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산 언덕
길거리에서 사과 장사를 하다가 하나둘 피난 내려온 무학여고 학생들을 만난다. 소문은 퍼져 여러 선생도 난전에서 보게 된다. 차사백 교장은 학생들의 뜨거운 요청으로 가르칠 터를 찾게 되었다. 전쟁이 한창이어서 부산 바닥은 온통 야단법석이고 북새통이다. 사는 게 구차하여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을 때인데 봄은 무심히 찾아오고 보수동 산기슭은 치렁치렁 꽃들과 신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산 중턱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학교 부지 물색에 밀려나 언덕배기에 늦게나마 한 자락 차지한 것이다. 1951년 5월 1일 서울 무학여자고등학교 부산 피난지 개교식을 갖고 준비 끝에 다음 달 6월 1일 수업을 시작했다. 한복에 쪽진머리를 하고 굳게 다문 입술을 한 의지의 차사백 여교장은 이렇게 허름한 학교를 열었다. 부산시 중구 보수동 31번지이다.
당시 이희정 미술 교사는 “나는 부산에 와서 감히 시중에서는 학교 세울 자리를 찾지 못해 교장 선생님을 모시고 한 선생과 함께 어느 산기슭에 세워 보려고 이곳저곳 수일을 헤매었다. 그때는 학교마다 장소 쟁탈전이 벌어진 듯한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돌을 한곳으로 모으고 풀을 뽑고 흙을 펴서 텐트를 친 뒤에 서둘러 교육한 것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울퉁불퉁한 곳과 흙 계단이 의자이고 무릎이 책상이었다. 처음에 60명이 차차 수가 늘어 500명이 넘자 천막 교실은 소용없고 나무 아래가 교실로 쓰였다.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화단을 가꾸어 곳곳에 꽃나무와 풀꽃을 심어 꽃 병풍, 꽃동산을 이루었으니 가관이다. 낡아빠진 군용천막 하나에다 휴대용 흑판 서너 개가 시설 전부였다. 그러다가 천막이 하나둘 늘어나고 내버린 식당 긴 나무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밤나무와 떡갈나무 사이사이에서 풍성한 자연의 분위기를 맛보며 행복한 수업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가엾은 일이다.
따스한 햇볕과 서늘한 바람이 좋았고 철 따라 변하는 바다 빛과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바다 위 구름을 보며 꿈 많은 여학생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이 언덕에서 일어났다.
그해 여름엔 사무실과 숙직실이 세워지고 8월 졸업식도 가졌다. 여학생들이 줄지어 이고지고 끌어올려서 판자 교실과 교무실도 만들어졌다. 이듬해인 1952년 3월에 7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가을에는 교무실을 다시 증축하여 낙성식도 가졌다. 아기자기한 얘기에 빠질 듯이 그 어떤 소꿉놀이가 전설처럼 들려온다.
어최선 교사는 지리, 국사, 세계사, 물상까지 네 과목을 가르쳤고 장용학 교사는 역사, 국어, 고전, 한문을 맡아 교육했다. 신문 사설의 한자 단어를 쓰게 하는가 하면 소설을 읽게 하였는데 교과서가 없어서 이렇게라도 수업을 해야 했다. 교사가 흑판에 쓰면 학생들은 아무 종이에나 받아 적곤 했다. 간간이 학교 옆 산기슭에서 사대부고 학생들의 수업하는 소리도 들렸다니 피난 학교들이 주위에 있었나 보다. 이런 현실은 소설 “요한시집”에 영향을 주었다.
8회 이경희 졸업생은 “전쟁 중에서도 졸업할 수 있었으니 여러 선생님의 따뜻한 은공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졸업식을 앞두고 사은회 때는 정든 부산 무학을 떠나기가 너무 서러워 한없이 울었습니다.”
