 ‘파티’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기억 속에 남았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와 낯선 도시 부산을 찾은 해외 게스트야 말할 것도 없지 않았을까.
그리 많지 않았던 그 해의 게스트들은 부산영화제의 대단한 환대에 반해서 여기저기에 소문을 퍼뜨렸다고 한다. 오죽하면 부산영화제가 초반부터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술과 이야기와 운치가 있는 파티 덕분이라는 농반진반의 말이 파다했겠는가.
2002년 쯤이 되자 남포동 골목의 파티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렇게 소박한 파티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영화제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대신 남포동과 자갈치 시장 그리고 주요 게스트들의 숙소가 있었던 해운대 일대로 파티는 번졌다. 여기서 파티란 번듯한 무언가가 아니라 횟집이나 포장마차에서 처음 만나는 세계의 영화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자리를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해운대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포장마차에서 열린 파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해 영화제의 어느날 밤, 아니 새벽녘, 회사 선배가 당장 해운대 쪽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그 선배의 친구였던 영화사 직원이 그 자리에 여배우들이 많으니 참석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는 것이었다. 기대에 부푼 우리는 남포동에서 택시를 타고 질주했다. 택시 운전사를 다그쳐 한 달음에 도착했지만 이미 여배우들은 숙소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허탈한 마음을 달랠 겨를도 없이 우리는 수많은 영화인과 영화제 관계자들에 포위(?)됐다. 여배우는 없었지만 이 포장마차와 저 포장마차, 다음 포장마차와 그 다음 포장마차에는 감독, 제작자, 프로듀서, 배급업자, 극장 관계자,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해가 바다 위로 떠오른 것을 봤던 기억이 난다.
이제 해운대 포장마차 거리는 정비 차원에서 그랜드호텔 맞은 편으로 ‘강제 이주’됐고 해운대 해변에 즐비했던 횟집들도 초고층 건물 공사 때문에 모두 철거되거나 미포 쪽으로 이주했다. 영화인들과 영화제 관계자들은 그랜드 호텔 뒷편의 오뎅집과 선술집으로 ‘파티장’을 옮겼지만 분위기는 예전과 많이 다르다. 그건 공간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 탓은 아닌 듯하다. 그때의 한국영화계와 지금의 한국영화계의 사정이 다른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한국영화계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990년대 시작된 ‘한국영화 신르네상스’가 막 무르익고 있었다. 영화계는 젊은 제작자와 젊은 감독 중심으로 재편됐고 이들의 탁월한 기획력과 연출력으로 세계의 주목까지 끌기 시작했다.
그때 영화계는 충무로라는 이름의 화목한 공동체였고 즐거운 놀이터였다. 부산영화제는 한국영화계와 세계영화계를 이어주는 튼튼한 파이프라인이 됐다. 해외 비즈니스가 없는 영화인들도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부산은 언젠가부터 그 해의 충무로를 정리하는 장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서 해운대는 들썩거렸다. 해가 뜰 때까지 떠들썩했던 해운대 포장마차 거리는 잘 나가건 못 나가건 모두가 친구였던 아름다운 시절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계는 분화되기 시작했다. 누구는 우회상장 붐을 타고 주식대박을 꾀했고 누구는 대기업 자본을 받아 규모가 커지길 희망했다. 그렇게 돈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2006년부터 한국영화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자본의 일방적인 질주가 시작됐다. 대기업 계열 투자 배급사는 한국영화계를 속속 장악했다. 그런 분위기는 부산영화제에도 투영됐다. 이들 투자 배급사가 호텔 등지에서 여는 떠들썩한 파티는 영화제의 메인 행사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부산영화제의 밤 분위기도 바뀌었다. 여전히 그 해에 대박을 낸 제작자가 한 턱을 쏘기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활기가 떨어졌다고 할까.
다행히도 어쩌면 올해부터 그 분위기는 달라질지 모른다. 올해 한국영화계는 흥행에서 유례없이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부산에서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활력을 발견하기를 희망한다.
epilogue
개인적인 추억이야 어쨌건 부산영화제는 나날이 변모하고 있다. 올해 또한 많은 변화를 추구하는 모양새다. 개막식 사회를 사상 최초로 한국인이 아닌 중국 여배우 탕웨이가 맡게 된 점도 그 중 한다. 미국 영화산업지 <할리우드 리포터>는 이 결정에 관해 “부산영화제가 진정한 글로벌 행사를 지향하는 징후”라고 평가했다. 영화제 기간을 하루 늘린 것이나 북한영화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를 초청한 것, 변방인 방글라데시 영화가 폐막작으로 선정된 점, 탈레반의 탄압 속에서도 고이 보존된 아프가니스탄 영화들도 대거 선보인다는 사실도 규모 뿐 아니라 내실까지 생각하는 부산영화제의 의지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검열의 쓰라린 추억이나 열광적인 남포동과 따뜻했던 파티의 추억 모두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것이 됐지만, 뭐 어쩌겠는가.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 것이거늘. 여러분도 부산영화제를 찾아 자신만의 달콤쌉쌀한 추억을 만들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