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0, 1-9(부활 대축일);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혹 여러분도 그분이 어디에 모셔졌는지 모르십니까? 아니, 어디에 모시고 계십니까? 진정,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부활하신 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를 보기 위해, 먼저 ‘부활은 대체 어디에서 벌어지는지?’를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당연히 무덤에서 벌어집니다. 곧 죽음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니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는 죽음 없이는 부활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죽음에 부활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탄생으로 건너가는 죽음이라야 부활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죽음에 있다면, 사람은 대체 왜 죽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의 공통적이고 일차적인 이유는 ‘태어났음’에 있습니다. 그 누구도 태어나지 않고서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났기에 죽습니다. 그러니 탄생이 죽음의 제1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한 분 예외가 있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바로 이 분에게서 드러납니다. 이를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탄생의 결과라고 말하기보다,
그분이 죽을 수 있도록 탄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탄생’이 발생했다는 의미입니다. 곧 탄생이 죽음의 원인이 아니라,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바로 이 죽음에는 탄생이 있습니다. 곧 탄생에 죽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탄생이 내포되어 있고, 죽음이 부활의 새로운 탄생이 됩니다.
여기서는 탄생, 죽음, 부활이 하나로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그야말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탄생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참 생명에 결합되는 삼위일체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참 생명을 인간에게 건네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이 얼마나 크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신비인지요!
이를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시고 잉태되셨다. 그리고 세상은 만들어졌다.”
이는 성령의 날인인 ‘못 박힘’으로 잉태되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무덤으로부터 부활한 ‘새로운 창조’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 이 부활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8,30)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죽음을 쳐 이기시고 모든 것을 완료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오직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완성하셨으며, 우리를 본래의 생명으로 되돌려놓으셨습니다. 곧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본래의 우리의 생명으로 되돌려놓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1-3)
그러니 오늘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의 생일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당신께서는 다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끝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비로소 부활과 함께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삶으로 증거 해야 하는 소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파스칼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 날까지 고통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죽음 가운데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곧 부활을 증거 하는 우리의 삶 안에, 사랑을 증거 하는 우리의 순교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부활은 지금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죽음 가운데 있고,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곧 부활은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빈 무덤’의 형상으로 들어와 있고, 우리의 증거의 삶 안에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죽음의 삶 가운데 모셔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_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드시어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사랑이 드러나는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