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터 제9집 출간
명당明堂, 좋은 자리. ‘터’라는 말은 참 좋다. 정겹다. ‘터’라 하면 사전적으로는 궁궐터, 절터, 우물터 등 건물이나 구조물이 들어서야 하는 맞춤한 자리(땅) 또는 어떤 일을 이루는 밑바탕이나 그 근간을 일컫는 말인데 써놓고 봐도 소리를 내어 읽어봐도 참 정감이 가는 마음 든든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시터’ - 시의 밑바탕, 시의 고향, 시의 근간, 시가 편안히 머무는 곳, 시가 있을, 있어야 할 맞춤하고 좋은 자리(땅)!
정영숙, 최금녀, 최도선, 한이나, 황상순, 노혜봉, 신명옥, 신원철, 윤경재, 이명, 이미산 등, 열한 명의 긴 숨비소리를 세상 밖으로 내놓는다. 12년 째 시의 터를 야무지게 다지고 있는 시터 동인들.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의 나선 같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의 길 위에 매년 열정으로 빚은 붉은 벽돌 한 장씩 얹고 있다. 책을 펼치면 붉게 빛나는 창문마다 초록빛 나무들이 고개를 내밀고 색색의 빛깔로 춤추고 있으리라.
시터 회원: 정영숙, 최금녀, 최도선, 한이나, 황상순, 노혜봉, 신명옥, 신원철, 윤경재, 이명, 이미산
소라껍데기를 찾지 못한 게는 버려진 깡통으로 집을 마련했다 방도 더없이 넓고 이곳저곳 다니기에 부족함이 없으나 내 귀는 깡통 더 이상 바다가 그립지 않다 ---황상순, [소라게의 집] 전문
나, 지금 여기 단동/ 세상에 태어나/ 내 태가 묻힌 영흥/ 나, 아직 죽지 않았다// 영흥까지는 몇 킬로나 될까?/ 큰아버지와 기와집이 있는 곳/ 평양댁이 사는 곳/ 과수원이 있는 곳/ 러시아 군인이 별사탕을 던져주던 철길이 있는 곳/ 아카시아 꽃길이 있는 곳 산기슭이 있는 곳// 큰 마당 작은 마당이 있는 곳 마이크가 있고 축음기가 있고 외갓집이 있고 사촌이 있고 뻐꾸기 우는 언덕이 있는 곳 용흥강이 흐르는 곳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 기차선로는 깔려 있을까? ---최금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압록강에서의 망원] 부분
내가 잠시 앉았던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었네 당신의 알몸을 빌어 잠시 내가 청색을 입었을 뿐
당신은 원래 무색의 알몸을 지닌 아이
한때 난 아이 같은 당신을 몹시도 사랑했었네 ---정영숙, [청나비는 청나비가 아니다] 부분
히말라야의 대가리는 거대한 얼음 항아리 그것이 녹아 시바의 머리털 설렁설렁 감기며 힌두의 넓은 들판 촉촉이 적셔오면 불의 도시에서 목 빼고 기다리던 사람들 와글와글 뛰어들어 세속을 씻고 죽음도 뿌리고 모래처럼 쌓이는 무한 윤회 ---신원철,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부분
----{시터} 제9집,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