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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길 1일 차(2023.9.8. 금요일, 맑음)
생장피에드포르 ~ 론세스바예스 (26km, 04:40~12:35, 7시간)
어젯밤 8시에 잠자리에 들어서 화장실 한 번도 안 가고 잠을 잤다.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4시쯤에 깨서 너무 이르다 싶어 조금 더 자려고 하는데, 대만에서 온 여자 세 명이 알람 소리를 내는 바람에 잠이 확 달아났다. 개의치 않고 눈을 감고 있는데, 그녀들이 짐을 꾸리는 건지 부스럭대고, 움직일 때마다 헤드 랜턴의 강한 빛이 눈을 찌르는 듯한다. 그냥 자리에 누워 있을 바엔 일찍 출발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물건들을 한 아름 안고 식당으로 나와 짐을 꾸렸다.
배낭을 메고 알베르게를 나서는 시간 04시 40분, 해가 뜨려면 3시간 반이나 더 지나야 한다. 좁은 골목길은 너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빈 맥주병과 콜라 깡통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먹다 버린 빵 조각과 휴지들이 난무한다. 어젯밤 흥청대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는 듯하다. 그러나 골목길은 아무런 말이 없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골목길, 고즈넉한데 내 발 소리가 공명이 되어 퍼진다. ‘너무 일찍 나서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성당을 지나 순례길 시작점인 다리에 섰다.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 한 점 없다. 눈썹 닮은 실 달이 또렷하고, 별들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니브 강 R. Nive은 달빛 별빛으로 물들어 반짝인다. 다리를 건너 300여 미터 좁다란 골목길이 이어진다. 새벽의 고요 속에 내딛는 내 발 소리가 동네를 깨울까 봐 조심스러워진다.
무수한 별과 더불어 발하는 실달 빛으로 새벽은 찬란했다. 이마에 헤드 랜턴을 찼으나 켜지는 않았다. 어슴푸레한 길의 윤곽을 따라 2km가량 걸었을까. 앞에서 헤드 랜턴을 켜고 가는 사람이 보였다.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바로 뒤에 이르러 다짜고짜 “Are you Korean?”하고 질문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청년이었다. “이런 꼭두새벽에 짐을 지고 나오는 사람 대개는 한국 사람이더군요.” 울산에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다가 혼자서 왔다고 한다. 발 관리 요령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리송 Orisson 알베르게 앞에서 헤어졌다. 오리송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 막 동이 트고 있었다. 그 장면이 멋있다고 한 여자 순례자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여명을 배경으로 셔터를 누르니 인물이 어둡게 나왔다. 그녀는 그래도 배경이 멋지다고 엄지척한다. 그녀는 칠레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사는데, 카미노는 혼자 왔다고 한다. 59세, 이름은 베로니카,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고 하니 웃음으로 답한다.
피레네산맥 가운데 나폴레옹이 넘었다는, 이른바 ‘나폴레옹 루트’는 비가 오거나 겨울에는 통제되기 일쑤라고 한다. 풍경은 시원한데, 고도가 높아질수록 경사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숨을 몰아쉬는 주기가 짧아진다. 15km 지점을 지나자 맨바닥에 주저앉아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 관리에 들어간 사람들이 눈에 띈다. 아마 발이 부르트는 초기 증상에 대처하고 있을 테다. 10년 전에 나도 이맘쯤 해서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증상이 느껴져서 푸드 트럭 부근에 앉아 반창고를 붙인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직 아무런 문제가 없다.
18km 지점을 통과하면서부터 너도밤나무 숲이 이어진다. ‘저 굽이를 돌면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이 나타났었지.’ 그때 일군의 사람들이 산악자전거를 타고 반대편에서 달려온다. 길가로 비켜서서 ‘올라’하고 인사를 건네니 ‘부엔 카미노’로 화답해 준다. 저마다 헬멧을 쓰긴 했지만, 꽤 나이가 들어 보인다. 아마 은퇴해서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겠지 하고 짐작해 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성경 구절은 언제나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내 짐은 대략 7kg 정도로 꾸렸다. 물 한 병과 간식을 넣는다 해도 8kg 이내일 것이다. 장거리를 걷는 이에게 적당한 배낭 무게는 자기 몸무게의 10%라고 하는데, 내 몸무게 60kg을 고려하면 1kg을 초과한 셈이다. 애초에 짐을 꾸릴 때 무엇을 넣고 뺄 것인가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필수품목인가 선택품목인가 하는 기준에 따라 필수품만 챙긴다고 하면서도 1kg을 초과한 것이다. 1kg은 평소 같으면 별문제 아니지만, 긴 거리를 걷는 상황에서는 적잖은 부담을 준다. 틈틈이 보겠다고 배낭에 넣었던 책을 버리거나 안내 책자도 지나간 내용은 찢어낸다는 게 과장이 아니다. 심지어 간식용 빵 한 조각 마저 길에 버리는 이유다.
순례길에는 다음 알베르게까지 짐을 배달해 주는 제도가 있다. 몸이 아프거나 배낭을 메고 걷기에 너무 힘든 사람을 위한 제도이다. 순례자들 사이에서는 ‘동키 서비스’로 통한다. 생장에서 출발하는 순례자들에게 첫날 넘어야 하는 피레네산맥은 엄청난 심적 부담을 안겨 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동키 서비스를 이용한다. ‘생장’에 머무는 동안 나 또한 ‘동키 서비스’를 신청할 건지 말 건지 고민을 했다. ‘짐을 맡긴다면 좀 더 수월하게 피레네를 넘을 수 있겠지? 평소 무릎 통증이 악화하거나 발에 물집이라도 잡힌다면 40여 일간의 카미노 내내 고생할 게 불 보듯 뻔하잖아. 70살이나 되었으니 짐을 맡기는 게 오히려 지혜로운 게 아닐까?’. 짐을 맡기든 지고 가든 선택해야 했다. 짐을 맡긴다면 8유로, 적지 않은 돈이다. 결국 8유로를 아끼기로 했다. 무릎이 좀 아플 뿐 아직 건강하고 힘도 있는데 멀쩡한 몸으로 7kg 배낭을 메지 못한다면 어찌 카미노에 선단 말인가. 첫날부터 ‘내 짐은 내가 책임진다.’라는 원칙을 깰 수는 없다.
7시간 만에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성당이 운영하는 대형 알베르게로 숙박비 10유로에 순례자 메뉴 12유로, 아침 식사 5유로 등 30유로를 냈다.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해서도 발가락이나 발바닥, 뒤꿈치 등에 물집이 잡히거나 까진 데가 없었으니 미리 반창고를 붙이고 다닌 덕분이다.
첫댓글 처음부터 피레네 산맥을~
힘들었겠어요.
근데 순례자메뉴는 무엇인가요?
잘 읽었습니다
알베르게 인근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순례자들에게 특별히 제공하는 정식 메뉴로 그날 그날의 '메뉴 델 디아'보다는 저렴합니다. 보통 14유로 내외로 애피타이저부터 후식까지 네 가지 음식이 제공됩니다. 물론 순례자 여권을 제시해야 합니다.
힘든 순례길이 눈에 선하게 느낌이 옵니다
힐링길이라기보다는 순례길?ㆍㆍ대단합니다!!!!
황 형! 반가워요.가까이서 사는데 얼굴 한 번 못 보고 지내네요. 지회 구성 의견을 듣고 싶으니 연락처 좀 알려 주세요.
@장석규 문자 보냈어요