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기행 ⑰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의 풍수지리①
글·사진 김정인 회원
왕릉은 왕이 승하하면 그다음 왕이 왕릉을 조성한다. 선왕이 죽으면 6일 차에 왕위에 즉위하고 첫 번째 대업이 국장을 치르고 왕릉을 조성한다. 조선의 왕릉은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기재되었고, 왕릉도 잘 보존되었다. 조선왕릉 40기를 답사하면서 2부로 나누어 탐방기를 연재하고자 한다. 1부는 조선 초기의 왕릉들이다.
조선왕릉의 상징, 태조 이성계 건원릉
조선조의 첫 번째 왕릉은 건원릉으로, 1396년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가 죽자 현재의 덕수궁 뒤 정동에 정릉이 조성되었다. 태조는 이곳을 수릉(왕의 무덤을 생전에 미리 잡는 것) 터로 정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은 아버지를 계비 옆에 모시지 않고 자신이 잡은 한양의 동쪽 양주의 검암산 아래에 모셨다.
왕릉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왕조의 번영과 후손 발복을 위하여 왕릉을 조성할 때에는 풍수지리가 적극 동원되었다. 신라의 왕릉은 야지에 모셔졌고, 고려의 왕릉은 산지에 모셔졌으나 조선의 왕릉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땅, 산의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 잡았다.
조선의 건국 왕 태조가 모셔진 곳은 백두대간 금강산 분수령에서 분맥 되어 한북정맥으로 수락산, 불암산을 거쳐 바위가 없다는 검안산 자락 비산비야에 자리 잡았다. 태조가 이곳에 모셔진 후 6 왕(문종, 선조, 현종, 영조, 헌종, 추존왕 문조)과 10 왕비 등 9개의 능에 17위가 모셔졌다.
명당에는 산과 물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찾아와서 편안함을 느낀다. 동구릉 중심룡 끝자락에 자리 잡은 건원릉은 주변의 산들이 둘러싸고, 우로는 서쪽에 5릉, 좌로는 동쪽에 3릉을 거느린 형국이다., 이곳이 조선왕릉의 으뜸이요, 조선조 518년을 이어간 뿌리이다.
대모산 산하 조선 3대 왕 태종릉 헌릉
조선의 2대 왕 정종은 개경으로 환도하여 그의 능도 개경에 있다. 1ㆍ2차 왕자의 난을 겪은 3대 왕 태종은 그의 수릉 터로 건원릉이 있는 한북정맥의 끝자락으로 가지 않고 한강을 건너 한남정맥의 끝자락인 대모산 자락으로 왔다.
주변의 산세를 돌아보니 사신사(四神砂)는 잘 갖추었지만 가까운 내청룡(內靑龍)이 본신룡(本身龍)보다 혈씬 더 짧다. 본신용이 호롱박 모양으로 잘 생겼으나, 가까운 청룡 자락이 두 개가 모두 짧으니 어이 된 일인가? 그러나 전체적인 국세가 좋으니 한두 개의 결점은 감수했으리다. 또한 남향의 따뜻한 곳인데, 땅이 습하여 이끼 풀이 파릇파릇하다.
태종을 이은 4대 왕 세종은 자신의 수릉 터로 할아버지가 있는 건원릉으로 가지 않고 아버지 태종이 있는 헌릉 서쪽 언덕에 수릉지를 정하였다. 이곳이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는 신하의 건의가 있자 세종은 "다른 곳에다가 좋은 자리를 얻는 것이 어찌 부모 옆에 묻히는 것보다 좋겠는가? 좋고 나쁨의 말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며 아버지 옆으로 갔다. 그 후 여러 풍파가 있자 19년이 지난 예종 1년에 여주로 옮겨갔다. 그 자리에는 360여 년이 지나 조선 23대 왕 순조가 다시 와서 태종 옆에 묻혔다. 시대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풍수평가가 달라지기도 하였다.
