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들 세상
허 열 웅
나는 이름 없는 사람! 당신은 누구세요?
당신도- 또한- 이름 없는 사람인가요?(에밀리 디킨슨의 “이름 없는 사람”중에서)
우리 대부분은 아무것도 아닌 보통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러기에 또 다른 이름 없
는 사람을 알아보고 당신도 그렇지? 그러니 우리 한패로구나 하며 스스럼없이 어울
리면서 “대단히 출세한 사람”들 앞에 숨죽이고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상은 이들로 인해 바뀌기도 하고 빛을 발하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과 촛불
집회가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신경림 시인은 시 ‘파장’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이라고 표현했다. 권력과 돈을 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봤자
여름 한 철 늪에서 허공을 향해 울어대는 개구리에 불과한 것이다. 목청을 높여 그
저 힘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름이 지나면 개굴개굴 소리조차 못 지르
고 땅 속으로 들어가야 하듯 힘을 잃는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이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나도 한 때는 공기업 중견간부로 구매부서에서 납품업자에게 ‘갑’이 되어 목에 힘
을 주기도 했고, 본사의 경영평가부서에서 지방기관의 실적을 확인하여 순위를 정
하고 상여금을 차별 지급하는 위치에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년퇴직을 한지가
10년도 훌쩍 넘다보니 평범한 퇴직자가 되어 이름 없는 사람으로 자유롭고 편하게
살고 있다.
출판업계에 따르면 요즈음 “대단한 꿈 없이 적당히 포기하며 살자” 며 위로 공감의 말을 전하는 Essay이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사는 게 녹록치 않은 청년층 현실이 반영된 것 같다. 전쟁의 영웅이나 금수저의 출세이야기 대신 무명의 생활인들이 꽃피우는 뒷골목의 미담이 이 시대를 이끄는 희망의 원천이 되어가기 때문인 것이다.
금년 들어서는 성공하는 나대신 당당한 나를 꿈꾸는 세상으로 변해간다. 일상생활에서 좀 무례한 대우를 할 경우 참지 말고 대처하는 방법은 물론 자세를 낮추는 대신 자기를 1 순위로 두라는 메시지를 담아낸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이로 인해 미투 운동이 확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 때는 자기계발서나 성공하려면 스스로를 단련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내용들의 책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나를 바꾸려는 노력보다는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 두기로 나를 지키겠다는 생각이 앞선다고 볼 수 있다.
예스24에 따르면 금년 들어 판매량이 가장 많은 에세이는 <일단 오늘 나에게 잘합시다>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힘 빼기의 기술><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며느리 사표>등 모두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으로부터 자신을 지혜롭게 방어하거나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강조한 내용들이다.
이런 책들의 인기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살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주 52 시간 근무와 맞물리면서 집단주의 및 권위적인 문화로 인해 쌓인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장관급을 지낸 선배와 한 때 권력의 실세였던 친구등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고급음식점의 밀폐된 방에서의 시간은 불편하고 지루할 따름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싼 안주와 술도 입맛에 잘 맞지도 않아 취하지도 않았다. 우리 인간의 행복 거주지는 마음이다. 누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 식사를 할 때 마음이 편해야 즐겁고 맛이 있는 것이다. 제아무리 즐거운 이야기나 맛있는 음식도 불편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빨리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앞설 것이다.
지난 6월에 사망한 김종필 전 총리가 쓴 회고록의 한 부분이다.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보다는 자리에서 밀려났거나 야인생활을 할 때 찾아온 사람들이 더 진솔하고 정겨워 오래 기억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50년 가까이를 권력의 핵심에 머물거나 밀려나기를 되풀이 하면서 풍운아처럼 살아온 역사의 증인이었다.
그가 남긴 묘비명의 한 구절에 “90년을 살아보니 지난 89년이 헛된 것 같다”고 기록하여 인생무상을 실감케 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인생이란 숨 짧은 촛불이고,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 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버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독백을 했다.
고희를 넘긴 나이다. 직책도 이름도 없어 보통은 할아버지라 부르고 어쩌다 누구는 어르신네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듣기에 유쾌하지도 않고 어색할 뿐이다. 헐렁하고 편한 티셔츠에 운동화를 신고 뒷골목의 가격 착하고 안주 풍성하게 주는 집에서 마음 편한 친구와 술잔을 나누고 싶다. 보통 사람의 이름조차 지워질 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니 어느 시인의 말처럼 아름다운 지구에 소풍 온 것처럼 나머지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