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를 깊이 묵상하다가 느닷없이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낯선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모티브가 되는 구원.....
그러나 구원의 허상은 또 다른 신앙의 모티브를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구원의 실상과 허상 사이에서
종교에 대한 지성적인 성찰을 디테일한 성경적인 감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신앙의 모티브로 구원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믿음은 구원받는 영적 생명의 원리이지만
믿음, 그 자체가 구원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막연한 구원, 막연한 믿음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면 사상누각일 것입니다.
안개속 구원의 허상은 믿음의 실상을 잃어 버리고.....
꿈을 이루는 신념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문득 현대인은
왜 구원에 대한 관심이 없을까를 생각하면서
구원이란은 무엇이며 또한 누구의 것인지......
구원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찾아 진지한 성경의 탐색을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말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서 구원받은 롯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습니다.
죄악의 관영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롯은 천사의 손에 이끌려 생명을 보존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구출된 것을
롯은 생명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구원에 대한 언급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의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들이 청종하였더라"
롯은 구원이라는 말을 언급하였지만
르우벤은 구원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르우벤의 생각을 창세기의 저자는
구원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요셉에 대한 르우벤의 생각은
생명의 구원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구원에 대한 언급은
애굽의 총리대신 요셉의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큰 구원을 언급하면서
야곱과 그의 형제를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인도하여 살게 한 것을
하나님의 큰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바로를 "아버지, 그 온 집의 주, 온 땅의 통치자"라는 구원 개념을 지혜로 상정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에서 야곱이 아들들에게 예언적인 기도를 하는 가운데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는 메시야적 구원 사역의 탄원을 하였습니다.
단 지파에 대하나 예언 기도를 하면서
심판과 구원에 대한 언급은 의미심장하기만합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렇게 창세기에서 구원에 대한 문제는
육신의 생명에 대한 구원이요,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구원이었습니다.
다만 요셉을 통하여 구원을 베푸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강조는
주권적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서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의 역사 한가운데 선 모세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게르솜이요, 둘째는 엘리에셀이었습니다.
모세는 두 아들의 이름을
역경의 삶을 회상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은혜로 담았습니다.
게르솜은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
엘리에셀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 아들로 호사스런 왕자의 삶에서
겨우 바로의 칼을 피해 미다안 광야에서 도피생활을 하면서 얻은 아들 이름을 지으면서
구원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모세 이름의 뜻이 물에서 건져 내었다는 구원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은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는
모세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구원은
바로와 애굽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주권적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출애굽하여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출애굽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구원의 능력으로 선포하고 찬송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 앉았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 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이렇게 출애굽의 구원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하나님으로 신앙되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법의 속죄와 대속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제의식이었지만 구원,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광야와 가나안 입성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 되었지만
레위기 법의 속죄와 대속은 구원의 개념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사사기에서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미디안과 아말렉과 불레셋과 가나안의 압박과 전쟁에 대한 구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신 구원의 역사는
곧 사사의 활동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구원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었고......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인자와 긍휼을 베푸는 은혜요, 선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탄원과 기도는 구원의 은혜를 받는 방편이었으나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하는 방편이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믿음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는 어불성설이요, 무속적인 신앙의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불력처럼
믿음의 능력을 영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대부분 사이비 교주의 자기 우상화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영성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은
신화를 믿는 범신론적 인본주의 무속신앙입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성령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신앙입니다.
신본주의, 믿음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신앙이요,
인본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능력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무속적 주술신앙입니다.
오늘날 영성 신학과 영성 신앙을 추구하는 한국 교회는
신본적 믿음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사실상 상실하였습니다.
.
.
계속
.
.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카페의 글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성경의 달인이요,
말씀묵상의 경지를 이룬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