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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100주년 공동 심포지엄] 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 (2)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9.2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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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
이승하(시인ㆍ중앙대 교수)
이승하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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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데 참고로 한 책은 아래와 같다. 애당초 발표했던 발제문에는 각주를 붙여 일일이 출처를 밝혔지만 각주를 달 수 없는 인터넷 환경이라 책명만 서두에 밝혀둔다.
김근수, 『한국잡지사연구』, 한국학연구소, 1992.
정진석 외, 『한국 잡지 100년』, 사단법인 한국잡지협회, 1995.
최덕교 편저, 『한국잡지백년』 1, 2, 3, 현암사, 2005(재판).
4. 암흑기의 대변인 『국민문학』과 『삼천리』
『인문평론』은 그마나 외국의 작품과 문학이론을 국내에 소개하는 역할 정도는 충실히 하려고 애를 썼지만 『국민문학』으로 간판을 바꿔 달자 창간호부터 일문판으로 냈다. 표지에 큰 글자로 ‘座談會 朝鮮文壇の再出發を語る’라고 썼다. 1945년 2월까지 통권 38호가 나왔다. 창간호 좌담회에 참석한 이는 이원조ㆍ백철ㆍ최재서ㆍ박영희 등이었고 창간호에 작품을 낸 이는 주요한ㆍ임학수ㆍ이효석ㆍ김용제ㆍ이석훈ㆍ정인택 등이었다. 정한모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국민문학’ 항에 이렇게 썼다.
일제의 전시총동원체제, 이른바 신체제 구축의 일환으로서 조선총독부는 당시 조선 문단 전체를 강압적으로 통합, 어용화하여 황도정신(皇道情神)에 입각하는 국책문학으로 『국민문학』을 발행하도록 했던 것이다.
아마도 1945년에 광복이 되지 않았다면 이 문예지는 38호에서 멈추지 않고 간행되었을 것이고 우리말과 우리의 얼을 죽이는 데 큰 공을 세웠을 것이다. 『국민문학』은 정한모의 말대로 일본의 국책문학을 선도한 어용 문예지여서 주요 관공서에 뿌려지기는 했겠지만 독자들은 외면했을 것이다.
조선일보사의 한 명 기자에 지나지 않은 28세 청년인 김동환이 혼신의 열정을 바쳐 대중지를 만들었으니 1929년 6월 12일자로 발간된 『삼천리』였다. 24세 나이에 장시 『국경의 밤』을 쓴 김동환이었으니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잡지일 거라고 혹자는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는 태생적인 한계를 종내 벗어나지 못했다.
14년 동안 152호가 간행되는 동안 1만〜3만 부를 찍으며 크나큰 인기를 누린 대중지인 『삼천리』는 필자의 제한도, (반일만 아니면) 이념의 제한도, 신분과 종교의 제한도 없었다. 창간호에는 ‘돈 10만원이 있다면?’이라는 제목을 필력이 있는 사회 각계각층 인사에게 주고 400자 내외의 글을 쓰게 하여 받았다. 3주년 기념호에는 ‘三千里 一色’ 선발대회(지금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개최하여 그 과정과 결과를 발표했다. 한편, 한용운과 심훈의 시와 염상섭의 단편소설을 실었다. 제주도 해녀와 비구니의 세계를 면밀 취재한 기사도 실었다. 미두(米豆, 지금의 주식)로 백만장자가 된 이의 실화와 투자 실패로 한 번에 100만원을 잃은 이의 실화가 실렸다. 궁중비사와 야사도 실렸지만 같은 시기에 3대 신문에 연재소설을 쓰고 있던 홍명희ㆍ이광수ㆍ최상덕에게 뒷얘기를 써달라고 청탁해서 실었다. 『삼천리』에 실었던 지사들의 옥중기와 망명객의 체험기를 묶어 『평화와 자유』라는 책을 발간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지사들이란 서재필ㆍ안창호ㆍ이승만ㆍ장덕수ㆍ윤치호ㆍ안재홍ㆍ송진우ㆍ최린ㆍ허헌ㆍ홍명희ㆍ여운형ㆍ노백린ㆍ허정숙ㆍ이선근ㆍ이광수ㆍ김병로ㆍ조만식ㆍ주요섭ㆍ민태원ㆍ주요한 등이었다. 