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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61)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의 생애 ①
심오한 영성 지닌 소화 데레사의 영적 자매
가르멜의 성인 중에는 보석처럼 빛나지만 아직 한국 교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에 성녀 소화 데레사와 동시대 사람이자 그분만큼이나 깊은 영성을 간직하고 있는 프랑스의 가르멜 수녀님이 한 분 계십니다. ‘복녀 삼위일체의 엘리사벳’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이분의 속명(俗名)은 ‘엘리사벳 카테즈’(Elisabet Catez)고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해서 받은 현의(玄義), 즉 앞으로 수도생활을 이러저러한 지향을 갖고 하겠다 하는 이름은 ‘삼위일체’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성녀 소화 데레사가 워낙 오래전부터 많이 알려진 데 반해, 사실 복녀 엘리사벳은 그간 소화 데레사의 그늘에 가려져 그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럽 교회에서는, 예컨대 20세기의 대학자 가운데 한 분으로 존경받는 폰 발타사르 같은 경우 복녀 엘리사벳을 소화 데레사에 비견되는 영적 자매라고 부르며 일찍부터 그분의 영성이 지닌 심오함을 주목해 왔습니다.
단명했지만 깊었던 영성
지난 2006년에는 복녀 엘리사벳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서 그분의 영성을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가 세계적으로 거행됐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난 올해 교황청에서는 돌아오는 10월 16일에 이분을 시성하기로 공포했습니다. 이제야 그분의 진가(眞價)가 드러나나 봅니다. 그래서 이번 호부터는 20회에 걸쳐 복녀 엘리사벳의 생애와 영성에 대해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분 역시 소화 데레사처럼 단명(短命)했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24살에 세상을 떠났고 복녀 엘리사벳은 26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스갯소리일는지 몰라도 가르멜 수도회에서는 30세가 되기 전에 죽어야 성인이 된다는 낭설(浪說)이 전해져 옵니다.
방금 소개한 두 성인 말고도 20세기 초반 칠레 출신의 안데스의 성녀 데레사라는 가르멜 수녀님은 심지어 수련을 받던 20살에 임종한 후 성녀가 됐고, 16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 가르멜의 레디의 성녀 데레사 말르가리타는 23살에 임종한 후 성녀가 됐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살아온 햇수가 반드시 영적인 성숙 여부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진리를 여실히 보여주는 거룩함의 표양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길게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밀도 깊은 사랑의 순도(純度)로 자신에게 허락된 삶을 불사르며 치열하게 사는 것이 성성(聖性)에 이르는 관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버지 여의고 디종으로
복녀의 생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세속에서의 삶(1880~1900년), 2) 디종 가르멜 수녀원에서의 삶(1901~1906년 3월), 3) 수녀원 병실에서의 삶(1906년 3~11월). 우선 세속에서의 엘리사벳의 삶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복녀는 1880년 8월 18일 프랑스의 부르쥐 지역의 아보르(Avor)라는 도시에 있는 군영 막사에서 태어났습니다. 복녀의 아버지는 당시 프랑스 군대의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역시 그와 함께해야 했고 복녀의 어머니는 엘리사벳을 군영 막사에서 해산했습니다. 복녀의 친자매로 ‘마르가리타’라는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복녀는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더 이상 군영 막사에서 살 수 없었던 엘리사벳 가족은 결국 디종(Dijon)으로 이사해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엘리사벳의 생애에 있어 주 무대가 되는 디종은 오늘날 프랑스의 중동부지방에 자리 잡은 중간 규모의 도시에 속하지만, 중세 당시에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로서 번영을 구가하던 제법 품격 있는 도시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여전히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고풍스런 건물들이 도시 전체를 꽉 채우고 있습니다.
