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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생애와 과정
설명 1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 고 말할 정도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대해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그런 천재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마르셀로나 미술학교 시험에 합격했으며 스페인의 미술전통을 소화해
열다섯 살 때에는 풍속화, 초상화를 능란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마드리드 전람회 입상을 게기로 마드리드에 유학하게 된 피카소는 화실을 가진 '진짜 화가'가 됐으며
열여덟 살 때에는 스페인 대표로 <마지막 순간>이란 작품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출품했다.
바람구두의 대학시절 은사인 시인. 오규원 선생의 연구실,
선생님의 책상 위에 덮어 논 유리 밑에는 피카소의 흥미로운 그림이 들어 있었다.
그 그림은 피카소가 추상적으로 그린 황소 그림이
어떤 순서로 그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연속 그림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세밀하게 그려진 황소 데생이 있고,
점차로 선이 생략되고 추상화되어 가는 황소의 모습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었다.
오규원 선생은 그 그림을 예로 들며 시(詩)라는것도
역시 이런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는 가르침을 주곤 했었다.
피카소의 추상화들은 대개가 이런 그의 치밀한 데생들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회화가 어설픈그림이거나 미치광이의 그림이라는식의 비판은
피카소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들이다.
(물론 이런 견해에 반기를 든 사람들도 있어『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라는 책까지 나왔으니 참고)
1900년 피카소의 나이 열아홉 살때 그는 오랫동안 고대해 오던 파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불어라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그에게 낯선 파리에서의 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답답한 스페인에서 벗어난 그에게 당시의 파리는 거리 전체가 거대한 미술학교였다.
파리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 나선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넋을 잃었고,
드가,로트렉,고흐,고갱 등의 그림에 대한 정열적인 연구에 빠져들게 했다.
원래 태생이 스페인인데다가 열정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질 것이 없었던 피카소였음으로
이 당시 그의 연구가 얼마나 정열적이었는지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파리 생활은 살을 에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가 세 차례의 귀향 끝에 몽마르트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 1904년이었던 것만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가 정착한 몽마르트의 아틀리에는 '바토라부아르(세탁선)'이라고 부르는 건물이었는데,
그런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보기 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의 낡은배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30개의 아틀리에에 수도꼭지가 단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피카소의 인생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일곱 명 정도입니다.
공식적인 연인들만이 그렇다는 것이니,
알려지지 않은 여인들까지 생각해 보면 훨씬 더 많았을겁니다.
스무 살 때 빈민굴에서 만난 피카소의 첫 여인은
조각가와의결혼에 실패한 후 혼자 살고 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였습니다.
둘은 함께 살게 되었지만 너무나 가난해서 외출할 신발 조차 없어 늘 침대에 머물렀고,
물감을 살 돈이 없어 한가지 색 톤으로만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도 있지요.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그림들에는 가난한 연인들의 생활이 묻어있기도 합니다.
조금씩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이루어 가게 되고, 사회적으로도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하였을 때,
그는 친구인 마르쿠스의 연인 “에바”에게 반하게 됩니다.
열렬히 구애를 하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던 에바는 결국 피카소와 함께 살게 되었구요.
하지만 함께 산 지 3년 만에 병약한 그녀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어쩌면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 그녀에게는 다행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을 버리는 피카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더 아파했을지도 모르니까요.
에바가 죽은 후 피카소는 우아한 러시아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에게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36세의 피카소는 25세의 올가와 첫번째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첫 아들 파올로를 그녀에게서 얻기도 하구요. 당시의 피카소는 성공한 예술가가 되었지만,
집안에 유모, 하녀, 요리사, 운전수까지 두며 가정을 돌보지 않는
올가의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생활은 그에게 외로움과 짜증만을 주었습니다.
결국 부인에게 애정이 식어버린 피카소는 10년 만에 그녀를 버리고,
열 여덟 살의 어리고 아름다웠던 마리 테레즈에게 빠지게 되죠.
젊고 건강미가 넘쳤던 그녀를 모델로 하여 피카소는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몇 년이 못되어 순종적이고 소녀 같은 그녀를 무식하다는 이유로 버립니다.
