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말씀 눅 22:35-53
<예수께서 체포되시다>
1. 전대와 배낭과 검을 준비하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실 때, 예수님은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눅 9:3, 10:4). 제자들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으며 부족함 없이 지내다 돌아와서 기쁨으로 보고하였다(눅 10:17).
오늘날에도 Faith Mission을 훈련과정에 채택하고 있는 단체들이 많이 있다. 많은 경우 이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일상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한다. 이런 훈련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깊게 하고, 환난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하지만 이것이 일상적인 것은 아니다. 일상의 삶에서는 좀더 신중해야 하고(prudence), 실제적이라야 한다. 이는 전적으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열려 있어야 하고,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왜 그런가? 왜 초자연적인 공급과 보호는 지속될 수 없는가? 이는 교회 공동체의 형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를 돌보시고 공급하셔야 한다. 그러나 일단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면 그 구성원들은 ‘서로 짐을 지는’ 관계가 되어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여야 한다(갈 6:2). 이 짐에는 일상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포함한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고, 그 자신 장막을 만드는 일로 생업을 삼고 있었지만 교회 공동체가 재정적으로 그의 사역에 참여해 주기를 바랬다(롬 15:24). 이런 과정을 통해 교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건강한 공동체로 성장해 간다.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는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우리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고,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건강, 영적인 에너지와 심리적인 에너지 등이 제한되어 있는데, 그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삶에 쏟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우리에게 주신 기회와 에너지들은 부르심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돌보며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이제 전대와 배낭과 검이 필요하다. 돈과, 일상에 필요한 옷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건들과, 호신용 단검이 필요하다. 당시에 외딴 길에는 강도들이 많았기 때문에, 호신용 검을 소지하고 다녔다고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검이 필요하다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하여 자랑스럽게 두 개의 검을 내밀었다. 예수께서 ‘족하다(Enough)’ 말씀하신 것은 그 두 개가 필요하다는 뜻이라기 보다 제자들의 입을 막으시려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런 얘기 그만 해라’ 정도였을 것이다.
2. 불법자의 동류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지를 이해하고 계셨다. 그는 불법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을 받게 될 터였다(37절). 이 말씀은 이사야 53:12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의인으로서,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은 참으로 모욕적인 일이다. 논리로 따지자면 예수를 잡아 죽일 사람들은 예수 앞에서 한 마디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말이 안 되는 일이고, 그런 불의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의가 서지 못하고, 악이 이기는 것 같은 일이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죽음을 앞두고 그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다. 습관적으로 가시던 감람산 기슭에서 제자들에게도 기도하기를 요청하신 후, 따로 좀 떨어진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기도는 참으로 간절했다. 불의를 통과하고서야 얻어지는 의를 위해, 인류의 모든 죄의 대가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기 위해,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의 죄도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무게를,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것을 그 몸에 짊어지시기 위해,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예수께서 드리신 기도는 땀이 되고 피가 되어 그 몸에서 솟아 나왔다. 유월절 즈음, 감람산 기슭의 밤은 아직 쌀쌀한 때였다. 그러나 그 고통에서 솟아나오는 땀은 쌀쌀함을 이기고 있었다. 그의 간절함은 실핏줄을 터뜨리고, 그의 피는 땀과 섞여 사람들의 죄를 씻어내고 있었다. 천사들도 와서 예수님의 기도를 돕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슬퍼하며 잠들어 있었다.
3. 체포되시다
기도를 마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셨다. 지금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그 유혹을 이기셨다. 하지만 기도하지 못한 제자들은 그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슬픔(눅 22:45), 혹은 육신의 피로(마 26:43)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가룟 유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왔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말씀하셨고, 이때 제자들은 그들에게 저항했다. 한 제자(요한복음은 그가 베드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 18:10)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귀를 떨어뜨렸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으라 하시면서 그 귀를 고쳐주셨다. 이제는 그들의 때였고, 어둠의 권세의 때였다(53절).
예수께서는 어둠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셨다. 그렇게 들어가신 사흘의 시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어둠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모든 피조물은 숨을 죽이고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이 사흘이었다는 것을 알았던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시간이 마치 영원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새 역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우리도 때때로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인생이 다 끝난 것 같은 그런 때에, 한 줄기 빛이 비치면서 생명의 약동이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터널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그와 함께 다시 부활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둠의 시간이 있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 터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기억은 우리를 붙들어 주는 생명줄이다. 그 줄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시나브로 굵고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