풍부한 음악적 감수성
디종으로 이사 온 엘리사벳은 7살이 되던 그해에 첫 고해성사를 했는데, 훗날 증언에 따르면 그때부터 신앙심 깊은 아이로 점차 변해 갔다고 합니다. 이듬해인 1888년, 엘리사벳은 본당 신부님께 수녀가 되고 싶다는 원의를 처음으로 얘기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감수성이 예민했던 엘리사벳은 특히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런 엘리사벳을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아낌없이 지원했습니다. 1888년부터 엘리사벳은 디종에 있는 콘세르바토르에 등록해 열심히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5년 후인 13살 때에는 콘세르바토르에서 주최하는 피아노 콩쿠르에서 두 번이나 대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당시 디종 시에서 발간된 신문에는 쇼팽의 곡들을 연주한 소녀 엘리사벳을 극찬하는 평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이미 그는 어린 시절에 상당한 피아노 연주 수준에 올라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특히 쇼팽의 피아노곡들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독특한 음악적 감수성은 훗날 그가 수도생활에 입문해서 자신의 영성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됐습니다. 복녀의 영성 세계는 예술적 감성과 상당히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으며, 특히 시를 통해 집약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62)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의 생애 ②
‘하느님의 집’으로 거듭난 엘리사벳
첫 영성체로부터 시작된 영적 여정
복녀 엘리사벳의 유년기에서 그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이라면 단연 첫 영성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어린 엘리사벳은 첫 영성체를 준비하기 위해 상당히 열심이었고 대단한 기대를 품었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은 7살에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본 후 충실하게 첫 영성체를 준비했습니다. 마침내 1891년 4월 19일 12살이 되던 해, 엘리사벳은 첫 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복녀는 성체 안에 현존해 계신 예수님께 많이 끌렸으며 평소에 늘 자기 영혼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복녀의 일생에서 예수님의 현존, 더 나아가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은 일생을 통해 드러나는 아주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현존에 대한 깊은 자각과 투신 속에서 장차 복녀의 고유한 영성적 색채가 형성됩니다. 이런 일련의 영적 여정에서 볼 때, 엘리사벳의 첫 영성체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그 안에서 시작된 그분을 향한 끌림은 이 여정의 첫걸음인 셈입니다. 이때부터 엘리사벳은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며 그분께 애정을 쏟고자 했습니다. 이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성숙함도 갖춰 갔습니다.
디종 가르멜 수녀원과의 인연
첫 영성체는 어린 엘리사벳에게 장차 자신이 이 지상에서 이루게 될 소명을 꽃피울 못자리와 인연을 맺게 해 주었습니다. 그 못자리는 다름 아닌 디종 가르멜 수녀원이었습니다. 첫 영성체를 한 그 날 오후, 엘리사벳은 어머니와 함께 디종 가르멜 수녀원에 인사하러 갔습니다. 당시 디종의 신자들 사이에서는 자기 자녀 중에 누군가 첫 영성체를 하면 그 아이와 함께 가족이 가르멜 수녀원을 방문하는 좋은 관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맏딸이 첫 영성체를 통해 이제 신앙적인 면에서 한층 성숙한 아이로 자랐음을 기뻐한 복녀의 어머니는 가르멜 수녀원을 찾습니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엘리사벳을 데리고 그곳 수녀들에게 아이를 소개하며 기도를 청하기 위해 면회를 갔습니다.
현재 프랑스 전역에는 약 100여 개의 가르멜 수녀원이 있는데 디종 가르멜은 1605년 9월 21일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설립된 유서 깊은 수녀원입니다. 특히 이곳은 성녀 데레사가 가장 아끼던 애제자인 예수의 안나 수녀가 스페인에서 여러 동료, 제자 수녀들을 이끌고 직접 창립한, 성녀 데레사의 정신이 깊이 배어 있는 수도 공동체입니다.
