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엠마오의 저녁 -
☆ 2013년 다해 4월4일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청주] 아는 것이 힘이 되어여 한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신부
† 독서 : 사도 3, 11 - 26
† 복음 : 루카 24, 35 - 48
★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구자를 고쳐 주자 사람들이
크게 경탄하며 그에게 모여들었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한다(제1독서).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자 그들은 유령으로
여긴다. 예수님께서는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음식까지 드시며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까지도 부활하셨음을 알게 해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그때에
하신 인사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직전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사실 이 인사는 얼토당토
않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시기 직전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사랑하셨던 제자들에게
큰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이제 겨우 사나흘이
지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인사하신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들을 단죄하지도 않으시고,
그들에게 서운하다는 말씀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배신감에
사로잡혀 복수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평화를 간직하라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 인사말에는 당신을 배신한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롭지 못한 그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시며 그들을 이미 용서하시고, 오히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들이 온전히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일상 안에서 예수님을
모른 체하거나 불편하시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예수님 앞에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먼저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 매일 미사 -
◈ [청주] 아는 것이 힘이 되어야 한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4일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 24,35-48
아는 것이 힘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않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되기도 하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부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 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보아라,”“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서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셔야 그분을 알아볼 수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저 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주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2013년 다해 4월4일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 루카 24,35-48
“평화가 너희와 함께!”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나무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설명하기 정말 난해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런 제자들, 이런 우리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3단계 작업을 통한 특별과외를
실시하십니다.
첫 단계로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들을
안심시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배신에 따른 수치심, 어떻게 그분 얼굴을
뵙나, 하는 송구스러움으로 가득 찬 제자 공동체를 향해 던지신
첫마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입니다. 저 같았으면 너희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정말 실망스럽다, 내가 정말이지
헛고생했다며 엄청 야단쳤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마디
질책도 하지 않으시고 먼저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십니다.
두 번째 단계로 당신의 구멍 뚫린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더
강하게 당신의 부활을 증명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음은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음식을
청합니다.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마리를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맛있게
드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부활을 확신한 사람, 예수님 부활을 명확하게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체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참 사랑을 주변사람들에게 실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크게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자칭 ‘예수님의 애제자’라고
불렀던 사도 요한이 그랬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랬습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이 부활일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예수님은 사람이며 신
오늘도 어느 신부님의 모친이 돌아가셨다고 문자가
왔습니다. 봄이 되면서 부고의 연락 문자 메시지가 부쩍
늘어나네요. 그러나 돌아가신 분이 살아났다는 문자는
영영 못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며 신이시다는 말을 꼭 직접 대해야 믿을
건가요? 오늘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새 마음으로 믿을 각오를
해야 되지 않나요? 우리대신 제자들이 직접 보았고 오늘까지
굿 뉴스라 하는데 믿어야지요.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루카 24,39)”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대구] 증인
작은 시골마을의 신부님께서 부제였던 저한테 “부제님은 부활
신앙에 대해 신자들에게 어떻게 말해 줄 수 있나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 질문에 제가 어리둥절해하자, 신부님은
“힘겹고 팍팍하게 살아가는 본당 신자들에게 부활을 얘기하는
것이 쉽지 않네요. 기쁨과 평화인 부활에 대해 무어라 말해
주어야 할지….”라며 말을 흐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증언으로 시작해 말미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고
전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루카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유일한 장면입니다. 루카복음의
시작에서는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루카 1,2)라고
하면서 목격자 곧 증인의 증언으로 이 복음이 쓰였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목격자, 증언, 증인. 모두 한 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제자들에게 이제 새로이 태어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우리 각자는 어떻게 ‘네’라고
응답할 수 있을까요?
- 구자균 신부(대구대교구 청년국차장) -
◈ [기타] <내맡긴영혼은>'죄' 외에는 모든 경계를
- 이해욱신부
"죄" 외에는 모든 경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어떤 경계를 두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단, "죄"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악한 것들 외에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 안에는 하느님의 손길과
기운(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모든 일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
이 일은 이렇고, 저 일은 저렇고 ---
무엇이 이러저러 한다 해서 이러저러한 경계를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다음의 일은 하느님의 일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만나게 해 주시는 모든 사람을, 모든 일을,
거절하지 말고 모두 기쁜 마음으로 만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거절하지 않기 위해서는 경계가
없어져야 합니다. 경계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겨 하느님의 소유가 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은 서로 하나를 이룹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든 지체가 하나를 이룹니다.(에페 1,10)
나와 너라는 경계도,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경계도 사라져야
합니다. 그 경계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나와 하느님과의 거리는
더욱 좁혀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이 사랑으로
더욱 일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 외에는" 나의 모든 것이 밖으로 열려져야 합니다.
나의 밖의 모든 영역이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능력을, 나의 건강을, 나의 지식을, 나의 지혜를, 나의
신앙을, 나의 통장을, 나의 지갑을 나의 모든 것들을 필요로
하는 다른 모든 것들을 위하여 모두 열어 놓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위하여 열려진 모든 것의 "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워 놓았던 그동안의 "나와 나의 것"이라는 모든 경계가
무너질 때, 그때 비로소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아직 열려져 있지 못한 부분은 없는지?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
바로 그것을 찾아내고 그 경계를 무너뜨려 나를 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열려진 영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해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어렵죠?
아니죠. 하느님께서 내가 열어 놓아야 하는 것들을
나에게 하나하나 알려주시고 당신이 정하신 순서대로 그렇게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나는 그 이끄심대로 하나하나 해
나가면 될 뿐입니다. 참 쉽습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부활 8일 축제 내 목요일
2013년 다해 4월4일 부활 팔일 축제내 목요일
1년에 한번 정도 건강검진을 합니다. 건강검진은 여러 항목에
걸쳐서 합니다. 위 내시경, 장 내시경, 초음파, 심전도, 혈압,
피검사, 폐활량, 안압, 치과 검사까지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생활에 대한 문진입니다. 여러 항목에
걸친 문진을 통해서 나의 음주, 흡연, 운동, 식습관, 수면 상태,
우울증에 대한 것까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다른 여러 가지 검사에서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저는
적당한 운동, 금연으로 문진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만 음주를
즐기는 편이기에 점수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심리학과 의학에서는 여러 가지 검사 표를 만들어서 내방객
스스로가 자신의 심리 및 건강상태를 알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에니어그램, MBTI,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등과 같은 것들이 있어서 나의 성격은 어떠한지,
나는 왜 친구와 다른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인생을 효과적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 줍니다.
저 나름대로 생활하면서 꼭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늘 웃는 얼굴로 살자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상대방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려고 합니다.
일이 생기기 전에는 고민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떠나간 버스를 아쉬워하기
보다는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더 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모든 것은 성서와
예언자들이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도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완고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말을 합니다. 문진표를 잘 읽으면 우리가 어떻게 생활해야
건강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듯이, 성서의 말씀을 잘 묵상하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과 평화는 비슷한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평화로울 수 있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 말씀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바라고, 행복을 원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재물을 많이
가져도, 명예를 얻어도, 권력을 얻어도 그것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분노와 원망입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을, 내가 시험에 떨어진 것은 부모를 잘못만나서,
이웃을 잘못 만나서, 시기를 잘못 만나서라고 생각하면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셋째는 근심과 걱정입니다.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를 지고 갈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롭지 못한 이런 조건들을 다 극복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모든 권한과 능력을
기꺼이 포기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먼가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고,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영성이란 정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의 삶은 죽은 후에 얻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은
현실의 삶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여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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