즉, 『삼천리』는 1938년 이전까지는 ‘민족’을 내세우지 않고 ‘대중’을 내세우며 흥미있는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대중잡지의 소명을 다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전시체제로 바뀌고 온 국토가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가 되자 1937년에는 신년호와 5월호만 내면서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1938년 5월호로 다시 나왔을 때는 흥미진진한 기사가 잔뜩 실려 있던 삼천리가 아니었다. 권두의 제목은 ‘국민정신 총동원 총후보국(銃後報國) 강조주간’이었고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총독 회견기
‘황국신민정신’을 발휘하라는 총독의 담화문
조선인 지원병제도에 대한 안내문
좌담회: 총독부 전(前) 고관이 모여 반도 치안의 고심을 말함
사상객들은 전시하에 얼마나 전향했는가
잡지를 살리기 위해 김동환은 시라야마 오오끼[白山靑樹]로 창씨개명을 했다. 총독부가 고안해낸 ‘임전보국단’의 본부가 삼천리사로 지정되자 그는 더더욱 친일파로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다. 『삼천리』의 마지막 호인 1942년 1월호가 ‘미영격멸(米英擊滅) 특집호’였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고 한편으로 생각하면 눈물겨운 특집이었다. 1942년 3월에는 『대동아』로 제목을 바꿔 1943년 3월호까지 3권을 냈지만 ‘재미’를 잃어버리고 ‘친일’만 남은 잡지를 대중이 찾을 리 없었다.
김동환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자수하여 공민권 5년 정지의 비교적 가벼운 형을 선고받는다. 미련이 남아 신문 형태의 타블로이드판 『삼천리』를 20면 안팎으로 찍어내면서 권토중래를 꿈꾸었지만 20호 발간으로 중단되고 만다.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김동환은 북으로 끌려갔다. 친일의 행적이 뚜렷했기에 북한에서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을 것이다.
1938년 1월과 4월에 두 번만 나온 『삼천리문학』은 『삼천리』의 문학편 같은 성격이었다. 김동환이 시는 모윤숙에게, 소설은 최정희에게 맡겼는데 『삼천리』의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한국잡지백년』을 펴낸 최덕교는 ‘민족 앞에 부끄러운 친일잡지’로 『국민문학』과 『대동아』 외에 3ㆍ1운동 때의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박희도가 펴낸 일문판 잡지 『동양지광』을 꼽았다. 박희도는 3ㆍ1운동 후 2년여 옥고를 치른 뒤 민족반역자로 거듭났다. 모두가 일본인이 되자는 것이 모토였던 『내선일체』, 황국과 천황을 향한 해바라기 잡지인 『태양』, 침략전쟁에 장단을 맞춘 『신시대』, 권두에 총독의 말을 내세우고 식민사관을 심어준 『춘추』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3권을 ‘최후의 발악’으로 소개한다. 일제 말기에 국내에서 나온 『총동원』과 『국민총력』은 총독부 산하의 기관지였다. 『녹기』는 일본의 극우단체 사상가들이 조선의 지식인층을 겨냥해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자 만든 잡지로 96호나 발간되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들도 주된 필자였다.
5. 해방공간에 쏟아져 나온 문예지
광복이 되자 꽉 막혔던 언로가 한꺼번에 터뜨려져 엄청난 종의 잡지가 나온다. 36년 동안의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난 이 땅의 언론인과 문인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100종이 넘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 무렵에 나온 잡지들의 문제점은 지질이 아주 나빴고 내용이 빈약했으며 부피 또한 얇았다는 것이다. 의욕은 앞섰지만 종이를 구하기 어려웠고 의욕만 앞서 졸속으로 만드는 것이 다반사였다. 1945년 11월 1일에 창간된 대중잡지 『선봉』을 필두로 하여 엄청나게 나온 잡지 중에는 절반 이상이 창간호가 종간호였다. 이 가운데 『백민』『민성』『신천지』『신태양』 『문예』『사상계』 등을 꼽을 수 있다.