처음 창립될 당시 이 수녀원은 디종 시내의 ‘샤르보네리 거리’에 세워졌으며 그 후 1613년 성녀 ‘안나 거리’로 이전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정부의 반교회적 정책으로 1819년 잠정 폐쇄됐다가 51년 후인 1870년에 와서야 ‘카르노 거리’에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복녀 엘리사벳이 훗날 1901년 입회하게 될 수녀원은 바로 이곳으로, 엘리사벳의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엘리사벳을 비롯해 그의 어머니와 동생은 특별한 날이면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수녀님들과 교감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적인 인연들이 이어지며 소녀 엘리사벳의 마음에는 가르멜을 통해 자신의 성소를 꽃피우고자 하는 열망이 자라났습니다. 복녀 엘리사벳의 흔적이 깊이 배어 있는 디종 가르멜 수도 공동체는 1979년 디종 외곽에 있는 ‘플라비녜로’(Flavignerot)라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로 이사해서 살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에 담긴 신비적 의미
첫 영성체 후 엘리사벳이 어머니와 함께 수녀원을 방문했을 당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 디종 가르멜의 원장 수녀님은 한껏 기뻐하던 엘리사벳을 축하해 주며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이 간직하고 있는 의미, 즉 그것이 ‘하느님의 집’이라는 의미라는 걸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사벳’ 이름에 대해 영성적으로 풀어서 설명한 내용이 담긴 작은 상본을 선물해 주셨는데, 이 또한 복녀의 일생에 늘 회자되곤 했던, 장차 복녀의 성품에 영향을 끼친 어린 시절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이 누구이며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그의 현재와 미래의 정체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이름에 담긴 ‘하느님의 집’이라는 의미를 일생을 통해 곱씹으며 자신이 일생을 통해 이뤄야 할 소명을 자각해 갔습니다. 이는 장차 가르멜 수녀원에서의 생활을 통해 심화하게 될 것으로, 무엇보다 자신을 삼위일체 하느님이 머무시는 집으로 인식하며 자기 영혼 안에서 그분을 흠숭하고 찬미하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이룩해야 할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돼주었습니다.
당시 디종 가르멜 원장 수녀가 엘리사벳에게 준 상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었는데 이는 그의 마음에 깊이 각인됐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이름은 위대한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 주님께서 오늘 그 신비를 이루셨습니다 / 아기여, 당신의 마음은 이 땅에 있습니다 / 하느님의 집, 온전히 사랑이신 하느님의 집이여.”
그로부터 2년 후인 14살이 되던 해, 엘리사벳은 내면에서부터 하느님이 자신을 가르멜 수녀로 부르신다는 내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개인적으로 동정 서원을 했습니다. 또한 이때부터 엘리사벳은 다양한 시를 썼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 침묵과 고독 중에 오직 하느님과 살고자 하는 자신의 원의를 다졌습니다.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63)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의 생애 ③
가르멜 성소 자랄수록 어머니 시름도 깊어져
사춘기 시절의 엘리사벳
복녀 엘리사벳이 남긴 작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지인들과 나눈 편지입니다. 복녀는 죽기까지 대략 340통의 편지를 썼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과 교감하고 자신의 삶과 영성을 나눴습니다. 우리는 주로 이 편지를 통해 엘리사벳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복녀가 디종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는 1901년 8월 전까지 쓴 80여 통의 편지를 보면 몇 가지 특징적인 모습이 두드러져 드러납니다.
편지로 보게 되는 당시 엘리사벳의 가정은 중상류층에 속했습니다. 엘리사벳은 품격 있는 어머니의 지인들을 비롯해 친척들 사이에서 제법 교양 있는 아가씨로 성장했습니다. 중상류층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파티나 댄스에 참석하곤 했으며 여러 기회에 피아노 연주를 통해 한껏 흥을 돋우는 분위기 메이커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인들과 크로켓이나 테니스 같은 고급 스포츠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여흥에 참여하면서도 엘리사벳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의 현존에 대한 자각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내적으로는 늘 주님을 향해 있었고 그만큼 그런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첫 영성체로부터 시작된 주님을 향한 영적 여정, 그리고 14살에 체험한 가르멜 수도 생활을 향한 내적 부르심을 엘리사벳은 늘 마음 깊이 간직하며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를 거쳐 갔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창조주께 매료되다
그 시절 엘리사벳이 쓴 많은 편지에는 여러 기회에 걸쳐 가족과 함께했던 다양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엘리사벳 가족은 주로 프랑스 남부 지역을 많이 여행했는데, 거기에는 엘리사벳 가족과 친분이 두터운 예전 본당 신부님들, 친지들, 친구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름 방학이나 부활, 성탄 방학을 이용해서 많은 여행을 다니며 여러 지인과 맺은 관계를 돈독히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행을 통해 다양한 자연경관들을 보면서 엘리사벳의 마음속에는 이렇듯 아름답고 신비스런 자연을 만드신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생각이 깊게 자리 잡아 갔습니다. 당시 엘리사벳이 여행하며 썼던 여러 편지에는 자신이 보고 방문했던 아름다운 자연경관들에 대한 감탄이 담겨 있으며, 무엇보다 그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주로 여행한 지역은 프랑스 남서부의 스페인 접경지대에 위치한 피레네 산맥 근처의 아름다운 도시들로 루르드, 타르브, 포, 바욘느 그리고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 인근에 있는 안시, 제네바, 그레노블처럼 그림 같은 도시들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통해 각성된 엘리사벳의 깊은 예술적인 감수성은 그 시절 보았던 아름답기 그지없는 자연경관들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 갔으며 무엇보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깊이 매료돼 갔습니다. 예컨대 엘리사벳은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며 영원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높이곤 했습니다. 그가 바라본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주님께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와 같았던 셈입니다.
