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 그리움의 정서와 십자가(요14:6)
2023.4.2 종려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고난주간이 시작되기 때문에 고난주일이라고도 부른다. 종려주일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 받기 위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절기이다.
종려주일이라는 명칭은 주님이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을 들고 흔들며 환영했던 것에서 기인한다. 금주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그래서 보통 이 날을 성(聖) 금요일이라고 부른다.
특히 오늘은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예배 중에 성찬예식을 행한다. 성찬식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다짐하는 예식이다(눅22:19, 고전11:24).
“19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눅 22:19-20)
주님은 왜 이처럼 당신의 살과 피를 기념하라고 하셨을까? 일단 성경에서 살과 피는 생명(Life)을 뜻한다. 그렇기에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라는 말씀은 곧 독생자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희생을 잊지 말라는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성삼위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뜻과 희생이 마치 거대한 화산처럼 분출했던 사랑의 폭발 현장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고 죄에 빠진 사람들(나, 우리)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 시키면서까지 사랑의 손을 내미셨을까? 그 중요한 단서들 중의 하나가 “아버지”라는 호칭이다. 성경은 하나님 단지 창조자로만 기록하지 않고, 아버지라고 기록한다(마6:8,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등). 그래서 사도신경을 외울 때에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한다. 충청도식 표현으로 말하면, 아버지라는 호칭 속에는 우리를 정말 “끔~~~찍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따뜻한 마음이 다 녹아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22-24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지체하지 않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쫒아내셨다. 생각해 보면, 에덴동산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고, 범위를 넓히면 온 인류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왜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고 그들을 쫒아내셨을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읽어보자.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2-24)
이 말씀을 보면, 아담과 하와를 쫒아내신 이유는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봐서였다(22절). 다시 말하면 타락한 상태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으면, 그 상태로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에 대한 추방은 벌을 주거나 보복을 위한 추방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추방이었던 것이다. 이 속에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깊은 계획이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세기에 언급된 생명나무가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새 예루살렘, 천국, 본향)에 다시 생명나무가 등장한다. 이것이 주님의 계획이셨고, 아버지의 마음이셨다.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비록 쫓겨나긴 했지만, 그들의 마음 속 깊이에는 따뜻했던 아버지의 사랑과 낙원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남아 있었다. 이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류의 마음에도 동일하다. 이것을 전도서 3장 11절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특히 한국인들은 유독 그리움의 정서가 더 강한 경향이 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돌아가셨다”라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그리움들을 이룰 수 없을 때, 그 그리움은 가슴에 사무쳐서 한(恨)이 된다. 반대로 그것이 풀어졌을 때는 흥(興)이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를 터치는 하는 노래들을 부르거나 들으면 가슴을 저민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국인들이 애창하는 아리랑, 타향살이, 고향의 봄, 오빠생각, 섬김 아기, 어머니 마음 등과 같은 노래들을 보면, 그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그리움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는 역사적인 고난이나 환경의 영향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아담과 하와 이래로 사람의 마음에서 흐르는 잃어버린 낙원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가 밑바탕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놀랍고 충격적인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그리워하신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불붙는 사랑으로 그리워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죄라는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사59:1-2). 여기서 잠시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이 세상에 어린 자녀들이 때국물이 줄줄 흐르는 더러운 모습으로 집에 오면, 그 모습 그대로 이부자리에 들여보내는 부모는 없다. 깨끗이 씻겨서 들여보낸다.
하나님 아버지도 이와 동일하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을 때, 가장 먼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을 하나님의 집,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해서, 우리들 영혼의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어내실 방안을 생각해 내셨다. 그것이 바로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그 장소가 바로 십자가였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정말 그렇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김을 받았고, 마귀의 머리가 박살났으며,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영혼의 그리움의 정서가 완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한 영혼의 제단과 물두멍과도 같고, 어린 시절 부모님이 우리를 씻겨주시던 사랑의 목욕통과 같은 곳이다. 또한 교회는 영혼의 목욕탕과도 같다.
그래서 그럴까? 주님의 보혈과 천국을 사모하는 찬송을 부르면 가슴이 깊이 저려온다. 왜 일까? 십자가에서 내 죄가 씻음 받았고, 영원한 아버지의 집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다시 서두에 언급한 질문을 생각해 보자. 왜 주님은 온갖 조롱과 고난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살과 피까지 다 쏟아주셨는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이다.
왜 주님은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는가?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과 이에 순종하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리스도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나의 몸과 영혼을 맡기기로 결정하는 것 바로 영접하는 것이며, 자녀의 신분이 회복되는 것이다(요1:12).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전도와 선교이며, 나의 존재 이유이며, 이것이 곧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모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평생토록 내 영혼과 삶의 주인으로 섬기자. 남은 생애 동안 결코 주님을 품을 떠나지 말자. 그래서 모든 인류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영원한 아버지의 집에 한 사람도 낙오자 없이 다 함께 들어가고, 들어가게 하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