『백민』은 1945년 12월 1일자로 창간할 때는 종합지였는데 제7호부터 문예지로 바뀌었고 한국전쟁 직전 23호로 종간되었다. 소설가 김송의 동생인 김현송이 만든 이 책의 편집장은 소설가 박연희였다. 창간호에 이승만ㆍ여운형ㆍ박헌영ㆍ안재홍의 연설문과 각 정당의 성명서와 결의문 및 정강 정책이 실렸다. 김송ㆍ김동인ㆍ채만식ㆍ정비석ㆍ이무영ㆍ김동리ㆍ김송의 소설이 차례로 실렸다.
김구의 초상을 창간호 표지로 삼은 종합지 『민성』도 45호를 냈을 만큼 해방공간의 대표적인 잡지였다. 창간호 표지에 ‘정국수습 누가 할 수 있나?’ ‘순국열사 도산 안창호 선생의 최후’ ‘원자폭탄의 정체’ ‘조선인의 민족의식’ ‘이충무공의 난중일기’ 등 특집기사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한 종합지 『신천지』는 1946년 1월 15일자로 창간해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9월까지 통권 68호를 발간하였다. 정치와 시사에 대한 심도 있는 기사가 실렸다. 『신태양』은 1949년 2월에 창간되어 10여호를 낸 대중오락잡지로서 큰 인기를 누렸다.
『문예』는 1948년 8월 1일자로 창간된 문예지로서 한국전쟁 중에는 제대로 못 내다가 1954년 3월, 통권 21호로 종간되었다. 발행인이 모윤숙, 편집인이 김동리였고 조연현이 편집장이었다. 남한 문단의 총 집결지 같은 문예지였다.
6. 한국전쟁 중에도 문예지는 나옴
25세의 청년 김종완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3종의 대중잡지를 만들었으니 『희망』과 『여성계』와 『문화세계』다. 아래는 직접 쓴 1953년 1월호 『희망』의 권두언 일부다.
오늘날 우리들의 공통된 희망이란 어떻게 하면 이 가열 처참한 전쟁을 명예롭게 완수하여, 자유롭고 통일된 조국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전쟁의 포성이 멎지 않은 상태에서 후방의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잡지를 연이어 발행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같은 호에 김달진ㆍ김규동ㆍ이덕진ㆍ양명문ㆍ장호강ㆍ한승권의 시가 실렸고 이무영의 소설 「사랑의 화첩」과 김말봉의 소설 「파도에 부치는 노래」가 연재되었다. 단편소설은 황순원의 「참외」와 이선구의 「홍국백국」이 실렸다.