후에 그녀는 피카소가 죽자 자살을 하는 순애보를 보여줍니다.
마리와 함께 살던 중에 이중적으로 만났던 도라 마알은 지성적인 사진작가였습니다.
<게르니카>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그녀는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항하는 피카소의 정치적인 사상을 격려하고,지원해주었습니다.
회화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전쟁에도 대항할 수 있는 표현의 도구임을 주장할 수 있도록 가르쳐준 것이죠.
덕분에 2차 세계대전 이후 피카소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피카소는 자신의 아들보다도 더 어린 프랑수와즈 질로 때문에 도라를 버립니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 착란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갇히고 말지요.
62세의 피카소와 21살의 프랑수와즈는 딸과 아들을 하나씩 낳습니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낄 수 없었던 그녀는 스스로 그를 떠납니다.
유일하게 피카소를 먼저 떠난 여자였던 그녀는 10년간의 동거 생활을 회상록으로 발간합니다.
그 책에는 피카소의 자기 중심적인 성격과 대인관계, 복잡했던 여자관계까지 모두 담겨 있다고 하네요.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은 자클린 로크였습니다.
서른 살의 그녀는 여든 살의 피카소를 필사적으로 유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비밀 결혼식은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하였지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고백했던 그녀는
피카소가 92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권총으로 자살하여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청색시대의 자화상 (1901)
부채를 든 여인 (1908)
그의 첫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그린 작품입니다.
파리의 빈민굴에서 만나 가난을 벗하며 살았던 시간들이었으나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피카소에게있어 페르낭드는
며칠동안이라도 꼼짝하지 않는 훌륭한 모델이었을 뿐만 아니라,
병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었습니다.
언뜻 바라보았을 때는 추상화인 듯하여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회화를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신비로운 효과를 내는
분석적 입체파의 진수를 보여주던 시기의 작품입니다.
그는 작품 속에 갸날픈 연인 에바와 자신의 모습을 해체한 후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다시 조합하여 그려넣었습니다.
처음으로 피카소란 성을 준 자신의 부인을 고전적인 표현으로 그렸습니다.
붉은 스카프와 푸른 드레스가 눈처럼 하얀 피부와 어울려 그녀를 더욱 우아하게 하네요.
올가를 그린 이 그림은 과연 피카소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달라보입니다.
한 화가가 하나의 화풍을 다 이루지 힘들지만,
그의 생애에는 여러 가지의 화풍들이 한번에 등장합니다.
여기에 그의 천재성이 있다고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울 앞의 소녀 (1932)
앞면과 옆면을 동시에 나타나게 그린 이 작품을 보면
“빛은 직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직진하는 빛으로는 보일 수 없지만 빛을 휘게 함으로써,
또 다른 면을 보이게 하였지요. 이러한 생각은
공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는 것이었고,
전통적 물리학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마리 테레즈 (1937)
부드러운 곡선과 은은한 색상을 통해
여성스럽고 따뜻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작품입니다.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그녀의 헤어 스타일이 잘 나타나 있지요.
그는 마리 테레즈를 주제로 하여 그린 작품들이 특히 많습니다.
젊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는 피카소에게 있어
최고의 모델이었던 것이지요.
연인이었던 프랑소와즈와
그녀가 낳은 아들 클로드와 딸 파로마를 함께 작품에 담았습니다.
그녀 또한 젊고 아름다운 여류 화가였으며,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의지가 강하였고 주관이 뚜렷하였습니다.
그녀는 “떠나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피카소에게
“그렇게 하세요. 그것이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할거에요.”
라며 당당히 그를 버립니다.
두번째로 결혼한 여인 자클린은 피카소가 죽을 때까지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를 도왔던,생애 마지막 동반자였습니다.
그녀는 피카소가 죽자, 집안을 검은 커튼으로 가리고,
식탁에 그의 자리를 남기는 기이한 행동들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가 없는 현실을 이기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결코 80세가 넘은 화가의 작품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힘과 패기가 느껴집니다. 화가의 강한 터치 만큼,
유난히 긴 목과 큰 눈은 모델에게도
강한 의지가 있음을 엿보이게 합니다.
그녀는 50살의 나이차를 극복하는 결혼을 행함으로서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