가르멜 성소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봉헌
이렇듯 사춘기의 엘리사벳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지인들과의 만남, 음악, 파티와 댄스 그리고 여행을 통해 더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영원을 향한 갈망이 깊어 갔으며 그래서 그에게 사춘기는 동시에 영적인 도약을 위한 내적 투쟁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4살에 가르멜 수녀가 되겠다는 부르심을 느낀 이후로 엘리사벳은 사춘기 내내 이 소망을 키워 갔습니다. 1894년부터 가르멜에 입회하는 1901년까지는 이런 가르멜 성소가 자라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춘기를 거치며 소녀에서 어엿한 아가씨로 거듭나는 가운데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자신의 정배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사랑에 온전히 응답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워 갔고 무엇보다도 이를 가르멜 영성 안에서 성숙시켜 갔습니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사랑에 대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은 자신을 통째로 그분께 봉헌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철저한 봉쇄와 침묵 속에서 한 생애를 자신의 정배께 온전히 봉헌하고자 열망했던 엘리사벳의 가르멜 수도 성소가 지닌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에게 가르멜이란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귀속시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 엘리사벳의 뇌리에 늘 후렴구처럼 자리 잡았던 화두는 자신을 예수님께 통째로 내어드리는 것, 그분을 만나기 위해 기도에 전념하는 것, 그리고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중재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디종 가르멜에 입회하기 1년 전에 썼던 「내적 일기」에는 이런 원의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저는 아직 이 세상에서 1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선행을 하며 이 시기를 잘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안에 가르멜 수녀의 마음을 만들어 주소서. 내면에서부터 그것을 살아낼 수 있고 또 그러길 원합니다. 나의 하느님, 제가 온전히 당신의 것이라는 게 이 얼마나 감미로운지요” (「내적 일기」138).
이렇듯 사춘기 시절의 엘리사벳은 이미 세속에서부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진 가르멜 수녀이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가르멜에 입회하기까지 엘리사벳은 어머니의 반대라는 난관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64)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의 생애 ④
‘삼위일체 하느님’ 안의 삶 깨달아
- 디종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의 엘리사벳.
어머니의 입회 반대로 인한 위기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엘리사벳은 엄마가 바랐듯이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로 커갔습니다. 비록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의 사랑을 흠뻑 받았고 좋은 친척들, 다양한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엘리사벳의 마음속에는 일생을 가르멜 수녀로 살면서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고 싶은 원의가 깊이 자리 잡아 갔습니다. 반면, 남편을 잃고 두 딸만 바라보며 살았던 엄마는 그런 큰딸의 생각을 알게 되자 크게 반대했습니다. 엄마는 엘리사벳이 피아니스트로 대성하고 또 좋은 남편을 만나서 평범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길 바랐습니다.
그러던 차에 엘리사벳은 1899년, 1주일간 루이 쉐스네라는 예수회 신부님이 지도한 피정에 참석하고 이어서 한 달간 구속주회 신부님들이 지도한 디종 본당의 선교 대회에 참석하게 됐는데, 뜻밖에도 그 기간에 어머니는 엘리사벳이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는 걸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어머니는 다시 결정을 뒤집고선 혼처가 났으니 결혼하라고 엘리사벳을 어르고 달랬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을 많이 아끼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엘리사벳의 어머니는 신심이 깊은 분이었고 또 가르멜 수녀원을 제집 드나들 듯이 다니며 늘 미사에 참여하며 기도하고 수녀님들과 좋은 영적 친분을 나누던 분입니다. 하지만 자기 딸이 봉쇄 가르멜 수녀원에 가겠다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르멜 수녀가 되고자 했던 엘리사벳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은 복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자신의 정배로 받아들이고 더욱더 자신을 그분께 속한 여인으로 자각하게 했습니다.