김종완이 『희망』의 성공에 힘입어 낸 『여성계』도 큰 인기를 끌었고 문학 중심의 잡지 『문화세계』도 그의 손으로 만든 것이었다. 『문화세계』 창간호에 이런 제목의 논문이 실렸으니 김종완의 수완과 의욕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동란 조국과 문화의 위치(이숭녕)
문화정책의 현황ㆍ검토ㆍ제언(강상운)
언어정책의 사적 관견(이상옥)
비평문학의 새로운 기능(곽종원)
회의와 모색의 계제—한국문학계의 현황과 장래(임긍재)
문단을 위한 부의(백철)
신인 등장에 대한 문단적 분석(조영암)
문학목표에 대한 일고(조연현)
풍자문학과 민족성(조흔파)
창간호에는 오상순ㆍ박두진ㆍ설창수ㆍ김상옥의 시가, 노천명ㆍ윤금숙ㆍ전숙희의 수필이, 염상섭ㆍ안수길ㆍ최태응ㆍ박연희의 소설이 실렸고, 김동리가 장편소설 「풍우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나온 문예지는 아니지만 육군종군작가단에서 낸 기관지 『전선문학』 총 7권에는 35편의 시가 실렸다. 전쟁 기간 중에도 피난지 대구와 부산에서는 시집이 지속적으로 나왔는데 개인시집이 67권, 사화집과 동인시집까지 합치면 82권의 시집이 나왔다. 『구상시집』(구상), 『旗』(김춘수), 『보병과 더불어』(유치환), 『남해찬가』(김용호), 『총검부』(장호강), 『패각의 침실』(조병화), 『풀잎단장』(조지훈), 『목숨』(김남조), 『오도』(박두진) 등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시집이 전쟁 기간에 간행된 것을 보면 전방에서 전투가 한창일 때도 후방에서는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2년 4월, 부산에서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백낙준이 전시하 국민들의 정신을 바로잡자는 뜻에서 ‘국민사상연구원’을 만들고 기관지로서 『사상』을 만들었는데 이때 편집장이 장준하였다. 『사상』이 제4호를 내고 폐간되자 장준하는 1953년 4월 1일자로 『사상계』를 낸다. 1953년 11월호(제7호)까지는 부산에서 내고 12월호부터는 서울에서 내는데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모든 학자와 언론인, 문인과 정치인들의 발언대였다. 한국 잡지사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상계』의 역사가 1970년까지 계속되다가 김지하의 장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강제폐간되었다. 205호가 종간호였다.
1955년 2월호는 소설가 김성한이 주간으로 취임하면서 문학특집호로 꾸몄다. 이후 ‘사상계 신인상’ 제도를 시작하였고 ‘동인문학상’을 마련하였다. 동인문학상은 김성한ㆍ선우휘ㆍ오상원ㆍ손창섭ㆍ서기원ㆍ이범선ㆍ남정현ㆍ이호철ㆍ전광용ㆍ송병수ㆍ김승옥ㆍ최인훈ㆍ이청준 등이 받았다. 사상계로 등단한 시인은 민웅식ㆍ윤일주ㆍ김종원ㆍ이유경ㆍ강계순ㆍ홍완기ㆍ이창대ㆍ김영태ㆍ정열ㆍ김규태ㆍ신중신ㆍ강은교 등이었고 소설가는 박경수ㆍ구혜영ㆍ한남철ㆍ송상옥ㆍ김동립ㆍ현재훈 등이었다.
7. 혼란기를 넘어 정착기로, 『현대문학』 등장 이후
3년 1개월의 전쟁이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중단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자유당 정권의 독재가 시작되어 언론은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문단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면서 1954년 4월에 『문학예술』이, 1955년 1월에 『현대문학』이, 1956년 6월에 『자유문학』이 창간되었다. 모두 월간이었고 순수문학을 지향하였고 세 문예지에 관여하는 이들이 1961년 12월에 한국문인협회를 창립하게 된다.
『문학예술』이 1957년 12월에, 『자유문학』이 1963년 4월에 종간호를 내면서 사라졌지만 『현대문학』은 순수문학의 아성을 지키면서 60〜70년대에 한국의 문단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한다. 문인들의 작품 발표 창구 역할을 꾸준히 했지만 특히 ‘추천제’를 잘 활용하여 권위를 지켜나갔다. 신문사 주최 신춘문예에 당선되더라도 『현대문학』의 청탁을 받기 전에는 등단했다고 할 수 없는 문단의 분위기가 있어 신춘문예 당선자가 『현대문학』의 추천을 거치는 사례까지 나왔다. 신춘문예 당선자가 등단 10년 만에 『현대문학』의 청탁을 받고 비로소 소설가가 된 기분이 들었다는 일화도 문단에서 회자되었다.
