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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요한 복음
A. 공관 복음서와의 차이점
관점의 차이: 공관 복음(특히 마가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선교를 시작하여 11:1에 이르기 까지 예루살렘에 가지도 않으시며 불과 일주일후에 십자가 죽임을 당하신다. 반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선교를 시작하며 갈릴리보다는 이 지역에서 시간을 보내신다. 적어도 세 번 예루살렘을 방문 (2:13, 5:1, 7:10): 사역기간도 2-3년.
-- 1:1 (Jesus = God)
--공관 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의미에 대해서 공개적인 선언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에 초점을 두고 있다. 반면 요한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주장을 거듭 밝힌다. ex. I am ... "나는 ...이다” 6:35, 8:12, 10:9, 10:11, 11:25, 14:6, 15:1 cf. 8;24, 28, 58; 13:19; 18:5). 이는 출 3:14의 야훼 하나님의 어투와 비슷하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성 모독으로 돌에 맞아 죽을 죄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8:58-59).
B.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유대인들
C. 복음서의 결론 (20:30-31): 집필의 목적
D. 7개의 표적들
2:1-12:50에서 요한은 일곱개의 예수의 이적들을 서술한다.
1) 물을 포도주로 (2:1-11)
2) 왕의 신하의 아들고침 (4:46-50)
3) 베데스다 연못 (5:1-15)
4) 오천명 먹임 (6:1-15)
5) 물위 걸음 (6:16-21)
6) 소경보게 함 (9:5)
7) 나사로 부활 (11장)
마지막 표적--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는데, 그가 주는 생명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어짐이 나타남.
*** 이 이적들은 윗 세상의 것을 아래 세상에 예시해 주는 것으로 이적(표적)이다. 이 이적들에 대해 유대인들의 오해가 일어난다. 이들은 아래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윗 세상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한 바를 아랫 세상의 관점으로 해석을 하고 판단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오해한다. 예수는 긴 강론으로 자신이 일으킨 사건들이 아래 세상의 현상이지만, 윗 세상의 어떠한 진리를 표시하는 이적인지를 해설한다. 예수는 생명 혹은 영생을 예시하여 준다. 이런 이적은 그러므로 표적(semeia)이다.
5. 로마서
(기록 목적)
로마서는 바울 서신 연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 연구에 있어서도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서신으로 자리매김하여 오고 있다. 이렇듯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담고 있는 서신인 로마서는 바울이 개척하지도 않았고 왕래도 거의 없었던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내어진 서신임을 고려할 때 특이하다고 할 수가 있다. 자신이 개척하지도 않은 교회의 교인들에게 16장에 걸친 장문의 서신을 쓰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교인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는 교리 서신을 쓰고 있는 것이 특이한 일이다. 자신과는 별다른 유대 관계가 없는 생면 부지의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은 일반적인 안부와 자신을 소개하는 정도로 서신을 기록했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인데도, 왜 바울은 자신이 개척하지도 않은 로마 교회에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담고 있는 서신을 써야 했었을까?
로마서의 기록 동기에 대해서 바울은 15:19-24에서 피력하고 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이제까지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통하여 지중해 동부에서의 선교를 마치고 당시의 로마 사회에서 세상의 끝으로 알려진 지중해 서부--서바나(스페인)--선교를 앞두고 자신의 복음을 소개하여 로마 교회의 도움과 지원을 얻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러서 교회를 방문하여 친교도 나누고 선교 후원도 받기 위하여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가 있다. 이제까지 바울은 안디옥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아 동부에서의 선교를 하여 왔으나 이제는 제국 서부에로의 선교를 시작하려는 중대한 전환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바나 선교를 위해서 로마 교회의 후원을 염두에 두고서 서신을 써야 하였다면 로마서는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와 서바나 선교의 필연성을 역설할 것이지 왜 신학적 논쟁으로 일관하고 있나에 대한 설명으로서 선교 후원의 동기는 미약해 보인다. 로마서를 기록한 이유나 동기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상이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말미암는다고 할 수가 있다. 학자들의 견해는 로마서의 기록 목적은 15장에 기록된 기록 목적을 넘어서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 데에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로마 교회는 언제 어떻게 세워졌으며,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 있었으며, 그리고 바울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에 대해 학자들의 관심이 쏠려 있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과 연관하여서, 로마서 기록 동기에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발견되고 있다 (행 2:5-42; 18:1-3).
A. 클로디우스 황제의 추방령과 로마 교회
바울은 직접 로마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어떤 사도나 선교사에 의하여 로마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사도행전을 근거로 추측은 해볼 수가 있는데, 복음은 아마도 유대인들 사이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누가의 기록인 사도행전 2장은 로마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 사건을 목도(2:10)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2:14-40)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2:41-42)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회심하여 로마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유력한 견해이다.
행 18:1-3에 따르면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에 로마에서 온 성도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는데, 이때가 A.D. 50년 경으로 본다면 로마 교회는 50년 훨씬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고린도에 오게된 이유를 누가는 클로디우스(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행 18:2), 당시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클로디우스 황제가 A.D. 49년에 칙령을 내려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켰다고 한다. 클로디우스 황제의 칙령은 로마서 기록 동기를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1세기 로마에는 약 4-5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클로디우스 황제가 이러한 대규모의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켰다는 것은 상당히 중대한 사건에 속한다. 이것이 중대한 사건임은 오늘날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현재 미국 인구의 1% 정도가 유대인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1%의 유대인들이 미국 정치, 경제, 사회 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시의 로마 인구가 얼마나 되는 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100만이라고 한다면 인구의 약 5% 정도가 유대인이라는 계산이다. 50만이라고 한다면 10%대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이 정도의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살고 있었다면 유대인들이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 지는 알 수가 없겠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가 있다.