주님의 구원 신비에 동참
그 시절 엘리사벳의 마음에는 특히 예수님의 구원 신비에 더 깊이 동참하고 싶은 원의가 커 갔습니다. 그래서 복녀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자신을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봉헌하고자 했습니다. 예컨대 엘리사벳 가족은 당시 세를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은 ‘샤퓌’라는 중년 신사였는데, 복녀의 편지들을 살펴보면, 샤퓌씨는 꽤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지만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그 주인아저씨가 회개해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자가 되기를 바라는 지향을 갖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결국 이분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 임종했다고 합니다.
또한 엘리사벳은 이웃집 여자아이들을 돌봐주면서 그 아이들이 첫 영성체를 잘하도록 준비해 줬습니다. 특히 복녀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냈던 친구들이나 입회 전에 돌봐준 어린아이들을 삶으로, 그리고 편지로 동반하면서 영적으로 조언해 줬습니다. 이런 인연들은 훗날 가르멜에 입회한 후에도 이어져 엘리사벳은 편지 왕래를 통해 계속 이들을 영적으로 인도해 주게 됩니다. 이러한 편지들은 복녀의 영성의 핵심을 보여 주는 백미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예를 들어, 「우리 성소의 위대함」이란 작품은 7살 아래의 프랑부아즈라는 소녀에게 보낸 편지로 복녀는 영적인 엄마처럼 그 소녀를 돌보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여러 가지 영적 조언을 해줬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주(內住)에 대한 자각
1899년 여름, 엘리사벳은 스위스의 유라, 보스쥐 같은 곳에서 지내며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과 성녀 데레사의 「완덕의 길」을 탐독하며 가르멜 영성에 점차 심취해 갔습니다. 엘리사벳은 이런 작품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영혼 깊은 곳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달았으며 이러한 자각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고 구원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그분의 고통을 나눠 받기를 간절히 원하도록 이끌었습니다.
1900년 1월, 엘리사벳은 요셉 호프노라는 예수회 신부님이 며칠간 지도하신 피정 강론에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호프노 신부님이 나눈 피정은 ‘우리 주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신 고독’이란 주제로 진행됐는데, 엘리사벳은 이 피정에 참석한 이후 진심으로 고독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 시절 복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특히 하느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거하신다는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이었는데, 엘리사벳은 자신의 영성 생활에서 이 점에 대해 좀 더 깊이 지도를 받기 위해 다양한 영성 서적들을 읽고 주위 신부님들께 조언도 청했습니다. 특히 복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1900년 도미니코회 발레 신부님과의 만남으로, 이분은 은총을 통해 이뤄지는 영혼 안에서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주(內住)가 무엇인지 복녀에게 올바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엘리사벳의 영성생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습니다. 그전까지 엘리사벳은 비록 자기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느낌을 갖고 있었지만, 그 하느님이 삼위일체적인 특징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엘리사벳에게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이 단순한 하느님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는 걸 정확히 알려 준 분이 다름 아닌 발레 신부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에 깊이 몰두하도록, 그리고 그분의 품 안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줬습니다. 사실, 이때부터 복녀 엘리사벳의 영성에 있어 핵심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깊은 흠숭, 그리고 그분에 대한 찬미의 영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65)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의 생애 ⑤
영적 메마름과 질투에 시달려
21살에 디종 가르멜에 입회
1901년 8월 2일, 엘리사벳은 21살의 나이로 디종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습니다. 당시 복녀의 어머니는 맏딸의 그런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한동안 절망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복녀 역시 마음이 매우 아팠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신하면서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가르멜 성소를 꽃피우기 위해 수녀원에 입회했습니다. 입회를 반대하던 어머니를 대신해서 엘리사벳의 입회를 위해 꼼꼼하게 준비해 준 사람은 디종 가르멜의 당시 원장인 예수의 마리아 수녀였습니다. 마리아 수녀는 엘리사벳의 영적 여정에 중요한 계기가 된 발레 신부와의 만남을 주선해 준 당사자이기도 했습니다.
