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말로(Saint Malo)
파리에서 서쪽으로 379 km 떨어진 '랑스(Rance)'강 하구의 화강암 암반에 자리잡은 생-말로 성채 도시의
아름다운 해변, 세계에서 가장 조수 간만의 차가 큰 해변 중 하나로, 밀물과 썰물때 해수면의 높이가
무려 13 m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곳으로 브르타뉴 지방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생-말로 지도-
** 잘 구축된 방파제로 보호되고 있는 두 개의 외항도 항구로서 조건이 좋지만 생-말로 성으로부터
보호되고 갑문과 수로로 연결된 내항은 악천후와 외침으로부터도 완벽한 방호를 받는 항구이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프랑스 전역을 요새화 시킨 보방(Vauvan)원수는 생-말로를 대형
정박항으로 개축하였고 맞은편의 생-세르방(St. Servan)쪽에 수비를 강화한
라 씨떼(La Cite)에 생-세르방의 씨떼 요새 (Fort de la Cite)를 건설하여
해적들의 본거지 였던 이 도시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생-말로(Saint Malo) 성채와 도시 전경(구글 항공사진)-
**15세기 이후 해상 탐험으로 수 많은 해상과 해적을 배출하였고, 16-18세기엔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 중의
하나로, 왕으로부터 공식 허가를 받아 적국의 배로부터 물건을 약탈하던 해적들의 본거지이었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과 요새는 훼손된 부분없이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생-뱅생(Saint Vincent) 대성당(Cathedrale)이 보이는 구시가지 골목-
** 2차 대전 중 독일군이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강력한 진지를 구축한 이곳은 3차에 걸친 연합군의 폭격으로
도시의 80%가 파괴되면서 1944년 8월 17일 해방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정밀한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생-뱅생(Saint Vincent) 대성당(Cathedrale)-
**로만 과 고딕 양식이 혼합된 이 성당은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7세기에 처음 세워졌고 9세기에
재건되었던 초기 교회 자리에 잔 드 샤띠용(Jean de Chatillon) 주교 당시인 12세기에 건설되었다.
현재도 12세기 건축의 잔재인 회랑, 삽자형 교회의 날개 부분 과 교회 중앙의 신도석 등을 볼 수가 있다.
-대성당 내부-
** 지름 6 m 의 거대한 장미창이 돋보이는 교회 내부
-촛불을 봉헌하는 관광객-
** 양초의 크기에 따라 가격은 2 유로, 3유로 등으로 다르다.
-구시가지 상점에 걸려있는 해적의 심벌-
** 이 도시가 해적의 도시였음을 말해 주는 듯하다. 생-말로의 해적의 후예들은 "프랑스 사람도,
브르타뉴 사람도 아니고 오직 생-말로 사람이다(Ni Francais ni Breton, mais Malouin suis)"라고 말한다고 한다.
-캔디(Candy)상점 앞에 광고성 해적의 마네킹-
**남자 해적은 오른팔과 왼쪽 다리를, 여자 해적은 오른 팔을 잃어 갈쿠리 의수이다.
-성문-
-성문 밖 선창가 풍경-
-길거리 악단과 길거리 무용수들-
** 초대받지 않고 온 길거리 관객들의 호응도 대단하다.
-동영상-
-부두에 정박하고 있는 해적선-
-해적선 뱃머리 조각(Figure Head)은 여女해적이다.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cois-Rene de Chateaubriand,1768-1848)의 동상-
**항구를 바라보고 부둣가에 서 있는 이 인물상의 주인공 샤토브리앙은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외교 정치가이다.
화려하고 섬세한 정열을 가진 문체로서, 서정적인 작품으로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왕정파의 일원으로서 두 번의 장관직과 영국 대사를 포함 세 번의 대사직을 역임하였다.
-성- 빈센트 문(La porte Saint-Vincent))-
** 한 개 뿐이었던 성문 출입의 혼잡을 없애기 위해 보방(Vauvan)원수는 1689년
성문을 증설할 계획을 세운다. 20년 만인 1709년 새로운 성문이 준공된다.
