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코린 15,1-11; 루카 7,36-50
+ 오소서 성령님
명절 잘 지내셨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는데,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한더위’였던 것 같아요? 건강하게 가을을 잘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부활에 대해 말합니다. 당시 코린토 교회에는 부활에 대해 두 가지 커다란 오해가 있었는데요, 첫째는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 그리스의 사고방식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신자들은 ‘영혼의 불멸’은 믿으면서도 ‘육신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지금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강렬한 영적 체험’이 바로 부활이라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영적 체험은 부활을 미리 앞당겨 체험하는 것이지, 부활 그 자체는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오해들을 거슬러,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후 베드로, 열두 사도, 오백 명의 넘는 형제들, 야고보, 다른 모든 사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바오로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증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왜 돌변하여 박해받는 사람이 되면서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고, 그분을 자신 안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시몬이라는 바리사이 사람이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당시엔 지혜로운 사람을 모셔서 함께 식사하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는데요, 이 소식을 듣고 죄인인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이 여인은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터인데’하고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알아차리시고 시몬에게 질문하십니다.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탕감해 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옳게 판단하였다”하고 말씀하신 뒤, 여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사실은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이 예수님께 해 드렸어야 할 일을 대신 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것은 바리사이였지만, 그는 음식만 제공했을 뿐, 예수님을 진정 귀한 손님으로 맞아들인 사람은 이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죄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자신의 사랑으로 드러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는데요, 내가 주님께, 이웃에게 더 많은 사랑을 드리는 것이, 내가 더 많이 용서받았음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용서가 먼저일까요, 내가 드리는 사랑이 먼저일까요? 용서는 사랑을 낳고, 사랑은 용서를 낳기 때문에,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용서받을수록 사랑하고, 사랑할수록 용서받습니다.
루카 복음 7장은, 지난 월요일 복음이었던 백인대장의 종을 고치시는 기적으로 시작하여, 오늘 복음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을 고쳐주시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께 친구들을 보내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감탄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이방인이었고,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는 유다인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둘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겸손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교만한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가서 앉으셨다. 그의 집에 앉기는 하셨지만, 그 바리사이의 마음에는 사람의 아들께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다. 이와 반대로 백인대장의 집으로 향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의 집에 들어가지는 않으셨지만, 그의 마음을 차지하셨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 마음은, 예수님께서 쉬실 수 있는 겸손한 공간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교만한 공간인지 성찰하여 봅니다. 바리사이처럼 예수님을 모신다 하더라도, 남을 단죄하고 판단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 안에서 쉬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 마음을 닮아 겸손해질 때,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차지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 마음을, 우리가 다 차지하려 하지 말고 예수님께 공간을 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데릭 보우츠,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 1440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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