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절기 전계심(節妓 全桂心) 묘비 . 소양정
강원도 춘천시 소양로 1가 5-51 (소양정 아래)
(소양정)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 1호
[소양로 비석군 : 소양로 입구]
[암행어사 박문수의 증조부 이조판서 박장원의 춘천부사 시절 청덕비]
[춘천기생 계심(桂心) 묘비]
이 비석은 춘천에서 태어난 관기(官妓 : 관청에 딸려 가무와 기악 따위를 하던 기생) 전계심의 무덤 앞에 있던 묘비이다.
외형적으로는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 훼손되어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비석에 불과하나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가상하게 여겨 세운 비석이다.
[춘천기생 계심(桂心) 묘비]
[춘기계심순절지분(春妓桂心殉節之墳)]
계심은 조선 제22대 정조임금 때 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기생이 되었으나 아름다운 용모와 단정한 행동으로 칭송이 자자한 덕에 17세 되던 해 춘천부사의 소실(첩)이 되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부사가 다른 지역으로 기회를 보아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무 소식도 없는 약조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서울의 기방에 팔아 버렸다.
계심은 어쩔 수 없이 기방에 있게 되었으나, 이미 부사의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기에 부사가 자신을 찾으로 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녀의 고결한 성품과 굳은 절개를 꺾어보려는 사내들의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은장도를 가슴 속에 간직한 채 모진 마음을 먹고 정숙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어느 날 어쩔 수 없이 정조를 유린 당하고 뱃속의 아이마저 낙태하게 되자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절한 사연을 담은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고 말았다.
한편 계심이 자결하던 날 계심이 유혈이 낭본래 낭자한 모습으로 찾아와 애원하는 꿈을 꾼 부사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계심을 찾아가 보니 처첨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부사는 시신을 거두어 그녀의 고향인 춘천 봉의산록에 장사 지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순찰사가 행적을 가상히 여겨 열녀정문을 세워 주었고, 1796년에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고 뜻을 모아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춘기계심순절지분(春妓桂心殉節之墳)'이라는 흔히 볼 수 없는 묘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 무덤은 본래 봉의산 있었으나 도로 개설로 없어지고 비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7년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작고 초라한 비석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애틋하고 절개있던 그녀의 뜻을 가슴 속에 되새겨 보아야 할 향토의 유적이다.
[소양정(昭陽亭)]
[소양정(昭陽亭)]
처음 창건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말 시인들의 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이미 존재한 것이 확실하다.
운곡 원척석(元天錫)의 시에 '이요루(二樂樓)'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래 현재 위치보다 아래쪽인 소양강 남쪽 강변에 있었다.
1605년(선조 38년) 홍수로 유실된 것을 1610년 (광해군 2) 부사 유희담(柳希聃)이 다시 지었고, 1647년(인조 25년)에는 춘천부사 엄황(嚴滉)이 크게 수리하면서 동쪽 정자에 선몽당(仙夢堂)이라는 부속 건물을 세웠으며, 이때 다시 소양정이라는 이름으로 부속 건물을 세웠으며, 이때 다시 소양정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1777년(정조 1) 홍수로 또 다시 유실되었으며, 1780년(정조 4) 부사 이동형(李東馨)이 다시 지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66년 옛터보다 위쪽이 되는 봉의산 기슭의 현 위치에 중층 누각으로 다시 지었다. 현재의 소양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누정형식으로 된 팔각지붕의 건물이다.
[조양루(朝陽樓)]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호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 산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