1961년 12월에 결성되어 전영택ㆍ박종화ㆍ김동리ㆍ조연현ㆍ서정주 등이 번갈아 가며 이끌어 가고 있던 한국문인협회는 구심점의 역할을 할 문예지를 갖고 있지 못한 데 대해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홀로 버티게 된 『현대문학』이 수많은 문인협회 회원들의 발표 지면을 감당하기란 역부족이었다. 1968년 당시 문협 이사장으로 있던 김동리는 11월에 전국문인대회를 개최하고 문인협회 기관지인 『월간문학』을 창간하였다. 『월간문학』의 창간사를 찾아본다.
처음부터 문학상의 어떤 조류나 경향을 주장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출발하는 문예지가 아니요, 또 몇몇 사람의 우의나 동지적인 결합에 뜻을 찾고자 손을 대인 거사도 아니다. 미증유의 팽창과 성세를 이루고도 활동 무대를 갖지 못한 오늘날 한국의 전체 문인들에게 단 한 편일지라도 작품 발표의 기회를 더 마련해주고자 하는 것이 본지 발행의 가장 직접적인 동기요 중요한 목적이라 하겠다.
창간사를 쓴 김동리의 심중에는 문인협회 회원들에게 “작품 발표의 기회를 더 마련해주고자 하는” 뜻도 들어 있겠지만 문인협회 회원들을 강하게 결속시키는 구심점의 역할을 할 월간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의지가 분명히 있었다. 문공부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되었다는 점, 문협 간부진이 편집위원이라는 점, 시ㆍ소설ㆍ희곡ㆍ수필ㆍ아동문학ㆍ평론 등 거의 모든 장르를 포괄한 점, 분기마다 신인문학상을 공모한 점, 한국문학상과 윤동주문학상 및 동포문학상을 제정하여 시행한 점 등은 결속력 확보를 위한 방책이었음을 증명하는 것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월간문학』 창간호의 특집 제목은 ‘신문학 60년’이었는데, 이 특집란에 평문을 실은 문인은 백철ㆍ곽종원ㆍ조지훈ㆍ이형기ㆍ정창범ㆍ이철범이었다. 월간문학 창간호에 소설을 발표한 작가가 박영준ㆍ손소희ㆍ오유권ㆍ박경리ㆍ송상옥ㆍ강용준ㆍ정을병 등이었다는 것은 이 문예지가 『현대문학』과 큰 차이가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김동리는 1973년 11월에 또 하나의 문예지 『한국문학』을 창간하면서 따로 창간사를 쓰지 않고 자신이 편집을 맡았던 『문예』(1949년 8월에 창간하여 1953년 3월 통권 21호로 종간)와 『월간문학』의 창간사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는 『한국문학』의 창간 이념이 『월간문학』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팽창해진 문단 인구의 기회 균점”을 위해 탄생한 두 문예지는 특색 있는 문학론을 전개하거나 활발한 토론의 장을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순수문학 진영의 많은 시인과소설가들에게 발표할 기회를 주는 순문예지의 역할은 충실히 수행하였다. 월간문학이 문인협회의 기관지였음에 반해 『한국문학』은 김동리 자신이 편집과 경영의 최일선에 나섰다는 점이 다르다면 달랐던 점이다.