영릉 가백년 여주의 세종대왕 영릉
세종대왕이 대모산 아래에서 여주로 옮겨간 여주 영릉은 여러 형국으로 표현된다. 산봉우리와 산줄기가 마치 꽃잎 모양으로 혈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여 모란반개형, 용이 마치 여의주를 품고 하늘을 나는 모습인 비룡승천형, 봉황이 날개를 펴고 알을 품는 비봉포란형 등 그 형상이 다양하다. 명당이라 그 덕택으로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더 이어졌다는 소위 영릉가백년(英陵可百年)의 천하 대길지이다.
5대 왕 문종은 재위 2년 6개월도 안 되어 31세에 승하하였다. 수릉지는 아직 정하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갈 것인가? 그때 갈만한 곳은 증조할아버지 태조가 잠든 건원릉과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종이 잠든 헌릉 지역이었다. 그러나 명당 논쟁이 분부했던 헌릉 지역을 택하지 않고 증조가 잠든 검안산 아래 건원릉 옆으로 갔다. 문종을 이은 6대 왕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간 후 17세에 사사되어 영월의 장릉에 묻혔다.
조선의 7대 왕 세조의 능, 광릉
세조의 능 광릉은 세조가 죽은 후 예종이 잡은 자리이다. 주산의 혈이 단정하지 못하고 땅이 경사지며 돌이 많아 문제로 지적되었으나 비보 하면 된다고 하여 이곳에 모셔졌다. 부족한 곳은 비보를 하고 자연을 그대로 살려 간소하게 왕릉이 조성되었다.
세조의 유언으로 석실을 만들던 것을 회격(灰隔)으로 바꾸고 병풍석도 하지 않아 경비와 동원되는 사람이 대폭 줄었다. 이로써 조선왕릉도 대변화를 예고했다. 세조에 이어 8대 왕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승하하였다. 예종이 갈 수 있는 곳은 동구릉, 헌인릉, 광릉 지역이었으나 세조가 자리 잡았던 서오릉에 모셔졌다.
도심 한가운데 역사의 숲, 선정릉
세조의 받아들인 의경세자가 일찍 죽고 세조의 왕위는 둘 째 아들인 예종에게 넘어갔는데 예종도 병약하여 즉위 후 1년 만에 죽자 의경세자의 아들 성종이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성년이 되기까지 7년 동안은 세조 비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재위 25년인 38세에 종기 병으로 승하하니 그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연산군의 첫 번째 대업은 성종의 무덤 자리를 정하는 일이었다. 세종의 다섯 번째 아들 광평대군의 묘를 수서동으로 이장하고 그 자리에 성종을 모시니 이곳이 바로 선릉이다. 선릉은 한남정맥이 관악산 우면산을 거쳐 역삼동 일대에서 동진하는 청담동 언덕에서 남동쪽으로 분기된 산진처(山盡處)로 고도 50m도 안 되는 아주 야트막한 야산에 자리 잡았다. 선릉이 있는 일대는 뒤로는 역삼동이 있는 능선을 배산으로 좌우로 대치 언덕과 청담 언덕이 환포하고 양재천 탄천 한강의 삼수가 합수하는 평지 지역이다. 평지에서는 국세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으면 한 치가 높은 곳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선릉 지역은 대명당국의 요건을 충족한다.
조선의 왕릉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여주의 세종대왕릉 영릉이고, 그다음이 선릉이다. 선릉 지역은 장마철에 물이 차올라 명당 논쟁이 많았다, 그러나 이곳을 크게 주목한 사람은 성종의 며느리이자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는 이곳이 길지이고 본인도 이곳에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지만 그러하지 못하고 결국 태릉으로 가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선정을 펼쳐 복을 쌓았으면 이곳에 중종과 함께 안장되었을 텐데 덕이 많이 부족했나 보다.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2009년에 등재되었다. 한 왕조가 500년 이상 유지되기도 어렵지만, 왕들의 무덤이 모두 보존되기도 쉽지 않다. 조선 시대 27대 왕과 왕비, 추존왕을 포함하여 42기 왕릉 중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왕릉은 당시의 최고의 풍수사들이 동원되었고 왕족과 대신들이 지속해서 왕릉 후보지를 찾았다. 왕이 승하하면 왕위를 이어받은 왕의 첫 번째 대업이 왕릉 조성이었다. 이렇게 조성된 왕릉은 오늘날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왕들의 업적을 돌아보며 산책하는 힐링의 공간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