청원기와 수련기
엘리사벳은 수녀원에 입회해서 약 4개월간의 청원기를 지내며 이미 내적 생활에서 진보를 하게 되는데, 두 번째 엄마처럼 따르던 수르동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복녀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전 지상에서 제 천국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천국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깨우치던 날 제 안에선 모든 것이 환히 비쳤습니다.” 당시 엘리사벳은 자기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실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영성 생활에 진보했습니다.
자기 영혼 안에 천국이 있고 그 천국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거하신다는 데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엘리사벳은 자신의 가르멜 성소에 더욱 더 확신을 갖고 살게 됩니다. 1901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축일에 엘리사벳은 수련기를 시작하면서 수도복을 받는 착복식을 하고 정식 수도명(修道名)으로 ‘삼위일체의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자신이 목숨을 다해 추구해야 할 화두로 수도명에 각인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엘리사벳은 약 1년간의 수련기를 통해 가르멜 영성을 깊이 있게 배우면서 자신의 하느님 체험이 무엇인지 가르멜 성인들의 가르침을 통해 성찰하고 다듬어 가게 됩니다. 그리고 1903년 1월 엘리사벳은 수도 서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엘리사벳은 한동안 일종의 영적인 메마름의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영성적으로 소위 ‘어두운 밤’으로 표현되는 정화의 시기를 말하는데, 사랑이 많고 예술가적인 감수성을 지녔던 엘리사벳에게 이 시기는 아주 혹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심증도 있었고 그 전에 확신하던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오던 내적인 빛도 사라져 버린 듯했다고 합니다.
다양한 시련을 거치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본격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서 여러 수녀님으로부터 야단도 맞고, 또 몇몇 수녀님이 능력이 많고 젊고 예뻤던 엘리사벳 수녀를 시기 질투하는 바람에 적지 않게 힘들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수녀님을 질투하던 안느 마리라는 수녀님은 훗날 엘리사벳을 복자품에 올리기 위해 했던 시복 소송에서 엘리사벳이 복녀가 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불리한 증언을 했다고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질투는 인간의 보편적 심성 가운데 하나인가 봅니다.
더욱이 디종교구장으로 엘리사벳 가족과 친분이 있으신 노르데 주교님이 당시 반교회적인 정치인들과 친분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디종교구 내에서는 주교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이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주교님 소문을 들으며 엘리사벳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엘리사벳의 영적 지도자들
수도 생활 초창기에 겪었던 이런 일련의 시련을 엘리사벳이 잘 넘어서게 된 데에는 디종 가르멜의 원장인 예수의 제르멘 수녀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제르멘 원장 수녀님은 어려움에 처한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동반하면서 하느님 은총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르멜 수녀로서 올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가르침을 준 분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수도 공동체의 원장이었지만 엘리사벳에게는 원장 이상으로 스승이자 영적인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녀는 적지 않은 편지를 통해 제르멘 수녀님과 영적인 교감을 나눴으며, 훗날 생의 말년에 임종하기 전에는 자신이 이승에서 걸어왔던 ‘영광의 찬미’로서 자신의 소명을 이 수녀님께 맡긴다고까지 말하며 깊은 신뢰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분 말고도 엘리사벳은 수련기 동안 자신을 이끌어 줄 또 다른 중요한 영적 지도 신부님을 만나게 됩니다. 에드몽 베르느 신부님이라고 하는 예수회원으로, 당시 디종 가르멜 수녀원의 영적 지도 신부님으로 공동체에 큰 도움을 주던 분이었습니다. 에드몽 신부님은 혹독한 내적 시련 중에 있던 엘리사벳의 상태를 식별하고 그 시련을 넘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서원을 할 때까지 엘리사벳에게 큰 힘이 돼 주었습니다.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66) 삼위일체의 복녀 엘사벳의 생애 ⑥
주님 사랑으로 세상 품기를 꿈꾸다
상존 은총에 대한 깨달음
1903년 1월 11일 공현 대축일에 엘리사벳은 서원을 발했습니다. 이때부터 복녀는 그간의 시련을 뒤로 하고 더욱더 깊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복녀는 「서간」 154번을 통해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전합니다. “아, 이모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답니다!”