당시 유대 상인들과 그리스 상인들이 로마 제국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상권을 형성하였고 이 두 집단이 경쟁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 오는 사실이다. 오늘날 미국의 유대인들이 전체 인구의 단 1%만 되어도 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볼때, 당시 도시 전체 인구의 5-10%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전 유대인들을 하루 아침에 로마에서 추방시킨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편에서는 상당한 결단을 요구했던 중대한 사건이었음이 확실해진다. 클로디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내려진 유대인 추방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로마 도시 사회에 끼쳤음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경제적 힘이 상당하였다는 것은 클로디우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네로 황제가 추방된 유대인들이 불과 5년만(A.D. 54)에 로마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는 사실로 입증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을 유대인 추방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저술한 <클로디우스 황제의 생애 (Life of Claudius)> 25장 4절에 따르면 클로디우스 황제가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에 의해 유대인 사이에서 야기된 상습적인 소요사태로 인하여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고 한다 (Claudius expelled Jews from Rome because of their constant disturbances impelled by Chrestus.). 여기서 크레스투스는 누구를 가르키고 있을까? 크레스투스(Chrestus)는 크리스투스(Christus)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이유는 1세기에 헬라어에서는 ‘에(e)’와 ‘이(i)’를 거의 동일하게 발음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당시 로마 유대인 사회에서 그만한 분쟁을 이끌 역사적 인물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면 클로디우스 황제는 로마 유대인 사이에서 그리스도로 야기된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로마 도시밖으로 추방한 것이 된다. 황제의 추방령은 49년에 있었는데, 이것은 49년 이전에 이미 로마에서 복음의 증거가 활발히 진행되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 회당에서 충돌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행 18:1-2).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고 주장하였을 것이고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이를 극렬히 반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소요가 상습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당시 로마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수의 유대 그리스도인으로는 황제의 추방령을 이끌 정도의 대규모 소요사태를 야기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기 7-10여년 전에 로마 황제가 4-5만의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할 정도라면 로마 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이 가능하다.
B. 클로디우스 황제의 추방령과 로마서
클로디우스 황제의 추방령은 로마서를 기록하는 바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유대인 추방령은 가장 먼저 로마 교회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가 있다. 로마 교회는 마가 다락방 사건을 목도하고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돌아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세워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대인보다는 더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나아 온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는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유대식 이름들(아굴라, 브리스가, 안드로니고, 유니아, 헤로디온등)이 있는 가 하면 많은 이방인들의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거들에 의하면 49년 당시의 로마교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혼합 교회임을 알 수가 있다. 로마서의 곳곳에 나오는 이방인에 대한 언급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1:5, 13; 11:13, 23-24, 28, 31; 15:7-9).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로마 교회는 클로디우스 황제의 추방령으로 중대한 전기를 맞은 것으로 보여진다. 추방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포함되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cf. 브리스 길라, 아굴라: 행 18:1-2).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추방된 유대인들이 54년의 클로디우스 황제의 사망과 네로 황제의 등극으로 인하여 다시 귀환하였다. 하지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돌아 왔다 하더라도, 5년간의 공백 기간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 교회의 주도권을 넘겨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따라서 교회내에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귀환한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서신에 심화된 양자사이의 갈등에 대한 화해의 시도가 여러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18-4:25; 9-11장, 11:18-21, 28-30; 14-15장, 15:8-13, 18; 16:17-18등).
이상의 정황들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염두에 두었을 사항들이다. 로마서의 기록 목적과 연관하여 고려하여야 할 중대한 사안은 추방되었을 당시에 추방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 개척한 여러 교회들의 교인들과 접촉하였으리라는 가능성이다. 바울의 교회와 직접적 접촉을 갖고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고 로마 제국내 각지로 흩어져야 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을 통하여 바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로 귀환한 이들이 바울에 대한 나쁜 소문들도 듣고 돌아갔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과 암시들이 나오고 있고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교회에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를 기록하는 시점까지도 바울은 갈라디아, 고린도등의 지역에서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의 방해와 또한 회심자들의 잘못된 이해와 오류에 직면하고 있었다. 로마서 3:8에도 바울을 대적하는 자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고 있다.
C. 유대인 추방령과 로마서 기록 목적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중에 자신의 복음에 동의하는 자도 있었겠지만 동의하지 않는 자도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방인 선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가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신의 복음의 본질에 대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확신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마찬 가지로 곧 방문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앞에서도 자신과 복음을 변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로마서는 바울의 복음을 변호하고 변증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 서신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신의 복음과 입장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로마에 있는 비방자들의 공격과 비방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 특히 서바나 선교를 앞두고 로마 교회의 후원을 얻고자 하는 바울이라면 비방자들에게 자신의 복음을 반증하고 변호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에서 우리는 왜 로마서가 기독교의 진수를 담고 있는 교리서신이며 로마서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