9회 손승희 졸업생은 보수산 기슭에서의 글에 ”어떤 겨울인가 몇 십년만에 처음으로 내렸다는 폭설로 해서 내 키의 반이나 쌓인 일이 있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제일 먼저 학교가 걱정되어 가 보았더니 천막 교사의 지붕이 눈에 눌려서 주저앉아 있었고 벽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지금 기억해 보니까 그때 그 광경을 보고 우리는 철없이 재미있어 한 것 같다. 슬프거나 걱정 같은 기분은 전혀 없이 마냥 그 광경이 우습고 즐거운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기록 일지에 1952년 12월 10일 풍설로 교사 전부가 파괴되었다고 적혀있다.
10회 이정우 졸업생은 “엄동설한에 화물칸에 자리를 마련하여 추위에 떨며 부산까지 내려갔다. 몇 개월 뒤 부산 보수공원에 무학여고의 임시 개교 소식을 전해 듣고 너무 기뻐서 잠을 설쳤다. 그러나 공부할 자리조차 손수 마련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산등성이에 돌을 깔고 앉아 신문으로 해를 가리고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그마저 고맙고 다행한 일로 생각되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판자로 벽을 만들고 텐트로 지붕을 덮어 교실을 정성껏 마련해 놓으면 폭풍으로 다 쓰러져 선생님들과 힘을 합하여 몇 번이나 다시 세워야 했던지,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온 정열을 다해 선생님들은 우리를 열심히 지도해 주셨다.” 그 당시 수업상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12회 유혜영 졸업생은 학창시절을 회상하면서의 글에 “학교는 산 중턱을 계단식을 파서 그곳에 천막을 치고 공부를 했지만 추운 천막 교실에서도 우리는 늘 즐거웠고 학우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담임선생님은 장용학 선생님이셨는데 우리는 선생님의 함경도 억양을 흉내 내며 늘 함박웃음을 터뜨리곤 하였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 천막이 날아간 일도 있었으며 눈이 쌓인 어느 날은 선생님과 눈싸움을 하며 좋아서 깡충깡충 뛴 일도 있었습니다. 장용한 선생님은 한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책을 읽으라 해서 소설책을 서로 빌리고 빌려주면서 밤을 세워가며 읽곤 하였습니다.
그 후 선생님은 어느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계셨고 무엇이 잘못되어 심한 고문으로 몸이 상하고 귀는 보청기를 사용했습니다. ’77년 10월 동기 총회에 모셔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너희들과 같이 늙는다고 하시면서 건강하자고 하더니 ’99년 8월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려웠던 그때의 일을 아쉽고 그리워하며 안타까워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특별활동과 교외활동을 했는데 미술, 습자, 수예 등으로 전람회도 열고 <풀잎사귀>라는 학생 작품집도 발간했다. 또 춘향전 연극공연을 부산극장에서 가졌다. 6.25전쟁 속에 피어나는 이들의 애국심도 대단했다. 군부대와 국군병원, 군경상이용사에 대한 위문을 하는가하면 군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공연을 통해 나라를 지키려는 국군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겨울철 군부대 김장담그기 작업 등 힘든 일을 맡아서 열심히 배우고 일했다.
임시 천막 교사에서 3회의 졸업식을 갖고 땀과 눈물로 얼룩졌던 보수동 산 중턱 천막 교실을 뒤로 한 채 서울 성동구 행당동 무학여고로 복귀했다. 한 송이 꽃이었던 무학인들의 마음속에는 회한이 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1953년 9월 30일 자로 부산분교를 뒤돌아보고 또 보며 서울로 올라갔다. 29개월 동안 긴긴 3년 세월, 그녀들이 머물렀던 자리에 복병산 혜광꽃이 피고 있다.
첫댓글 그런 아픈 역가사 있었군요
부산은 공산군 진입이 없어서 그런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학교가 혜광고등학교입니다.
대립의 역사를 상생의 역사로 바꾸어야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텐데.
적과의 동침이 참 좋은 말입니다.
몰랐던 혜광고 아픈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도 학생들은 즐거웟던 추억이 쌓였네요
전쟁이 참혹했습니다. 교장이 길바닥에서 사과장사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