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3617]蓬萊(봉래)
봉래鳳萊
산동성 봉래 당 개원년간에 봉래향이라 하였으며,
수, 당 때에는 등주라고도 하였다. 추추전국시대에는 래萊나라의 땅이었다.
내나라는 신선의 나라이며, 등주는 신선사상의 출발지이다.
동이족은 원래 신선의 후손이었다. 공자가 동경했던 나라이다.
노중련이 도해한 것도 새로운 이상세계를 찾아 동해바다로 떠난 것이다.
등주과해 登州過海
팔신선八神仙
이철괴李鐵拐
자신의 육신을 잃어버려 쇠 지팡이에 호리병을 차고 거지의 몸을 빌렸다.
종리권鐘離權
죽은 자를 살리는 부채를 들고 있다.
장과로張果老
불로장생의 비법을 가지고 있다.
여동빈呂洞賓
세상의 악을 무찌른다.
하선고何仙姑
복숭아를 먹고 선녀가 되었다.
남채화藍菜和
술마신 뒤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한상자韓湘子
퉁소를 잘 분다
조국구曹國舅
도는 하늘이요 하늘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신선들이 동해 바다로 떠났다는 바다.
동래東萊
래萊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오늘날의 산동반도에 있었다.
래나라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제남, 남쪽으로는 태산에 이르렀고,
교래하膠萊河 이동이 배후지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물고기와 소금을 얻기 쉬워 풍요로웠다.
내萊나라는 비단업의 최초발상지이자 제철술을 발명했고,
세계에서 가장 큰 식량창고와 가장 많은 준마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논벼를 최초로 재배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곳은 ‘동이東夷’라고도 불린다.
내나라는 제나라 양공襄公 6년(기원전 692)에 멸망하면서
제나라의 배후 도시화 되었다. 하지만 내나라의 지배층은
계속 동쪽으로 옮겨가서 역사상 ‘동래東萊’라고 하는 나라가 되었다.
동래의 수도는 오늘날의 용구시 귀성촌歸城村이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지금까지도 고성 유적지가 남아 있다.
발해만과 황해의 경계지점에서 바라 본 봉래각
蓬萊閣 정몽주
採藥未還滄海深
불로초 구하러 간 이는 돌아오지 않고 푸른 바다는 깊으니
秦皇東望此登臨 진시황은 이 봉래각에 올라 동해를 바라봤겠지
徐生詐計非難悟 서복의 속임수는 알기가 여려운 것이 아닌데
自是君王有欲心 이때부터 진시황은 욕심이 있었으리라.
명대의 척계광이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쌓은 봉래성
척계광이 살았던 마을의 효자문
등주 박물관에 있는 포은 정몽주의 흉상
봉래 등주 박물관에는 포은 정몽주의 흉상이 있다. "친목 우호의 선구자 유가문화의 전파자"라 하며 봉래각鳳萊閣과 등주과해登州過海라는 시를 적어두었다.
登州過海 등주에서 동해를 지나며 정몽주
之부城下片帆張 지부성 아래서 조각배 띄우니
便覺須臾入杳茫 어느덧 잠간 사이에 망망 대해에 들어섰네
雲接蓬萊仙闕遠 봉래 신선의 궁궐 구름에 덮혀 멀어지고
月明遼海客衣凉 달밝은 요해의 나그네 처량하여라
百年天地身如粟 백년 천지의 좁쌀같은 이 몸은
兩字功名빈欲霜 공명이란 두 글자 때문에 귀밑털이 서리 같구나
何日長歌賦歸去 어느 때나 긴 노래 불러 돌아가는 글 지을까
蓬窓終夜寸心傷 봉창가에서 밤새도록 마음만 상하는구나
登州仙祠 등주의 신선 사당
何處登臨慰我思 어느 곳에 올라 내마음 달래볼까
之부城下古仙祠 지부성 아래 오래된 신선 사당있네
只嫌汲汲南歸疾 서둘러 빨리 남으로 돌아가느라
未和坡翁海市詩 소동파의 "해시"시에 화답하지 못하네.
정몽주 초상
정몽주 유묵
<포은집>에 즉묵현, 전횡도, 봉래각, 사문도 등의 산동성 지역의 지명의 시가 보인다.
卽墨縣
眼見全齋次第降
謀臣於此慮弓藏
二城不待勞餘力
樂毅眞先負惠王
산동성 즉묵은 칭다오의 옛 도시이다.
지모루는 소상공인 시장이 있어서 짝퉁시장으로 유명하다
. 칭다오는 독일인들이 거주한 신도시이다.
田橫島
五百人爭爲殺身
田橫高義感千春
當時失地夫何責
大漢寬仁得萬民
전횡도(田横岛)는 즉묵시의 동쪽해역에 자리잡고 있는데 총 면적은 1.46 K㎡이고 해안선의 길이는 8KM에 달한다. 전횡도는 2,0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명한 섬이다. 역사의 기재에 따르면 진말한초 유방의 수하장령 한신이 대군을 거느리고 제나라를 공격하였을 때 제나라 왕 전광은 피살되었고 제나라의 재상 전횡이 500명 군사를 거느리고 이 섬까지 후퇴하였었다. 유방이 황제로 되고 나서 사신을 파견하여 전횡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전횡은 이를 거절하고 낙양으로 가던 도중 자살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섬에 살던 500명의 군사들은 비통을 금치 못하여 자결하는 것으로 충성을 표시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500열사의 충성과 의리에 감동되어 이 섬을 전횡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日照縣
海上孤城草樹荒
最先迎日上扶桑
我來東望仍搔首
波浪遙應接故鄕
현재 산동성 일조는 녹차로 유명하다.
정몽주 선생은 산동성 등주에서 일조로 즉묵으로하여 중원으로 들어갔다.
둔굴재 도랑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