-방어용 요새와 순찰로-
**동쪽인 내항과 마주한 성벽이다.
-해군 중장 르네 뒤게-투루앙(Lieutenant General Rene Duguay-Trouin)-
**동상의 주인공 뒤게-투루앙은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유능한 해적이었다고 한다. 성벽 뒤로 해군 함정의 마스트(돛대)가 보인다.
-내항에 계류된 해군 함정--
** 전투함이 아닌 지원함으로 보인다. 군함 뒤로 보이는 붉은색의 선박은 석유 시추선이다.
-성벽의 순찰로(좌)와 성벽 아래 골목에서 차를 마시며 아침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우)-
** 성벽은 도시를 완벽하게 에워싸고 있어 순찰로를 따라 성곽을 일주할 수가 있다.
-내항에 정박 중인 연안 여객선(Brittany Ferries)-
-성벽에서 외해의 해변으로 내려가는 경사로(Ramp)와 해변풍경-
-2중 성벽(좌) )과 망루(우)-
-내 성벽(Inner Wall)과 망루-
** 내성벽이 없는 곳은 건물 자체가 성벽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쁘띠- 베 섬(Ile du Petit Be=작은 베)과 그랑 베 섬(Ile du Grand- Be= 큰 베)-
** 저녁 노을 속에 두 섬.
-아침 나절의 쁘띠- 베 섬 과 그랑- 베 섬(Ile du Petit Be et Ile du Grand Be)-
**앞에 보이는 것은 썰물 때에도 수영을 할 수 있는 바닷물 수영장이다. 쁘띠- 베 섬에는 보방(Vauvan) 과
가레뉘(Garengeau)에 의해 1689~1710년 어간에 건설된 쁘띠-베 요새(Fort du Petit- Be)가 있다.
-썰물이 시작되어 보이기 시작하는 그랑-베 섬으로 건너가는 돌 포장 잠수교-
-그랑 -베 섬으로 건너가는 탐방객들-
-그랑-베 섬에서 건너다 본 생-말로 본성과 시가지-
-프랑수아 르네 드 샤또브리앙(Francois- Rene de Chateaubriand)의 묘지-
**본인의 유언에 따라 그랑-베 섬 북쪽 절벽 끝에 뭍혀있는 샤또브리앙의 묘비명은 보이지
않으나 묘지 뒤쪽 옹벽에 붙어 있는 동판의 명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대문호 프랑수아는 여기에 쉬고 있습니다.
오직 바다의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만을 듣기 위하여.
길손이여
고인의 마지막 소원을 존중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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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GRAND ECRIVAIN FRANCAIS A VOULU REPOSER ICI
POUR N'Y ENTANDRE QUE LA MER ET LE VENT
PASSANT
RESPECTE SA DERNIERE VOLONTE"
< 오역이 있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생-말로 성벽 요새 박물관 벽에 붙어 있는 샤또브리앙의 부조-
**1848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루이 16세 치하,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치하, 왕정복고 등의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 속에서 정치가로, 작가로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그랑-베 섬에서 건너다 보이는 쁘띠-베 요새-
**통상 보방(Vauvan)으로 불리는 보방 원수는 군사 기술자(Military Engineer)로서 루이 14세에게
프랑스 국경 통합 방어 구축을 건의 하였다. 세바스찬 보방(Sebastien le prestre Vauvan)이
설계하고 건설한 요새는 12개의 그룹이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비두앙 탑(La Tour Bidouane)-
**도시 성곽 서북쪽 코너에 돌출된 암반 위에 15세기 후반에 건설된 이 탑은 높이 23 m, 폭 13 m의 말굽형
레이 아웃이다. 탑 위에서의 전망이 대단히 훌륭하다. 탑의 하층은 포좌였으며 화약 저장소였다.