서원을 기점으로 엘리사벳의 영적 여정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특히 복녀는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관상적인 측면’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동시에 이때부터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아 갔습니다.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안에서 은총을 통해 신적으로 변모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갈수록 인간은 점점 하느님처럼 변해 가는데, 그것을 ‘신화’(神化) 또는 ‘성화’(聖化)라고 부릅니다. 통상, 신학에서는 은총을 ‘조력(助力) 은총’과 ‘상존(常存) 은총’으로 구분하며 이 중에서도 상존 은총은 신앙생활에서 안내자가 되어 우리를 인도해 주는 주된 은총입니다. 이 상존 은총을 ‘신화 은총’ 또는 ‘성화 은총’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느님께서 이 은총을 통해 인간을 당신처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엘리사벳이 십자가의 성 요한을 통해 알아들은 은총은 다름 아닌 이 상존 은총입니다. 이 은총에 대해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상존 은총은 다시 ‘내주(內住) 은총’과 ‘변모(變貌) 은총’으로 나뉩니다. ‘내주 은총’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항시 거하시는 은총을 말합니다. 이 은총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받게 되며, 세 위격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주고 성장시켜 줍니다. 이 관계가 성장함에 따라 인간은 점차 하느님을 닮아 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과 사랑의 관계를 나누는 우리를 점차 당신처럼 변화시켜 주시는 은총을 ‘변모 은총’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의미하는 ‘내주 은총’이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에 이를 통해 인간이 하느님처럼 변화되는 ‘변모 은총’이 주어집니다.
‘오, 흠숭하올 삼위일체, 나의 하느님’
엘리사벳은 1904년부터 영적 여정에서 자신을 인도해 줄 새로운 성녀를 만나게 되는데,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가 그분이었습니다. 특히 성녀 가타리나가 쓴 「대화」라는 작품에 수록된 ‘삼위일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엘리사벳이 가장 좋아하는 기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모든 원의를 담아낼 수 없었던 엘리사벳은, 마침내 1904년 11월 21일, 자신의 영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기도문을 작성하게 됩니다.
‘오, 흠숭하올 삼위일체, 나의 하느님’이라 불리는 이 기도문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한 엘리사벳의 열렬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의 내주(內住) 안에 깊이 잠겨 이승에서부터 이미 천국을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더 나아가 이승에서부터 삼위일체 하느님을 흠숭하며 그분께 ‘영광의 찬미’를 드리며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소명을 살겠다는 엘리사벳의 굳은 결심이 담겨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기도문은 엘리사벳의 영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세상 구원을 향한 사도적 열망
이렇듯 영적으로 진보할수록 엘리사벳은 자신의 구원이나 성화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 대한 성화와 영혼 구원에 보다 더 자신을 열어젖혔습니다.
외견상 봉쇄 수녀원으로 들어가 평생을 산다는 것은 외부 세계와의 절대적 단절을 의미하지만, 영적인 세계에서 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욱 깊이 하느님께 자신을 투신함으로써 그 안에서 세상을 끌어안고 세상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예언자적인 행위입니다. 엘리사벳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원을 한 다음부터는 종종 면회실에서 가족들을 비롯해 지인들을 만나며 또는 서신 교환을 통해 그들과 자신의 영적 체험을 비롯해 이를 통해 얻은 은총을 나누곤 했습니다.
특히 엘리사벳은 맏딸과의 이별로 힘들어하는 어머니와 언니를 잃은 아픔을 겪어야 했던 여동생에게 영적인 엄마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그들이 인간적인 애착을 넘어서 그들 안에 현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사랑하며 이미 이승에서부터 천국을 살도록, 그리고 자신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감사의 삶을 사는 영혼이 되도록 끊임없이 격려하고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는 후에 여동생 기트를 위해 ‘믿음 안에서 천국’이라는 주옥같은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엘리사벳의 마음 안에서는 인류를 위해 수난하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커갔습니다. 이는 이미 수녀원 입회 전부터 가졌던 열망으로, 입회 후에는 그분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엄격한 수도 생활을 통해 자신의 기도와 희생으로 많은 영혼들, 특히 죄인들을 그분께 데려가겠다는 사도적인 삶으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한 마디로, 봉쇄 가르멜 수녀로서의 그의 수도 생활의 이상에는 사도가 되어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깊이 끌어안겠다는 꿈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와 가르멜 수녀, 그건 결국 같은 말입니다”(「서간」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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