『한국문학』의 창간에 앞서 『문학사상』이 탄생하였다. 1972년 10월호를 창간호로 낸 『문학사상』은 1985년 12월, 체제가 완전히 바뀔 때까지 이어령이 경영과 편집을 도맡아서 했다. 책의 표지를 문인의 초상화로 한 특징은 오랫동안 이어졌으며, 1985년 말까지 이어진 이어령의 권두 칼럼도 특색이 있었다. 이어령이 특유의 현란한 문체로 쓴 창간사는 독자들에게 매호 많은 읽을거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만들어가는 이 작은 잡지를 펴낸다. 그리하여 상처진 자에게는 붕대와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폐를 앓고 있는 자에게는 신선한 초원의 바람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역사와 생을 배반하는 자에게는 창끝 같은 도전의 언어, 불의 언어가 될 것이다. 종(鐘)의 언어가 될 것이다. 지루한 밤이 가고 새벽이 어떻게 오는가를 알려주는 종(鐘)의 언어가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학사상』은 몇 가지 신선한 기획을 해 우리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자료조사연구실을 두어 인목대비의 「술회문」, 나옹화상의 「수도가」, 완산판 「별춘향전」「수남방옹가」「윤지경전」 등 300여 편에 이르는 고전문학 자료를 발굴해낸 점은 우리 문학사의 보완을 위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또 현대문학 분야의 미발표, 미정리된 작품을 800여 편이나 찾아내어 그 문학적 가치를 재조명한 ‘이 작품을 묻는다’란 기획도 보다 완전한 작가론과 시인론이 씌어지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창간호부터 해외특파원 코너를 마련하여 세계문학의 흐름을 재빨리 전해주었고, 외국의 문인이나 사상가에게 직접 청탁하여 글을 싣기도 하였다. 또한 아놀드 토인비ㆍ롤랑 바르트ㆍ앨빈 토플러ㆍ헨리 밀러ㆍ알랜 긴즈버그ㆍ보르헤스 같은 석학들과 직접 만나서 한 인터뷰를 자주 실어 독자의 지적 호기심도 적절히 채워주었다. 문학인뿐만이 아니라 인접 분야 전문가의 글들도 책의 또 다른 읽을거리였다. 시간(고전문학과 현대문학)과 공간(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초월하려는 『문학사상』의 집요한 노력은 짧은 기간 내에 판매 부수를 현저히 늘려 전통의 문예지 『현대문학』과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다. 문학사상사는 1977년에 제정한 이상문학상에 사운을 걸게 되었고, 이 상은 문예지의 문학상 관리에 있어 모범적인 예를 제공하였다.
시 전문 월간지도 다수 창간되었다. 문덕수가 1965년 4월에 창간했다 20호를 내고 조연현에게 편집권을 넘겼던(현대문학사에서 23호까지 발행) 『시문학』이 문덕수에 의해 1971년 7월호로 재창간되었다. 해외 시단의 소식을 전하고 해외 유명 시인의 시세계를 소개하는 일, 한국시의 해외 소개에 주력한 점을 높이 살 만했다.
한편 1969년 5월 전봉건이 주재하여 창간한 『현대시학』의 초기 편집위원은 박두진ㆍ박목월ㆍ박남수ㆍ구상ㆍ김춘수ㆍ전봉건이었다. 창간 이후 시와 시론의 발표장과 해외시에 대한 소개의 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는데, 전봉건 사후 정진규 시인이 30년을 이끌었고, 2014년부터는 편집권을 전봉건 시인의 자제가 회수하여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60년대 말에 동인지 성격으로 등장한 『시인』은 이장근이 편집과 발행을 맡았는데, 70년대에 들어 조태일이 편집장이 된 이후부터 면모를 일신하였다. 김지하와 양성우를 문단에 내보낸 문예지로 유명해진 『시인』은 진보적 성향의 시 전문 월간지로서 이가림ㆍ김준태ㆍ박정만 등의 시인과 구중서ㆍ김병걸 등의 평론가가 주요 필진이었다.
1973년 10월에 박목월이 편집인과 발행인을 겸해 창간한 『心象』에는 박남수ㆍ김종길ㆍ이형기ㆍ김광림 등의 지인이 참여하였고, 전통 서정적 심상을 바탕으로 현대적 감각의 시들을 주로 싣고 있다. 박목월의 사후에는 아들 박동규가 오늘날까지 결호 없이 내고 있다. 시전문 월간지는 『心象』의 등장으로 『시문학』『현대시학』과 삼각구도를 갖춰 시인들의 활동 무대가 대폭 넓어졌다. 『시인』의 생명력이 보다 길었다면 이 세 시전문지와 상호 견제를 하며 보수와 진보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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