영국-네델란드 군이 1693년 화약을 잔뜩 실은 선박을 생 말로 요새에 돌진시켜 파괴하려
하였으나 암초에서 약간 벗어난 내쇼날 요새 사이에 좌초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비두앙 탑(La Tour Bidouane)을 돌아 보면서-
**탑과 목책 뒤로 그랑-베 섬의 일부가 보인다.
-성벽 방호용 목책-
** 대서양의 파도는 거세어서 성벽 보호와 이안류에 의해 모래가 씻겨나가는 것을 방지할 목적의
참나무 목책을 대대적으로 세웠다. 돌이나 콘크리트 구조물로 방파제를 쌓는것은 성벽을
보호할 수는 있으나 이안류의 강도를 조절할 수는 없어 목책이 효과적으로 보인다..
-내셔널 요새(Fort National)-
**간조 시에는 암초 사이에 놓여있는 석조 잠수교로 건너 갈 수가 있다.
-내셔널 요새(Fort National)-
**도시 성곽으로부터 약 300 여 m 북쪽 해안에 위치한 바위섬 위에 1689년에 세워진 요새이다.
이 요새 역시 군사 건축가인 보방(Vauvan)원수의 프로젝트와 루이 14세의 의지의 산물이다. 썰물 때
나타나는 사주와 해변은 부채꼴로 생겨서 인지 지도 상에는 부채 해변(Plage de l'Eventail)으로 되어 있다.
-부채 해변과 내셔널 요새-
**썰물 때라서 자유스럽게 요새를 방문하기도 하고 해변에서 즐길 수가 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내셔널 요새-
-랭 요새(Le Fort la Reine)-
**성벽 앞 해안, 내셔널 요새와 마주하고 있는 "여왕의 요새(Le Four La Reine)"라는 이름의 요새이다.
영국-네델란드 군의 포격이후 1694년 보방(Vauvan)원수의 명령으로 건설되었다.
-쟈크 까르띠에(Jacques Cartier,좌)와 로베르 쉬르쿠프(Robert Surcouf,우)-
**쟈크 까르띠에(Jacques Cartier,1491-1557)는 프랑스의 탐험가로, 지금의 캐나다 지역을 처음으로 탐험한
유럽인이다. 프랑수아 1세로부터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1534년 4월 두척의 배로 1차 항해,
캐나다에 도착한다. 1535년-1536년 2차항해 시 현재의 퀘벡 시를 발견하고 그 주변 땅을 "캐나다"라고 명명했다.
까르티에는 1.2차 항해 시 두 아이를 납치 해 프랑스로 데려가 공부를 시키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려 보낸다.
이 일로 까르티에는 비난을 받는다.
**로베르 쉬르쿠프(Robert Surcouf,1773-1827)는 1789-1801년과 1807-1808년에 인도양에서 프랑스의
사략선私掠船을 운영해 왔으며 상선 나포와 무역을 통하여 선주船主로서 부를 축적하는 동안 40여 회의
포상을 받았다. 쉬르쿠프는 선원으로 시작하여 아프리카 노예선의 사관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선장으로
승진하자 1793년 국제규약에 의해 노예 무역이 금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다.
그는 정부 포상금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다가 인도양으로 간 그는 사략선장으로 영국, 미국, 폴투갈
상선들을 나포하였고 레종 훈장을 받으며 선주로 자리를 잡는다.
-생-말로 내항 풍경-
-박물관이 수용되어 있는 요새-
** 건물 입구 위에는 Hotel de Ville라는 글씨가 있다. 숙박시설이 아니라 "정부 청사"라는 의미이다.
지방 정부 공공 건물이라서 반드시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입구 오른편에 작은 문이 박물관 출입문이다.
- 생-말로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요새-
** 요새 건물 옆에 회전 목마가 있는데 그 앞이 선창가 광장이다. 이 광장에서 길거리 음악회가 펼쳐진다.
-생-말로 요새 박물관 현관에 전시된 무기-
-박물관 초입의 샤또부리앙의 대리석 상-
-성-빈센트 요새-
-물 빠진 생-말로 북쪽 해변 풍경-
-끝없이 이어진 목책-
**직선에 가까운 북쪽 해변
-해변 풍경-
- 정부의 공공기관 건물로 사용되는 요새-
-요새 아래 통행을 위한 아취 앞 풍경-
-성벽 앞 공원 풍경-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